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시험이 끝난 후, 다음 주 월요일부터여주를 향한 시선은 굉장히 뜨거웠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 와중에도 여주를 향한 뜨거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옆에서 석민이 '오, 김여주~ 인기 봐~' 하면서 깐죽댔다가 여주에게 등짝을 찰지게 맞았다. 옆에서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 석민을 무시하고 여주는 2층 홈베이스로 향했다.
원래 음양 세계 올 때부터 모든 시선 집중은 제 것이었다만, 어느 정도는 불씨가 차츰 꺼지고 있었단 말이다. 근데 다시 제 손으로 지폈으니 여주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신수학 실기 시험.... 잘 봤었어야 했다. 하나의 고난, 하나의 깨달음이 이런 후폭풍을 가져다줄 거였으면 차라리 다른 고난을 맛보고 싶은 여주였다. 여주가 다시 이목집중을 받은 것은 소문이 퍼졌단 이야기다. 그 소문의 증거로 옆에 있는 순영이 증거였다.
".... 꺼낼 거야"
왜 그 누구도 여주, 자신에게 실기 시험에서 통과를 하지 못한다면 이 주 동안이나 신수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과제를 이야기해주지 않은 걸까. 거기다가 보고서까지 써야 한다니. 유력 1등 후보 김여주가 실기 시험을 말았다. 거기다가 일신과 싸우기까지. 소문은 주말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간 듯 보였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르고 다니는 걸까. .... 하긴 그렇게 모니터로 공개처형 당했으니 할 말이 없나. 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5교시를 위한 교과서를 꺼냈다. 문을 쾅 하고 닫으니 옆 사물함에 기대고 자신을 쳐다보는 순영이 보였다.
순영의 얼굴을 보니 더 절망적이었다. 이 주 동안 꼭 붙어서 다니면 없던 유대감도 아주 왕창 생겨날 것 같았다. 여주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도 여주의 얼굴로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순영은 '그러게. 시험을 잘 보지 그랬어'라고 얄궂게 웃으며 말하였다. 여주는 '지가 삐지지 않고 말만 해줬어도....!'라는 말을 꾹 참았다. 예원의 말대로 정말 그게 삐진 것이었다면 한 번 더 삐지게 만들었다간 해결할 자신이 없었다.
"야, 비켜. 너 때문에 얘 못 열고 있잖아"
".... 미안"
"괴, 괜찮습니다!"
언제부턴지 순영의 주위에서 쭈뼛대던 여학생이 여주가 일러준 덕에 사물함을 열었다. 여주는 순영을 흘깃 흘겨보고 순영은 머쓱해했다. 아, 나 도서관에서 책 빌렸었는데. 아, 반납일이 언제더라. 5교시 수업실에 가기 위해 몸을 틀었는데 갑자기 떠오른 책-시험기간에 참고용으로 빌렸다. 종현이 읽으면 좋다고 추천해준 책-에 다시 사물함으로 뒷걸음질 쳤다.
점심시간이 좀 남았으니 도서관에 갔다 올 시간은 충분하다고 여긴 여주는 다시 사물함을 열고 책을 꺼내들고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 도서관. 뭐 하러. 책 반납하러. 순영은 여주 옆에 붙어 같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었는데 시험이 끝나 아무도 없이 조용했.... 아니, 조용하지는 않았다. 분명 사람은 없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있든 말든 관심은 없지만 음양학당 도서관 특성상 자신이 반납 바코드를 찍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하는 아주 자립심을 키우는 교칙 덕에 이리저리 도서관을 쏘다녀야 했다. 아, 이거 어디서 가져왔더라.
여주가 헤매니 순영은 말없이 여주가 들고 있던 책을 가져갔다. 순영은 책 위를 두 번 톡톡 두드리니 책 위에 은은한 초록빛을 띄는 나침반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알려주는 듯 나침반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침반의 움직임에 따라 순영이 움직였고 나침반을 볼 줄 모르는 여주는 순영의 발걸음에 맞춰 따라 걸었다. 도서관을 이리저리 다닌 덕에 소리가 난 근원지를 찾아버렸다. 소리가 난 근원지에는 역사 부록 칸에 정한과 지수가 있었다.
