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의 여름은 목성
여름의 증명
w. 랑데부
"주인 없는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거 아니야"
"열쇠 니한테 있다 아이가"
"네가 안 왔잖아"
4.
소리없이 장마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뱉는 숨을 방해하던 더위가 꺾였다, 아주 먼 곳에서 난잡스런 고함이 뒤섞였다. 태양의 심술로 매일 하복을 빨아 널었는데, 처참히 젖어버렸다. 어느 날부터 셔츠는 두 장이 되고 양말은 네 켤레가 되어 있었다, 줄지 않던 아이스크림은 반이 조금 넘게 퍼먹은 흔적이 적나라했고 신발도 두 켤레가 엉켜 팽겨쳐져있었다.
"오늘은 등교 못 한다"
"왜?"
투둑투둑 부서져 내리는 비를 우산에 얹혀 놓고 조금 멀리서 담배를 물던 그 애가 담장 앞에서 그 담배를 떨구어 짓이겼다. 자전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꼬박 저 비탈길을 걸어 내려왔다보다, 그 애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오늘의 등교는 없는 일, 가끔 이렇게 등교길이 막히고 학교는 문을 닫는다.
"으른들 욕심 때문에"
"응?"
"가끔 저런다, 가끔"
그 애에게 손을 잡힌 채 옥탑까지 걸었다. 그새 잠시 멎은 비는 우산을 접으라 일렀고, 옥탑 마당에 둔 수박은 미적지근 해져 있었다. 농성이 조금 줄었다. 조금은 국회 앞으로 조금은 항구로 그리고 더 조금은 일사병으로. 중장비들이 쳐들어 오고 있었다
그 날 낮에는 그늘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러다 라디오의 전파는 어지럽게 파스락거리다 끊겨 버렸고 비는 다시 쏟아졌다. 그리고 마저 주변을 정리할 새도 없이 잔혹하게 쏟아지는 장마 밑에서 다시 그 애의 손을 잡고 뛰었다. 일기예보는 한 걸음 느렸고, 함께 문을 닫은 학교 운동장 나무 밑에 마주서 그곳이 떠나가라 웃었다. 물에 젖은 생쥐꼴이 서로에게 작지만 깊은 웃음거리로 작용했다.
일주일이 넘게 장마가 쏟아졌다. 칠흑같은 구름을 몰고 장마가 쏟아졌다. 뱃일을 접고 모두 일찍이 돌아간 턱에 마을은 굵은 빅방울만 빼곡했다. 비가 쏟아지면 수영장은 청소를 한다. 락스칠을 꾸역꾸역 이어가던 도운은 밀대를 트랙 가운데 집어 던지고 돌아왔다, 눅눅한 나무향이 고히 퍼진 교실은 마을보다 좀 더 어두웠다. ㅇㅇ가 오려면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했다. 다시 돌아가기에 수영장 락스칠엔 신물이난 상태였고, 혼자 집으로도 가기에 ㅇㅇ가 없었다. 보건소에 갔다 오는 날엔 줄곧 도운의 집에서 머무르는 게 일상이 되어 있었고, 언젠가 도운도 그게 편해져 버렸다.
"윤도운"
"아이스크림 사왔어"
척척히 젖은 손에 물기가 방울로 흘러 내려갔다. 수영장에 오지도 않았으면서 밖에서 수영을 하고 왔나보다. 그리고 도운은 축축한 봉지를 받아 꺼냈다.
"먹으면서 기다려라"
"우산 가져 올게"
어디에 버리고 온 건지, 도운은 말 없이 ㅇㅇ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되려 그녀에게 쥐어주고 캐비닛에서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더 말 없이 교실을 나갔다.
*
어디서 주워 왔는지 그 애는 카세트테잎을 두어개 꺼내 놓았다. 분명 누군가가 버리고 가 얼룩덜룩한 먼지가 비좁게 쌓여 있는 것이 꽤 오래 버려진 테잎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앤 책걸상을 조금씩 뒤로 밀기 시작했다. 뭐야, 도와줘? 고개를 끄덕이길래 그 애 옆에 붙어 함께 책상을 뒤로 밀어 밀곤 교실의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니 하고 싶은 거 여서 함 해봐"
"어?"
"이거 고쳐왔다, 내"
"될까 모르겠는데,"
테잎을 툭툭 털어 넣는 모양새가 여직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인지할 수 없었으나 곧 약간의 파열음이 일고 나즈막히 흘러나오는 테잎의 음악으로 그 애의 이야기를 이해했다. 이미 오래된 음악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것도 그것조차 오랜 일이 되어버린 곡이었다.
