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많다는 점은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한다.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며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게 되기도 한다. 난 이 점을 아주 일찍 깨달았고, 관심이 필요했던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의 나는 이 사실을 아주 영악하게 이용했다. 항상 누구에게든 비밀을 만들었으며 그 누구들에게 모두 다 다른 비밀들을 알려주었다. 그 상대방이 내게 바라는 이미지로, 혹은 내가 그에게 각인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나는 그렇게 비밀을 만들기도, 풀어놓기도 하면서 나를 만들어 갔다. 이렇게 몇 년을 살면서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집에서는 착한 아들로, 친구들에게는 잘 놀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로 자리 잡았다. 그 어디에도 내가 아는 나처럼 무기력하고 그냥 하루 종일 TV만 보며 시간이 흐르길 바라는, 아주 외로움을 잘 타는 도경수는 없었다. 분명히 내가 외롭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이런 생활을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아주 자주, 그리고 깊게 원인을 모를 외로움을 느꼈다. 내 스스로가 나를 위로해야 하는데 내 많은 비밀 가면들 중 누구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을 이렇게 보내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SKY 급은 아니지만 그 밑의 급은 되는 학교의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부모님이 바라는 취업을 위한 상경계열, 학교의 사람들이 모범생이라고 인정할 만한 학교를 종합해서 골랐다. 이 무렵 나는 내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하던 구역질은 더 심해졌으며 남들의 눈에 띌만한 정도의 우울함을 나도 모르게 내비쳤다. 막상 대학에 가긴 가게 되었는데 더 이상 강제성이 없으니 뭘 해야 할지도 몰랐고, 고등학교와 달리 친해져야 할 상대들도 너무 많았다. 그냥 생각해보면 겁이 많았던 것 같다. 막상 지나면 별일이 아닐 텐데. 그리고 나는 OT에 참석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과 술 먹으며 게임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았었고,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는 OT에 간다고 하고 혼자 부산여행을 다녀왔다. 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결국 과 동기들과는 거의 전혀 친해지지 못했다. 고3 겨울방학 시기에 친해졌던 과 동기 세 네 명 정도와는 안면만 튼 사이로, 인사만 하는 그런 사이로 간간이 안부를 물으며 살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2월 말이 되어 수강신청도 하고 입학식에도 참여했으며, 3월의 첫 월요일 나는 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첫 시간은 1학년 전공 필수였는데, 수강 인원이 열다섯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순진했던 나는 대학교 강의는 모두 그런 줄만 알았다. 알고 보니 학점도 짜고 수업도 어렵기로 소문난 교수님 수업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두 번째 수업이 마칠 때쯤이었던 것 같다. 남들은 그 수업을 출석체크만 하고 빠지거나, 수강을 취소했다. 그러나 나는 그 강의를 참 열심히 들었다. 그 수업, 그 강의실에 네가 있었기에. 이 얘기들은 다 내가 너를 정경대학 402호에서 만나면서 시작된, 아주 사소한 내 감정의 동요를, 그리고 내 생활 속에 스며들어온 너를 기록한 이야기다.
그리고 찬열아,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생각해. 네가 내게 빛나 보이는 딱 그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