둘은 여주와 다른 길로 방금 온 듯 숨을 헐떡 거리고 있었다. 지수가 도서부인지 알고 있는 여주는 도서관 관리를 위해 지수가 와있는 거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저 오빠는 왜 와 있는 거지. 여주는 정한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오빠들은 점심시간에도 붙어 있네. 저게 그 말로만 듣던 절친. 뭐, 그런 건가. 여주는 시선을 거두고 몸을 틀어 정한과 지수가 있는 반대쪽 책꽂이에 들어갔다. 둘은 아직 여주가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건 왜"
"존나 뻔뻔하다, 너. 네 새끼가 갑자기 뛰어가서 시간 안 재졌을까봐 그런다! 왜!"
도서관에서 아주 크게 떠들어 대는 두 명 덕분에 둘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듣고 있는 여주였다. 둘에겐 별 관심이 없는, 음, 그냥 자기 일 외에는 관심 없는 여주는 둘의 대화를 애써 무시하며 책의 원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난데없이 책꽂이 사이로 들어오는 파란빛에 눈이 부셔 여주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 뭐야. 갑작스레 눈에 빛이 들어온 거라 눈이 아파 눈을 잠시 감고 있는 여주였다. 아마, 그 빛의 주인은 책꽂이 뒤에서 대화하고 있는 저 둘이 분명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눈을 감은 덕에 대화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아, 2분.... 야, 내가 뛰면 바로 따라와야지. 이제 이 짓거리 삼 년 채우고 있으면 알아서 맞춰야 되는 거 아니야?"
"뭐?"
생긴 것도 그렇고 신수도 그렇고 꽃사슴 이미지가 강한 정한과 지수였던 터라 둘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과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는 여주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약간의 의문스러운 점은 엄청 친한 사람들끼리는 원래 저렇게 서로에게 욕을 하고 싫은 소리를 내뱉는 점이었다.
"시험도 끝났는데 네 새끼랑 10시 2분까지 같이 있으라니.... 존나 지옥이다"
"누구는 좋아서 이러고 있냐고. 나도 존나게 지옥이니까 조용히 해"
정한은 한탄조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책꽂이에 기대었고 지수는 정한의 말에 타박하며 책 정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걸 뒤에서 듣고 있는 여주는 정한과 지수의 대화가 마치 서로 싫어하는데 억지로 무언가에 얽혀 있어서 같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름 궁금점이 생겼지만 여주의 18년 동안 가지고 있던 태도가 어디 가겠냐고. 역시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며 순영과 조용히 도서관 밖을 나섰다.
-
여주와 순영은 5교시 수업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가니 안이 시끌벅적하였다. 여전히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여주는 인상을 쓴 채 빈자리를 골라 앉았다. 교실 풍경을 보아하니 어떤 한 주제에 대해서 열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영이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걸 보아하니 되게 중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남들이 재밌어한다고 구미가 당길 여주가 아니었다. 오늘도 맛있었던 점심에 부른 배를 잡고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배부른 채로 멍 때리기. 요새 여주가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여유롭고 나른한 느낌이 기분이 좋았다. 옆에 앉은 순영도 팔짱을 낀 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5월에 들어가려고 준비 중인지 창밖 나무에는 분홍 잎들이 다 떨어져 있고 초록색의 잎들이 파릇파릇하게 나와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여주와 순영은 조용히 있었다. 순영은 여주의 느끼고 있는 것들을 자신도 느꼈다. 여유로움. 나른함. 따뜻함.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신수와 주인이었다.
"여주님! 뭐 나가실 거예요?!"
"...."
그래, 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5분 이상 유지된다면 그건 음양학당이 아니었다. 여주는 들려오는 성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월요일이라서 별로 마주칠 일 없는 아이들이었는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니 고마워서 표정 관리가 되질 않는 여주였다. 점심시간에도 봤으면 됐지, 왜 온 걸까.
여주가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성연과 승관이 여주의 눈앞에 섰다. 그래서 돌리려던 목을 멈추고 그냥 그대로 앞을 바라보았다. 이것들 또, 한솔이 버리고 자기들끼리 왔구먼. 갑자기 사라진 너네 때문에 복도에서 방황하고 있을 한솔이 눈에 뻔해 여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일이길래 한솔이까지 버리고 자신한테 달려온 건가 싶어서 기어이 승관과 성연의 말을 들어주는 여주였다.
