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 이유 by 연영연 * 축제날이 다가올수록 우리는 결국 파트너를 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혔다. 나이도 열일곱 정도가 되었으니 고모만 쫄래쫄래 따라 갔다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 가만히 앉아 과일이나 축내고 있지 않으려면 늦지 않게 누구에게든 말 해.’ 고모가 이동혁과 이민형에게 그러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모두의 관심사는 ‘누가 누구와 춤추게 될까?“ 였는데... 티만 안 냈다 뿐이지 이동혁과 이민형 둘 다 여러모로 심기가 불안정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재작년 마지막 축제 때만 해도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대충 셋이서 놀고 말았는데, 이제는 진짜 짝 구실이라도 하는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겉으로는 둘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나는 그래도 태평한 편이었는데, 사실은 이민형이 나에게 파트너 신청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원래 알던 사람이랑 춤추는 게 편하잖아, 하는 생각. 그리고 부끄럽지만 약간의 기대도 했던 것 같다. 같이 체스를 두거나 그림을 그릴 때. 눈이 마주치는 순간들이 점점 길어지면서 그 시절 열일곱의 나는, 전례 없던 설렘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 이민형은 원래 다정하고 물렁한 사람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심지가 있어서 하고자 하는 일이면 금방 금방 실천에 옮기곤 했기 때문에, 나는 이민형이 곧 파트너를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매일매일 방에서 그를 기다렸다. 머리를 예쁘게 빗어 넘기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은 덤이었다. 어떤 날에는 부엌에 있다가 ‘여주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티가 날 정도로 놀라서 왜? 하고 소리치듯이 물었었다. 하지만 이민형이 멋쩍게 웃으면서 ‘저기, 컵 좀 집어 주라.’ 따위의 말이나 해대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바에는 내가 먼저 말해야지.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다른 집에서 알면 여자애가 먼저 그러다니 경망하다고 할 거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고 이민형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단정히 머리를 묶고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랐다. 거절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에 발걸음이 자꾸만 갈지 모양으로 허둥지둥했다. 그래도 이미 가속이 붙어 발은 멈추지 않았고 포화 상태의 머리로 이민형의 방에 도착. 나는 손잡이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똑.똑. 두 번을 두드렸다. “응, 여주야.” 막상 민형이 문을 열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내려보자 나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파트너 하자고 말을 해야 하는데.... ㅍ ㅏ 트. 너. 단어들이 머릿 속에서 부서지고 웅웅댔다. 우물쭈물대는 나의 모습을 민형이 궁금증 어린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서 더 집중이 안 되었다. 말똥한 시선이 부딪친다. “저기.” “응.” “파트너 있잖아....” “응.” 이민형은 조곤조곤 잘도 대답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아직까지 짝 없으면, 아니, 아직 없지? 없어?” 머릿속이 혼돈의 도가니였으니 입 밖으로 내뱉는 말도 그러한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민형이 갑자기 풉 웃음을 터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응 없어.” “아 없구나. 아직 없구나. 그게 그러면...” “너랑 하고싶어.” “뭐?” “여주야 너랑 하고싶다고.”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랬다. 장난기가 모조리 빠진 갈색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은 달음박질하듯이 뛰고 내 마음은 온통 물에 빠진 듯 넘실넘실...... 대처 능력이 0에 도달하는 나는 얼굴만 벌건 상태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붕 뜨다 못해 울렁거리기까지 한 마음이라서 입꼬리가 진정이 안 되었다. 실실 웃으면서 거실로 내려왔더니 웬일로 이동혁이 1층에 있었다. “야 이동혁.” “너 어딨었어?” “어딨었긴. 너야말로 왜 여깄어?” “알아서 뭐하게.” “너 당번 아니야? 거위 밥은. 울타리는?” “아 좀. 다 하고 왔어.” 내가 잔소리 비슷하게 해서 이동혁이 짜증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이 꼭대기까지 올라간 나는 평소와 다르게 싱글벙글 웃으면서 또 말을 붙였다. “나 파트너 구했다.” “뭐?” “난 이제 축제 때 같이 갈 사람이 있다고.” “.....뭐 어쩌라고 그래서.” 어휴. 하여튼 이동혁 축하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자기가 못 구한 걸 가지고. 하여튼 저런 식이니까 내가 싫어하는 거야. 나는 심술이 나서 그냥 휙 돌아섰다. 그래도 기분은 탄탄한 장벽을 개시한 듯 좀처럼 나빠지지 않았다. 나에게는 다정한 이민형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걸로 됐다. * 몇일 후 이동혁도 짝을 구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지난번 축제 때 알게 되었던 B에게서. 생각보다 엄청 빠르잖아? 잔치가 열리려면 아직 좀 남았었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왜 전에 이사 온 소작농 있잖아, 그 집 딸이래.” B가 우물 옆에 앉아서 말했다. 나는 얼마 전 강에서 조금 떨어진 허름한 집에 웬 부녀가 짐을 풀었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딸내미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그녀의 이름은 메그였다. 저번에 강에서 돌을 줍다가 다리 위를 지나가는 그녀를 봤었던 기억이 났다. 피부는 백옥 같이 희고 머리칼은 눈부신 금발. 걸음걸이는 이제 막 다 자란 소녀의 여리여리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애가 이동혁이랑? 왠지 매치가 안 됐다. 잘 생각해보면 어울리나? 그런데 아예 이동혁이랑 연애랑은 매치가 안 되는 느낌이 있었다. 소설도 로맨스 소설이라면 읽지도 않았고 늘 관심도 없는 듯 굴었으니까. 그런 이동혁이 누군가에게 춤추자고 했다니 나는 궁금증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 “너 파트너 생겼지.” 통밀로 된 빵을 씹으면서 식사 중에 내가 물었다. 결국 내 궁금증이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것이다. 이민형과 이동혁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응, 아나보네.” 놀랄 줄 알았건만 태평한 이동혁의 대답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맞구나? 걔 맞지 메그. 이동혁 다 컸네!” “...” “걔 예쁘더라. 하여튼 눈은 높아가지고...” “....언제 그렇게 봤냐.” “그냥 지나가다 봤지. 언제 신청했어?” “그냥 했어. 밥 좀 먹자.” “와 정말 대단한데? 어디가 그렇게 예뻤어?” “아 진짜.” 그 때 이동혁이 짜증을 콱 내면서 포크를 쨍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아서, 나는 깜짝 놀라 말을 멈췄다. 단란하던 식사 분위기는 한 순간에 일동 침묵. 물어볼 수도 있지.... 입술을 깨물면서 눈치를 보자 이동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또박 또박 씹듯이 말했다. “예뻐. 웃을 땐 귀여워. 머리 색깔도 잘 어울려. 좋아서 미치겠다. 됐지.” 그런 말을 하는 입모양과 새카만 눈동자에 어딘가 화가 서려있다고 느꼈다. 뭐야 그 정도로 좋은 줄 몰랐네. 나는 머쓱하게 중얼거리면서 하하 웃었다. 그래도 식사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 읽어주시는 분들 다들 너무 감사드려요. 첫 연재인데 많지 않은 댓글이지만 정말 큰 힘이 됐어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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