청사초롱 불이 밝다
作.규닝
00.
부용정 청기와 끝에 양각등이 걸렸다. 청량한 하늘 아래 널린 조각보가 연등에 매여 너울거렸다. 한참동안이나 구부려 앉은 무릎이 저릿해 올 때 즈음에는 앞서 있던 좌고가 큰 소리로 부용지를 울렸다. 세 번째 명주실을 줄곧 누르고 있던 해금의 활이 움직였다. 저만치 앞쪽 행렬 끝, 무관들의 칼집이 흔들렸다.
다섯이오! 개중 가장 나어린 광대의 작은 몸이 줄을 탔다. 아슬아슬하게 줄을 떠난 발이 하늘과 땅의 경계 즈음에서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고 놀았다. 그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아찔한 줄타기를 이어갈 때마다 맨바닥에 앉은 초시생들의 가슴이 콩만하게 졸여졌다. 그와 함께 성규의 숨도 턱 하니 막히기 시작했다. 돌바닥 무서운 줄 모르고 허공을 넘나드는 어릿광대가 걱정 되어서가 아니며, 뜯고 있는 거문고의 음률이 엇박으로 어긋나서가 아닌 이유였다. 그의 눈이 자꾸만 한 곳을 힐끔거리며 다녀갔다.
왕이 앉은 차양 옆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푸른색의 관복 무리가 그렇게나 신경이 쓰여 딱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성규가 다시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편종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그러다 와, 하는 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뜬 성규가 어느덧 광대놀음이 끝난 뜰 안쪽에 눈길을 주다가 초시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영연(恩榮宴). 과거에 급제한 문무과 초시생들을 위해 왕이 베푸는 연회였다. 청기와 여기저기 걸린 유리연등이 잔바람에 부딪혀 흔들거리고 있었다. 볕은 좋고, 하늘은 높았다. 자꾸만 왕이 앉은 자리를 흘끔이던 그의 손끝이 떨려올 때 즈음, 광대놀음이 끝을 보자 마당 한켠에 너르게 앉은 녹색의 관복들이 왕이 앉은 곳을 향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한 차례의 흥이 끝난 까닭이었다. 광대놀음의 끝과 함께 장악원의 연주도 멈추었다. 악대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좌고가 다시 한 번 크게 울었다.
머지않아 네 번째 행사는 시작되었다. 갓쪽에 앉았던 기생 무리가 자리를 비켜나니 왕의 곁에 줄지어 섰던 푸른색의 관복이 움직였다. 줄곧 그 곳만을 향해 있던 성규의 눈이 아닌 척 다른 쪽을 향해 빗겨 갔다. 병조의 맨 앞줄에 선 대신이 품 안에서 교지를 꺼내들었다. 그가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무과 초시에 합격한 이들의 영예로운 앞날을 기리는 바이며, 종 5품 이상의 무관 관료들의 행렬이 있겠소.”
“내금위요!”
군사관 대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부용정을 울렸다. 그에 악대의 가장 앞 쪽, 몸을 수그리고 제 앞의 광대놀음을 보고 있던 무동 둘이 악대 뒤쪽으로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대신의 옆 계단으로 푸른색의 내금위 행렬이 줄지어 내려왔다. 성규는 연주를 멈춘 탓에 고요해진 악대 사이에서 혹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까, 긴장하며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종 5품, 판관. 종 4품, 만호! 각 품계를 호명하는 목소리가 아까보타 한 층 컸다. 병조 대신이 외는 품계가 계속될수록 차례대로 앞 쪽에 줄지어 선 행렬이 옆구리의 칼집을 잡았다. 곧이어 수문장, 수군절도사까지 불린 행렬은 이미 고위 관료들만이 이 곳에 자리했음을 알리고 있는 바였다. 장관을 바라보는 무과 초시생들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종 2품이요!”