"뭐 나가 실지 결정하셨어요?"
"뭘 나가. 부승관 군. 너네가 나가준다면 고맙긴 할 거 같은...."
"아니, 체육대회요"
"체육대회?"
승관과 성연의 들뜬 목소리에 비해 여주의 얼굴은 석고상이 따로 없었다. 굳어있다는 얘기다. 체육대회. 체육대회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체육대회? 줄다리기를 한다던지.... 계주를 뛴다던지.... 단체 줄넘기를 한다던지.... 초등, 중학교 때의 체육대회를 떠올린 여주는 기분 나빠져 미간을 팍 찡그렸다. 항상 남는 자리에 들어가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학생들이 일부러 골탕먹이려고 이상한데 집어 넣었던 기억-2인 3각에 자신과 무서운 언니랑 사귀던 남자애를 집어넣어 무서운 언니가 한동안 괴롭혔었다.-이 났던 것이었다.
"시험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체육대회야? 나 같은 인간은 아예 그냥 죽으란 얘기잖아"
여주는 학생회인 승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사실, 그런 안 좋은 기억말고도 몸을 열심히 움직여 땀을 흘리고 반의 승리를 쟁취해나가는.... 그런 체육대회가 그냥 싫었다. 아마, 하기 싫은 이유가 안 좋은 기억보다 하루 종일 햇빛 밑에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이유가 더 클 것이다. 여주에게 오랜 시간 햇빛 밑에서 움직이는 경우는 시급을 최저시급보다 500원이나 더 높게 주는 인형탈 알바밖에 없었다.
여주가 그렇게 따지듯이 물어도 승관은 뭐라고 해줄 말이 없어 당황한 표정으로 입만 뻐끔뻐끔 거렸다. 그래, 아무리 학교의 모든 일을 담당하는 학생회라고 하지만 이런 행사까지 학생회 추진으로 맡길 수 없겠지. 또, 1학년이라 힘도 없을테고. 여주는 불같던 시선을 돌려 한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시험이 끝나서 이제 좀 쉴 수 있겠구나 했더니 체육대회 준비로 또 굴려질 거란 거잖아.
여주의 마음 속은 절망감으로 가득 찼다. 여주의 기분을 아주 잘 느끼고 있는 옆에서 순영은 조용히 쿡쿡대며 웃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여주는 마음 같아선 순영에게 헤드락이라도 걸어주고 싶지만 보는 눈이 있어 참고 순영을 한 번 째려보았다.
"근데 우리는 반이라는 개념이 없는데 어떻게 대회를 해. 개인전이야? 그렇다면 나는...."
"아, 팀은 속성별로 나눠요. 여주님은 아마 기숙사가 '화'라서 '화'로 가실 것 같은데요?"
승관의 대답에 다시 절망한 여주였다. 나름 개인전이라는 기대를 걸고 말했는데 팀이 정해져 있다고 하니 입속이 씁쓸했다. 개인전이면 바로 기권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생각하는 동물. 여주는 꼼수를 부리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다면 아홉 번의 체육대회 경험을 떠올려 가장 쉽고, 가장 힘이 덜 들고, 져도 욕 덜 먹는 종목 하나. 그것만 나가자. 이젠 말 안 해도 여주가 무슨 생각 할지 알 것 같은 승관은 여주에게 하나 알려주었다.
"다음 주에 체육대회 예선전이 있을 거예요. 거기서 탈락하시면 체육 대회 참가 자격이 없어서 안 나가셔도 돼요"
"너 그걸 왜 이제 말해? 괜히 머리 굴렸잖아"
승관을 타박하는 말투였지만 언제부터 감정 표현을 잘하게 된 건지 내심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말하는 여주였다. 그걸 보고선 또 순영은 쿡쿡하며 웃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여주의 모습에 성연은 눈치를 보며 말하였다.
"근데 체육대회 참여 안 하시면.... 좀.... 나중에 후회하실 수도..."
"뭐? 왜?"