"이거 맞나"
"...야 나 기억도 못해"
"괘안타"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순 모두 거짓이었다. 당장 내일 이곳을 떠나버린다고 해도 나는 그 충격을 받고도 기억할 것일, 그 애는 아무 책상에나 걸터 앉았다. 그러나 다시 몸으로 옮겨 본 건 아주 옛날이 마지막이었다. 머리속에 항상 앨범 한 구석처럼 남겨두었으나 다신 추지 않았을 일, 옥탑 마루에서 바람결 위에 흘러보내듯이 말했던 일이었다. 어제 연습실의 불을 끄고 나온 마냥 심장은 쿵쿵 거렸다. 작별 아닌 작별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지는 별이 작별처럼 내는 빛이 교실에 잠시 점거한다, 손끝으로 선율이 잠시 올라선다. 이분 내지 아주 짧은 무용이었다, 그마저 모두 완벽한 동작의 마무리가 아니었으나 그 이분 내지의 움직임을 세 번이나 돌아 다시 보여냈다. 빈 교실 한 가운데 지워낼 수 없는 기억을 올리고 그곳에 소년이 걸터 앉는다. 풀벌레가 울고, 그 교실에서 나눈 가쁜 숨과 이뤄 형용할 수 없는 벅참이 옅게 섬에 스민다.
5.
신을 공평하다고 하는 사람들과 공평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 속 나는 반반이었다.
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대회는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을 남겨 두었고 나는 매번 그 애를 따라 운동장을 가로 질렀다. 날로 기록이 좋아져 한참 탄력이 붙어있었다, 훈련의 끄트머리엔 항상 나 역시 수영장으로 빠져 같이 반의 반을 가곤 했다. 그리고 바다에서도 몇 번 따라가 수영을 하곤 했다. 이 섬은 지독히 조용했고, 그나마의 할 일이라곤 따라 수영을 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파도가 칠 때, 너무 눈이 부시지 않은 날에.
발작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곳에 호흡기를 놓아 두었으나 가끔 심해지는 시기가 꼭 오곤 했다, 보건소에서 진료받을 일은 더이상 없었다. 후천적인 환경의 질환이었고 나에게는 환경의 결정권이 없었다. 그저 적어도 그 애가 알지 못하게 하는 것정도의 결정권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ㅇㅇ야"
"너 오늘 주번이야"
"어? 어 그래"
학급 인원은 적었으나 쓰레기통은 항상 가득이었다. 교과서를 제외한 종이가 구겨져 쌓여 청소시간에 플라스틱 통을 들고 소각장으로 향했다, 분리수거통 앞에 내려두고 한참 분류해 버리고 있던 차 살짝 눈이 메이는 연기에 외벽이 조금 갈라진 모퉁이를 도니 아니나다를까 그 애가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윤도운"
"어, 뭐고. 아 우선 가라"
그 애는 급히 담배를 손가락에서 추락시켜 밟아 껐다. 학교에서도 피는 구나, 딱 걸렸다고 손가락질을 하니 담배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내게 다가왔다. 니 말하지 마라, 내가 왜. 이거 버려줄게, 말도 안되는 딜을 하자 제안한다. 말 할 이유는 없었다 단순히 놀림감으로 짚었으나 딱 당황하는 것으로 보아 교내에서 처음 걸린 거 같았다. 이렇게 귀까지 빨개진 것을 보니.
"근데 니 괘안나"
"응"
"그럼 됐고"
돌아 잔기침을 하니 어깨를 붙잡는 것이 찔리기는 한 모양이었다.
*
"선풍기 고장났지, 돌아가는 거 맞아?"
"모른다. 나오는 거 아이가"
"때려도 돼?"
"뭘"
"이거"
기계는 때려야 말을 들어. 그 애가 땅을 치고 웃는다, 이거 진짠데.
"그게 공부 일등 먹는 가시나가 할 말이가"
"나 문과거든?"
"됐다. 밖이 더 시원하겠다, 인나라 데려다주께"
오늘은 달이 밝았다. 비탈길을 털래털래 내려 걷다 골목 구석 한 무더기 핀 토끼풀이 짠내 가득 실은 바람에 폴폴 날리다 다시 진정되길 반복했다. 이런 더위에 꽃을 피웠구나, 몽글몽글하게 몇 개의 꽃송이가 모여 있는 것이 달 주변으로 모인 구름에 잠시 가려진 별의 갯수와 비슷해 걸음을 잠시 묶었다.