끝을 모르고 줄줄 품계를 외던 대신의 목소리가 한 차례 끊겼다 터졌다. 그에 무관 행렬에는 침묵이 흘렀다. 한 줄로 늘어섰던 관복 무리 앞에 세 명 분의 걸음이 자리했다. 성규의 눈이 질끈 감겼다 떠졌다.
“겸사복장, 별운검(別雲劍)이요!”
곧이어는 한가득 긴장을 담고 있던 눈에 넋이 흐려졌다.
운검. 임금의 가장 측근에서 그를 호위하는 세 명의 정예 기병이었다. 뒷줄에 늘어선 검은 칼집에 비해 적색, 청색, 백색의 것이 그들의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꼭 죽음처럼 고요한 행렬 앞에서 운검들의 단려한 용모에, 무과 초시생들 사이에서의 수군거림이 더해졌다. 곧 다음 호명은 계속되었다. 8개 도 감사에 이어 도총관에 이르기까지 청색의 관복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자리를 하지 않고 뒤쪽에 멀찍이 선 무관 도제조가 두 줄로 늘어선 무관들 무리를 한 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운검.
성규의 입모양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뱉었다. 일 다경(15분)도 전부터 좌불안석이던 눈동자가 푸른 문양의 긴 칼집에 정확히도 가 닿았다. 허나 어제와는 달리, 칼집의 주인은 목석처럼 곧은 얼굴로 정면만을 향해 있었다. 성규가 그의 굳게 다물린 입술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마치 방금 겪은 일인 것처럼 생경한 기억이 스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공중에서 덜렁 떨어져버린 제 낡은 신발을, 뺨 위로 냅다 얻어맞은 임금의 오른쪽 검.
‘그대의 목을 베어버리는 게 마땅한 일입니다. 궐의 뒷문을 월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궐의 사람인지, 한낱 양인인지도 몰라 뵈어 신원조차 불명한 이가 주상전하의 향나무를 밟고 올라섰으며.’
‘…….’
‘이미 인경(人定)이 지난 시각입니다. 입번(당직)을 서는 이들이 아니고서야 이는 필시 용납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퇴진을 앞두고서 장악원의 악기고를 정리하다가 황 전악(典樂)의 편종 두 짝을 깨트려버린 직후였다.
하늘을 째는 듯 한 소리와 함께 깨어진 편종소리가 찢어지듯 귓가로 날아와 박혔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두 눈은 컴컴하게 꺼지는 듯 했다. 성규의 손이 경기를 일으키듯 덜덜 떨며 깨어진 편종 조각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 보아 봐도 이미 큼직하게 깨어져버린 악기였다. 성규의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는 앞뒤 잴 것 없이, 깨어진 편종을 두루마기 위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은 성규가 걸음아 날 살려라 악기고를 빠져나왔었다. 이미 깨어져버린 악기를 다시 붙여 놓을 재간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일단 자리를 떠나고 보자는 속내였다. 덜그럭거리는 편종 조각을 어깨위로 들쳐 멘 성규가 금호문(관리들의 출퇴근용)을 가로지르려다 걸음을 번복했다. 일부러 대궐 안쪽을 가로질러 들어가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선전원 뒷문을 이용하려 담을 따라 걷던 중, 키에 맞는 향나무를 밟고 올라서 월담을 시도하려 했을 때의 일이었다.
어긋난 기왓장에 발등이 걸려 벗겨진 신발 한 짝이 보기 좋게 담 아래로 떨어져버린 탓에 허둥지둥 뒤를 돌아 내려다 본 담벼락 아래에서, 임금에 버금갈 만큼 벼락같은 존재와 맞닥뜨려 버린 것은. 성규의 온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었다.
이미 발소리를 죽여 담 아래로 다가와 성규가 월담하는 것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건지, 곧은 자세로 성규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던 이가 손에 든 것은 성규의 벗겨진 왼쪽 신발 한 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기다렸다는 듯 얼음장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었다. 담벼락 바깥쪽에 걸쳐진 성규의 나머지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내려오십시오.’
‘…….’