"사실, 저희 학교 체육대회가 유명해서 한 방송사에서 생중계로 특별 방송하거든요"
성연의 말에 여주는 표정이 점차적으로 굳어졌다. 무슨 체육대회가 생중계로 특별 방송을 해....? 당황스러운 성연의 말에 여주는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음양학당의 연습실이나 이런 걸 보면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체육 대회를 특별 방송할 정도로 대단한 학교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여주였기에 더더욱 당황스러워 보였다. 아, 뭐... 생중계가 대단하긴 한데 그거랑 안 나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여주가 물어보니 이번에는 승관이 답했다.
"아무래도 퇴마사 양성 학교다 보니까 체육대회 종목도 그렇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게 입을 타다 보니까 방송사 쪽에서 먼저 연락을 했다더라고요. 그래서 몇 십 년 전부터 계속 방송을 해오고 있다고 하던데"
".... 종목도 퇴마에 초점을 맞춘다고?"
"네, 그렇다 보니까 대부분 보는 사람들이 퇴마사들이라 이 방송 하나로 퇴마사들한테 연락이 엄청 와요. 나라에서 뽑는 퇴마사가 될 거 아니면 대학 졸업하고 혼자서 사무실 차리는 것보다 기존에 있는 곳에 들어가서 크기를 키우는 게 더 쉽고, 빠르거든요"
"...."
"사실, 다음 날에 하는 대학당 체육대회가 시청률이 더 좋긴 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보고 연락하는 퇴마사들이 점점 늘어나서 다들 체육대회 나가려고 예선을 열심히 준비해요. 미래를 준비하는 거죠"
여주는 승관의 말을 듣다가 점점 멘붕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학교가 체육대회를 방송하냐고....! 그리고 종목이 뭐? 퇴마와 관련.... 그럼 체육대회가 아니라 퇴마 대회지. 왜 체육대회라고 하는 거야. 진짜 체육대회들 기분 나빠지게 말이야. 그리고 퇴마사들도 이상해. 잘하는 애들을 점찍어 놨다가 연락한다고? 이거, 어린애들 세상에 자본주의가 뿌리박히고 있잖아. 여주는 입 밖으로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여주의 멘붕 온 모습에 크게 기함을 터트리는 순영이었다. 너, 웃지 마! 심란하다고!
-
여주는 심란한 표정으로 특별 수업실로 향하고 있었다. 당연히 옆에 일신을 끼고서.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지만 그건 이미 해탈했고, 머릿속은 시선을 쓸 겨를도 없었다. 순영은 옆에서 약간 웃음을 섞인 질문을 하였다.
"체육대회 때문에 그렇게 심란해?"
"응"
순영의 질문에 빠르게 대답하는 여주에 의해 순영은 웃음을 '푸하하하'하며 터트렸다. 나름 심란한 상황인데 웃는 순영을 보고 여주는 점심시간에 하지 못했던 헤드락을 시전하였다. 웃겨? 사람이 심란한데 지금 너는 웃겨? 어? 처음 당해보는 헤드락에 순영이 당황하며 '야, 뭐 해...! 나, 일신인데....!'하며 여주의 헤드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여주가 풀어주니까 머리를 털며 하는 말이 '너는 일신 머리를 그렇게 막 대하냐!'라고 말하는 순영이었다. 여주는 그 모습에 피식하며 웃더니 조금은 진지해진 얼굴로 자신의 고민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솔직히 내가 퇴마사 양성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나는 아직 이 세계에 온 지 두 달 밖에 안 됐고, 무영 세계에 있을 때도 꿈이 있던 건 아니었단 말이야. 그냥 할머니 치료비 댈 정도로만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
"그런데 아직 두 달 밖에 온 지도 안 됐는데 벌써 장래희망이라던가, 꿈이라던가.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는 게 힘들어. 체육대회도 곧인데, 저기서 눈에 띄어야 하는지도.... 좀. 일단은 열심히 준비해봐야하는 게 맞는 건가?"
"...."
시험 때 싸운 이후로 편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게된 여주였다. 한 번이 어려웠지, 한 번 속에 있던 생각들을 털어놓으니 두 번 못 할 것도 없었다. 여주는 모르겠지만 착실히 유대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순영은 여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무영 세계에 있다가 이제 두 달 만에 벌써 진로를 생각해야 하니 힘들지. 순영은 여주의 고민에 정말 간단하게 답했다.
"그럼 퇴마사로 결정해"
"뭐?"