"토끼풀 맞지"
"맞다"
"이거 진짜 토끼가 먹어?"
"니 함 먹어보든가"
"야 내가 왜,"
"니 따악 토깽이 닮았다 아이가, 함 먹어 봐라"
달밤에 헛소리 한다, 그렇게 그 애 다리를 탁 치니까 과하게 문지르며 옆에 주저 앉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도운아 너 손 줘봐"
"와"
"빨리"
이거 보면 만들어야 하는데, 반지. 아주 어렸을 적 엄마의 손으로 만들어주었던 꽃반지가 생각이 났다. 의심만 잔뜩 싣고 내민 그 애 손에 풀 하나 꺾어 손가락에 엮으려니 끼운 반지만 보아 제대로 엮어지진 않았다. 이렇게 묶으면 되는 거 아니었을까
"야 니 손 도봐"
"아 잠깐만"
"얼른 도"
십분을 묶고 있으니 답답한 지 그 앤 내 손을 가져가 새 풀을 꺾어 금방 꽃반지를 만들었다.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그럼 좀 알려주지. 타박 전에 기억보다 예쁜 반지를 한참 가로등에 비추어 보았다, 이렇게 생겼었구나.
"토깽이가 토끼풀로 만드려니까 안 되제"
"야"
"이쁘나"
"아, ..응. 근데 너 되게 잘 만든다"
"무슨, 아이다. 이제 인나라, 가자"
그 풀을 가지고 이십분은 그렇게 주저 앉아 있었나보다. 약지에 솔솔 묶인 꽃반지가 신기해 그 반지만 한참을 보며 걸으니 그 앤 내 옷자락을 잡고 함께 걸어갔다. 오래오래 걸어 내려왔으나 아쉬운 길이 아닐수 없었다, 집 앞에 다다를쯤 다시 한 번 반딧불이를 보러 가자 물으려 관두었다. 그냥, 물어볼 것을 그렇게 관두었다.
"그래 좋나"
"응"
"참네, 니 진짜 토깽인갑다"
"윤도운, 너 진짜"
"늦었다. 빨리 들어가라"
ㅇㅇ는 도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빠르게 계단을 올라 가버렸다, 창을 열었을 때 그 애의 뒷모습이 보이길 바라며. 이번에는 볼 수가 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그 애의 모습을. 그녀는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 깜박이는 가로등 밑을 지나 걷는 도운을 오랫동안 보았다.
그리고 찾아온 발작은 조금 버거웠다, 잠에 들기 직전 급하게 베개 주변으로 손을 더듬어 찾아 입에 물고 꽤 오랜 시간 눈만 감았다 뜨며 언제 진정이 되는 지도 모르고 그렇게 누워있었다. 막 잦아들어 잠으로 연결 틈새가 보일 쯤, 작은 돌멩이가 창문을 맞고 튕겨 나갔다. 무언가의 작은 소음으로 알았으나 한번 더 작은 돌멩이가 창을 때리고 추락할 때 그녀는 불을 켜 창을 열었다.
"잤나"
"..어? 아니..., 안 잤는데"
"그럼 잠깐 나온나"
도운이었다. 아까 간 줄 알았는데 잠깐만 내려오라는 이야기에 그녀는 의문도 모른 채 슬리퍼를 주워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
"왜?"
"..이거"
"응?"
그 애가 내민 건 다발이라고 하기엔 소박한 들꽃이었다. 이름도 하나 잘 모르는 들꽃 몇 송이, 체육복으로 툭툭 흙을 털고 받으란 재촉에 받아든 꽃은 유달리 밝은 달을 조용히 머금어 황홀하게 피어 있었다.
"...어, 고마워"
"그럼 자라. 내 진짜 간다"
"..어 도운아"
"와"
꽃을 받아든 손의 반댓손으로 ㅇㅇ는 도운의 체육복을 쥐었다. 아주 짧은 틈에 소년의 볼 위로 작은 입술이 닿았다 이내 떨어졌다.
"잘 가"
들꽃보다 해맑은 미소가 피었다, 건넬 꽃은 없었으나 그만큼의 맑은 미소를 주었다. 깜빡거리는 가로등 밑 자리 서 얼어붙었던 도운이 못내 그녀의 맑은 웃음에 함께 작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가시나 니 이거,"
"잘 가. 도운아"
잘자 도운아.