‘그대에게 오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 궐 경비를 돌기에 할 일이 많이 남아있어서.’
그가 입은 청색의 관복을 마주하자, 곧 궐내 경비를 맡은 내금위의 관원일 것이라는 걸 알아챘었다. 그 다음으로 알아본 것은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한 자루의 칼집이었다. 마악 편종을 깨트렸을 때와 버금갈 정도로, 성규의 심장이 아프도록 뛰어댔다. 인경이 지난 직후, 궐내에서 유일하게 칼을 지닐 수 있는 사람.
‘내려오십시오.’
‘…….’
‘…일단은.’
울지 말고. 별운검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두 뺨 온통 눈물을 쏟아낸 얼굴이 소리 죽여 엉엉 울기 시작했다. 차마 살려달라는 말조차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이 잠겨,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옷소매로 엉망으로 구겨 닦던 성규가 그의 찬 음성에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내려오기를 거듭 명하던 목소리가 잠시 후에는 거짓말처럼 누그러져, 성규의 우는 소리를 기다려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성규의 왼쪽 신발을 손에 든 운검은 끝내 말했다.
‘울지 말라니까 더 우는 것은 아마…’
‘…….’
‘수법입니까? 안 통합니다.’
내려오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던 운검의 입꼬리가 이미 절반은 웃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눈물을 훔치던 성규가 이내 두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퇴진 시각은 끝나가고, 밤은 한창이던 때. 은영연(恩榮宴)을 하루 앞둔 날 갖은 인연이었다.
한바탕 기생 놀이가 끝나고 시작된 무관 행렬의 막바지였다. 성규의 눈앞으로 그들의 무예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겸사복장 별운검. 개 중 청색의 검은 춤을 추듯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또다시 멀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쳤던 것은 아주 잠시였다. 그가 저를 알아봤나 싶을 정도로 짧은 찰나였지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잠깐 본 눈매가 꼭 어제처럼 웃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예가 끝나고 그의 검이 청색 칼집에 딱 재어 꽂혀지자 무과 초시생들의 머리가 일제히 땅을 향해 숙여졌다. 세 명의 별운검들이 먼저 등을 보이자 그를 이어 낮은 품계의 무관들이 처음 그랬던 것처럼 줄을 맞추어 부용정 위로 늘어섰다. 악대의 맨 앞줄에 위치한 좌고가 크게 울었다.
전악(典樂)이 오른손을 높게 드는 것으로 다시금 장악원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청운검을 눈으로 좇느라 넋을 빼고 있던 성규가 허둥지둥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이미 무예를 끝낸 무관 행렬은 임금의 차양 옆으로 줄을 지어 돌아가고 있었다. 성규의 눈이 그의 뒤꽁무니를 올망졸망 따라갔다.
그러자 찰나처럼 다시 눈은 마주쳤다. 청운검이 웃었다. 꼭 어젯밤 담벼락 아래, 내려오기를 거듭 명하던 장난기 어린 목소리처럼.
은영연도 막바지였다.
허나 성균관으로의 유가 행렬을 앞둔 장악원의 연주는 더욱 웅장해져만 갔다. 정간보와 운검의 얼굴을 바쁘게 오가던 눈 때문에 결국은 한 음률을 엇박으로 내어버린 성규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집중하자, 집중. 그러나 집중만을 머릿속으로 외던 성규의 무의식은 자꾸만 어젯밤의 일만을 되짚어내고 있었다. 남우현…남우현. 여전히 얼음장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던 이름이 성규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무언가의 시작이었음을 알림과 같이 이른 초봄, 대궐. 겨우내 쌓였던 눈이 가시고 갠 하늘은 무서우리만치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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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 掌樂院 ]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
내금위[ 內禁衛 ]
조선시대 왕의 측근에서 호위를 맡은 군대
별운검[ 別雲劍 ]
인경
통행 금지를 알리기 위하여 밤마다 이경(10시)에 쇠북을 28번씩 치던 큰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