순영의 단순한 대답에 여주는 얼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순영은 '왜 그러냐'라는 듯한 표정으로 여주를 바라보았다. 여주는 자신의 진로를 너무 단순하게 정한 것 같아 약간은 기분이 나빠졌다. 순영은 그런 여주에게 손사래를 치며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하였다.
"꿈은 나중에 바뀌어도 되는 거잖아"
"...."
"그럴 거면 학교 목표에 맞게 퇴마사가 제일 낫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를 신수로 두고 있는 네가 제일 잘 하는 일이기도 할 거고"
"...."
"꿈이 없다면 보통 부모 직업 따라가는 게 정석인데 솔직히 재이처럼 군인은 네가 너무 무술이 젬병이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 몰래 와서 보기라도 했어?"
순영은 여주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누가 말했지 않았던가. 여주는 엄청나게 밀려드는 수치심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내가 그렇게 패대기 쳐지는 걸 몰래 봤었단 말이지? 순영은 지금 여주가 느끼는 감정과 더불어 아까 걸렸던 헤드락이 떠올라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찌됐든 내 말은, 체육대회를 열심히 준비해보라는 것이네. 항상 뭐든 열심히 하면 그게 독이 되는 경우는 잘 없으니,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쪽으로 눈도장을 찍는 일이라면"
언제나 그랬듯이 갑작스레 사극체로 바뀌는 순영의 말투였지만 여주는 폼 잡으며 말하는 순영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여주가 헤드락을 걸 기미가 없어지자 순영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헤드락 거는 걸 보니 무술부에서 잘 배웠다고 생각하는 순영이었다. 여주가 순영에게 관심이 없을 때, 순영은 여주에게 지극히 관심을 쓰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순영과 대화하다 또, 맞은 편에서 정한과 지수를 보게 된 여주였다. 요즘따라 왜 이렇게 이 오빠들을 자주 보는지. 여주는 못본 척하며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순영과 여주, 지수와 정한, 모두가 코너를 같은 곳에서 돌았다. 즉, 같이 걷고 있는 셈이었다. 같은 복도를 걷고 있으니 듣고 싶지 않은데 크게 말하는 덕에 이들의 대화가 또 여주의 귓속을 사로잡았다.
"뭔 개소리야. 우리 기숙사부터 먼저 인원 점검할 거야"
"야, 시험 기간에 너네 먼저 했으니까 우리부터지, 멍청이 새끼야. 기억력 존나 안 좋네. 원래, 화 속성 애들은 그렇게 멍청해?"
"야, 너 그거 위험한 발언이다? 그리고 멍청이 새끼는 너지. 내가 아니라. 시험 전날이랑 그 전날에 수속성 두 번 연속으로 갔으니까 다음 번 부터는 화 속성에 가자고 했어, 안 했어"
"애초에 네가 한 시간이나 내 옆에서 없어지는 바람에 시험기간도 아닌데 기숙사 점검까지 같이 하게 됐잖아. 원인은 너니까 수속성부터 가야 돼"
"그렇게 치면 네 새끼도...."
또, 싸운다. 볼 때마다 붙어 있더니, 붙어 있을 때마다 싸우는 느낌이 들었다. 여주가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갔음에도 둘은 전혀 여주를 상관 않고 징하게 싸워대고 있었다. 뭔가 둘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지겨운 느낌에 여주는 둘과 빨리 멀어지고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순영도 같은 마음인건지 저 대화 듣기 싫다며 소환 해제를 부탁했다.
그렇게 소환해제하기 싫다던 순영의 입에서 해제해달란 말이 나오다니.... 얼마나 여주와 자주 마주쳤고, 마주칠 때마다 싸웠는지 대충 예상이 가는 모습이었다. 순영을 소환해제하고 둘의 지겨운 싸움을 들으며 가고 있던 참에 뒤에서 승관이 여주를 붙잡았다. 뒤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인지 승관의 앞머리는 이리저리 휘날려 있었다. 그게 거슬려 여주가 손을 뻗어 승관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
정리해주다 승관의 표정을 본 여주는 '으엑'하며 얼굴을 구기며 만지던 걸 그만두고 발을 빠르게 옮겼다. 심쿵 당한 표정을 짓던 승관은 당황하며 왜, 해주다 말아요! 이러며 여주 곁으로 다가가 같이 갔다. 그런데 승관과도 길이 같은지 어쩌다 보니 같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정한과 지수가 여주와 승관보다 앞에 있었다.