6.
"오늘 수영동아리 장소 교실이다, 니 여기 있어라"
"어? 어"
***
"엎드려라"
"예"
선생은 도운이 엎드려 자리를 잡자마자 옆구리를 걷어 찼다. 까끌한 타일 위로 쓰러진 도운을 선생은 무참히 걷어차고 다시 또 걷어찼다. 한참을 도운은 말 없이 발길질을 받아 냈다, 수영장 내부에선 살이 짓밟이고 채이는 소리만 웅웅 거렸다.
"안 일어나나"
분이 풀리지 않는 지 바로 엎드려 뻗친 도운에게 선생은 밀대를 끌고와 미친듯이 허벅지를 내려쳤다. 소년의 다리 하나가 부러져야 분이 풀릴 것만 같았다, 도운은 강해지는 매질 밑에서 더 이를 악 물었다. 악바리로 버티는 도운의 머리 위로 담배갑이 강타하고 물에 젖어 이리저리 쏟아져 내렸다.
"고아 새끼 데려다 키우는데 누가 돈 같은 거 달라켔나"
"니는, 그냥 메달만, 따, 오면 되는 거라고 내 말 안했나"
소년의 메달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메달은 교육의 불모지에서 이뤄낸 배경으로 재개발 대신 홍보 역할로 대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섬이 전국체전을 이용해 재개발 대신 대중의 시선을 되려 잡아와 막으려는 일이었다. 길에 가다 채이는 고아를 데려다 먹일 이유는 사람들에게 존재하지 않았으나 얻을 것이 확실하다면 먹이지 못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기록 헛도는게 그 가시나 때문이 아이고 이 때문이었나"
선생은 다시 한번 도운의 배를 걷어찼다. 버티던 도운은 타일 위를 뒹굴었다, 얼굴을 제외하고 드러나는 추악함을 곳곳으로 가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몸의 부근만 골라 밟고 다시끔 밟았다. 도운도 자신의 메달이 곧 그런 목적으로 사용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운은 더욱 어른이 싫었다.
"아를 거뒀으면, 그 값어치를 해야 마땅한 일 아이가"
결국 도운의 입에서 혈액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흩뿌려진 혈액은 물기에 유유히 번지고 도운은 이내 뒷머리를 거세게 잡혔다. 죽어도 메달을 따와야 하는 당상에 혈액처럼 그 애의 이름도 함께 터져 나오고야 말았을 때 이를 악 물던 도운은 고개를 떨궜다.
"을마 안 남았다, 도운아"
"알았나"
도운은 베어 나오는 혈액 대신 처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잡았던 머리채를 거세게 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선생은 물에 손을 씻었다. 그의 손에 묻은 피가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빠져 흘러내렸다. 붉은 액이 철벅철벅 스몄다, 이내 하수구로 빠져나가 그마저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흩어져 나갔다. 목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
대회를 한 달 앞두곤 교내 수영장 사용이 금지 되었다. 수영부 집중 훈련기로 동아리 시간 장소 배치 또한 교실로 바뀌고, ㅇㅇ는 도운을 보기 힘들어졌다. 오전 4교시 내리 자고 점심 또한 수영부원들과 일찍히 먹은 후 수영장에서 나오질 않았다. 아예 학생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들고 다니는 초시계는 먼지와 함께 가방에서 굴러 다녔다. 이주 내리 옥탑도 오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어볼 수도 없어, 결국 그녀는 방과후를 몰래 파하고 수영장 앞을 지켰다.
"...어, 저기"
"어"
"..도운이는?"
"대회 연습 때문에 더 늦게 나올기다, 마이 늦을텐데. 알려주까"
"ㅇ,어 아니. 고마워"
1군이었기에 더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는 수영장에 더 오랜 시간 몸을 담구어야 했다. 그러나 걱정 되는 것은 줄지 않았다, 훈련이 고되더라도 그녀의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등하교를 할 아이도 아니었고 이리 오래 옥탑을 비워둘 아이도 아니었다. 방과후가 끝나고 어쩔수 없이 하교 인파에 함께 돌아오는 길은 누가 그녀의 말에 무거운 돌덩이를 매어둔 마냥 무거워 발걸음을 질질 끌기만 했다.