"너 왜 이쪽으로 와?"
"아, 해태분들한테 학생회 일로 전할게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고는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얘기하던 승관이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주위를 보게 된 건지 정한과 지수를 보고 흠칫 놀라였다. .... 아, 흠칫 놀란 수준이 아니다. 그냥 깜놀. 아연실색하며 놀란 모습이었다. 떡 벌어진 입 위에 손을 갖다 대며 '헐?'이라는 소리를 내며 여주를 바라보았다.
마치, 여주가 왜 그러냐고 물어봐달라고 하하는 것 같았다. 귀찮았지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삐질 것 같았기에 여주는 장단을 맞춰주었다. 왜. 왜 그렇게 놀라는데. 승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발총 쏘듯이 다다다 내뱉었다.
"아니, 저 형들 왜 같이 다니는 거예요? .... 생각해보니 시험기간에 도서관에서도 붙어 있었네요! 아무리 제가 저 형들을 2년 만에 봤다지만 저렇게 자의적으로 붙어 다닌다고? 와, 말도 안 돼"
".... 숨 좀 쉬면서 말해, 부승관군"
"하하하, 너무 신기해서 그만...."
"근데 둘이 사이가 안 좋아?"
여주의 질문에 승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것도 엄청요. 정말요. 무지막지하게. 대박적으로 사이가 안 좋아요. 저 둘 중등학당 때부터, 아니 초등학당 때부터 유명했어요"
"뭔 소리야. 난 맨날 둘이 붙어 있는 것만 봤는데"
"네? .... 그럴 가 없는데. 초등학당, 중등학당 합쳐서 9년간 그렇게 싸워댔는데 여기 와서 붙어 다닌다니....?"
승관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여주를 쳐다보다 여주가 뭘 보냐고 해서 고개를 돌렸다. 승관이 고개를 돌리니 정한과 지수가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찰싹 붙어서 간다고? 둘이 언제 친해진.... 승관의 물음은 계속 꼬리를 물었지만 그걸 자르는 정한과 지수였다.
"우와, 그러는 네 새끼 수학 점수는 왜 그따위 시죠? 시험지에 여름 장마가 벌써 왔던데. 대단하다! 정말!"
"닥쳐! 너무 완벽하면 재수가 없으니까 일부러 그런거야!"
"네 새끼는 원래부터 재수 똥 튀겼었어! 자기 객관화 좀 해라"
"수학은 못 해도 별 지장 없지만 퇴마학교에서 요괴학을 D 받는 새끼는 세상에 네 새끼밖에 없을거다!"
"네 새끼, 그 말 전 세계에 있는 요괴학 점수 D받은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거든? 사과해! 빨리 대국민... 아니 전세계인 사과영상 인터넷에 올려 빨리!"
여주와 승관은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들었고, 둘은 아무 대화도 없었다. 네 새끼, 저 새끼 거리며 입은 험한데 내용은 또 유치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승관은 변한 게 하나도 없다며 측은한 눈길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주는 둘의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에 꽤 놀라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어림잡아 느꼈던 게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씨발"
"야, 네 새끼는 요새 왜 나만 보면 욕질이야? "
저렇게까지 원수를 만들 일이 있나 싶은 여주는 둘의 관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한과 지수의 반대로 길을 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훈을 마주쳤다. 지훈은 여주를 보자마자 이제는 아예 대놓고 욕질을 해댔다. 그리고 계속 듣고 있던 정한과 지수 말투에 전염 되었는지 지훈을 아예 '네 새끼'라고 칭한 여주였다.
여주는 아까 했던 생각을 고쳐먹었다. 정한과 지수가 왜 원수를 만들었는지 이해가 간다. 여주는 지훈을 보며 이빨을 뿌득 갈았다.
저, 난쟁이 새끼. 언젠간 내가 저 버르장머리를 고쳐준다.
[♥]
♥ 에밀 롕 3536 젠부 딸기빵 0846 마릴린 요플레 서랑감자 딩동 랭 체리콘 뿌랑둥이 리아 밍 도달도달 뱃살공주 0916 래번클로 몬 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