"ㅇㅇ야"
유달리 더운 노을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옥탑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옮겨 묵묵히 쌓아둔 답답함이나 조금이나마 풀으려 부두로 향한 발걸음은 잘못된 그녀의 선택지였다. 이 섬에 달랑 짐 몇 개와 떨어뜨리고 도망치듯 떠난 아빠였다. 다시 떠나야 하는 그림자가 다가온다, 당장 몸을 비틀어 뛰었으나 그림자는 빠르게 다가오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주저 앉는 그녀를 굳이 달려와 잡을 필요는 없었다. 헉헉거리는 숨을 호흡기로 간신히 막고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야 그 그림자는 아니 그 사람은 다가와 손목을 움켜 쥐었다.
"가자"
"또 어딜, 안 가 이번엔"
"너 이럴 시간 없다, 빨리 집에서 간단히만 챙겨 나와"
"안 간다고. 내가 또 어딜 가!"
한 손에 벌벌 거리며 잡은 호흡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거세게 잡힌 손목은 빠져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재촉했다, 당장 짐을 챙기라고. 이런 식의 도망은 언제 끝이 나는지 ㅇㅇ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정확한 의사가 있었다, 가기 싫어. 그만가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이 도망에서 도망치고 또 도망을 쳐야 하는가. 작은 실랑이가 눈덩이처럼 커져 그림자는 그녀를 부두에 내리쳤다. 바닥에 뒹군 그녀의 무릎에 까끌한 피가 고였으나, 그녀는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야 이 년아 아빠 죽이려고 작정했냐? 당장 가자고, 짐 빨리 챙겨 나와!"
"안 가. 이제 더 못 가, 갈 힘도 없어. 안 간다고! 그 사람들이 와서 내 입 찢어 죽이는 한이 있어도 아빠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숨었는지! 말 안 할테니까 그만 이제 나 좀 놓고가. 제발!!"
걸음의 선택권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딸을 두고 억지로 집으로 향하는 발을 그녀는 어거지로 감싸 안았다.
"어차피 아빠 딸 얼마 못 살아! 그때 와서 장기라도 꺼내가, 나 안 가 안 간다고!! 부모가 되서 자식 죽는 자리 하나 양보 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치 아빠? 아빠 좀!!"
악을 쓰며 그녀는 매달렸다, 그는 그 절규에 흔들렸을까. 아니면 당장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값어치에 흔들렸을까, 연거푸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부두를 뿌옇게 흐트려 놓았다.
"당장 죽일,...하, 려고 작정했어?! 담배 좀, 흐으...."
"니 년 그 입에서 한 달 뒤에도 똑같은 말 나오면 그땐 학교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바로 데려갈 거야, 알았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입에 문 호흡기를 적당한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 그의 분풀이로 빼앗겨 콘크리트 바닥에 부서져 굴러 떨어졌다. 거칠게 그녀를 떼어 놓고 그는 망설임없이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내 배의 작은 엔진 소리와 함께 밀려가 버리곤, 그제서야 그녀는 바닥에 마음을 놓고 웅크렸다. 순간의 폭풍이 마구 헤집고 너무 유유히도 떠나버렸다.
"지금이라도 따라가라"
누군가 내민 손 보고 그 손을 잡아 일어섰을 때, 나온 말이 다시 한 번 폭풍을 일었다.
"...야"
"아부지 따라가라, 안 늦었다"
"....야 윤도운"
"따라가서 도망을 가던, 뭘 어찌하건 치료도 받고. 여서 빨리 나가라"
단호한 한 마디 한 마디 대신 얻고 싶은 것은 그냥 도운의 존재였다. 대꾸할 힘이 더 빠져버려 그녀는 절박하게 도리질 쳤으나 도운의 시선은 오늘따라 따가웠다. 가기 싫어, 그래도 가라.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으나 도운은 더 듣지 않고 먼저 돌아섰다. 그를 따라 잡고 싶었으나 시야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이내 빠르게 흐려졌다. 가고 싶지가 않았다, 도운이 있는 곳에서 더 가고 싶은 곳이라곤 없었다.
소년은 빠르게 멀어졌다, 오늘따라 희미한 시야에 소년의 모습이 절룩거렸다.
내가 빨았어, 잘했지
흰 빨래랑 색 있는 빨래하고 같이 돌리는 거 아니다
무지개 생겼잖아
잘했다
-여름의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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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이렇게 다시 왔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름의 증명 下편과 함께 다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