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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슙민] BROKEN HEART





by. 푸른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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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비가 오네."


분홍 빛, 하얀 빛으로 물들어 있는 창문 밖의 세상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1년 전, 그 날이 생각이 난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윤기는 외롭지만 전 보다 견고해진 마음가짐으로 거친 세상을 살아 나가고 있었다. 그때도 비가 왔엇지. 빗길에 미끄러진 뒷 차가 윤기의 부모님의 차를 박아버렸고, 굉음과 함께 찌그러진 차와, 그만큼 찌그러진 윤기의 마음.


태어난 날 이후로는 제대로 울어본 적이 없었던 윤기는 펑펑 눈물을 흘렸었다. 가까운 친척, 지인도 제대로 모른 채 홀로 화장식을 치른 그 날. 오늘도 그 날과 비슷했다. 바깥 내음은 젖은 꽃의 향기로 가득했고, 축축 늘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윤기의 귓 속을 매우 거슬리게 만들었다. 




비가 내리는 봄 날이면, 윤기는 그렇게 비에 젖어 떨어지는 꽃잎과 같이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일은 가야지."





대충 회색의 무지 맨투맨, 그리고 아래는 트레이닝 바지를 걸친 윤기는 이내 꼬르륵 거리는 배를 부여 잡았다. 하지만 아무런 도움 없이, 홀로 생게를 유지해 나가고 있던 윤기는 밥을 제대로 챙겨 먹을 겨를도 없었다. 윤기의 냉장고 안에는 생수와 소주. 딱 그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편의점에 일을 가면 폐기 처분이 된 음식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윤기가 편의점을 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윤기는 집 밖의 세상과 연결이 되는 문을 열었고, 오늘따라 거부감이 드는 환한 빛을 피해 커다란 검은 우산을 펼쳤다.








---



"안녕하세요."




딸랑, 하는 소리와 함꼐 편의점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어서 낯선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남자? 여자? 아마 남자가 맞을 것이다. 티존과 턱선이 잘 살아 있는 것을 보아 하니. 얼굴이 꽤나 곱상하게 생긴 그는 윤기의 집 근처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윤기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무심하게 턱을 괴고 보안용 거울로 방금 들어온 귀찮은 손님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학교 근처의 편의점이라지만 윤기의 옥탑방과 더욱 가까운 위치에 있어 외진 길 탓인지 학생들은 잘 오지 않았다. 가끔 근처 집에 사는 주민들이 오곤 하는데, 그 마저도 손님이 많지 않았다. 윤기의 러닝 타임 동안은 하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시간인지라, 들어오는 손님들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교복을 입은 학생은 윤기에게는 특이한 손님이었다. 

모든 손님은 귀찮은 손님, 윤기의 좌우명이었지만 이번 손님은 알게 모르게 눈길이 갔다. 이름은 뭘까, 요즘 학생들 답지 않게 많이 단정하네, 나도 그 일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수능 공부를 하고 있겠지, 끊임 없이 생각이 오가다 결국에는 우울해졌다. 그렇게 멍을 때리며 우울에 잠겨 있던 잠시,




"저기... 계산해주세요!"




당돌하게도 말을 걸어 온다, 그 학생. 멍을 때리던 윤기가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손님을 바라보다 제 앞에 놓인 구매 물품을 보고는 아, 하는 단말마와 함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바코드를 찍어 가기 시작했다. 얼핏 보인 명찰에는 '박지민'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름이 박지민이구나. 무언가 끌리기 시작했다. 
제 이름 석자 민윤기와 무언가 매치가 되는 느낌이랄까. 살아 생전 처음으로 그런 오묘한 느낌을 받은 윤기는 말을 걸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잡아야 한다, 잡아야 해.




"이름이 박지민이네요?"

"네?? 아, 네!!"



"저기 앞에 학교 다니시나 봐요."

"네, 이제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인데요!"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당돌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어리버리한 그 말투.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 오오라는 오히려 윤기의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만들었다. 바코드를 다 찍고 고개를 들자, 지민의 얼굴이 윤기의 눈동자 안에 담겼다. 담길 것 같으면서도 익숙치 않게 도망가는 듯한, 그런 얼굴. 저와 같이 하얀 편인 얼굴에 날렵한 선. 요즘 자라나는 학생들 치고는 매우 마른 몸이었다. 윤기도 마른 편이었지만 지민 역시 마른 체구였다. 단, 다른 점이 있다면 선이 곱게 근육이 잡힌 느낌이었다. 

어른들이 좋아라 할 만한 호감상의 그런 얼굴이었다. 흔한 얼굴은 아니지만, 사랑을 듬뿍 받고 예쁘게 자라난 고귀해 보이는 얼굴. 잠깐의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이어 입을 여는 그는 거리감을 부숴버리고 말았다.





"저는 저 위에 살아요. 혼자 자취를 해서 부모님 등골 브레이킹은 하지 않으려고 싼 집에 살다 보니 다리가 탄탄해진 것 같긴 해요! 이제 학교가 당분간 일찍 끝날 거라 앞으로는 이 시간 마다 여기 올 것 같은데, 자주 보겠네요!"



"아, 그렇구나. 집에 조심히 들어가요. 아 참, 이왕 말 튼 김에 내 이름은 민윤기."

"저는 지민, 박지민입니다아. 18살!!"


"한 살 차인데, 말은 편히 해. 집에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보자, 지민아."

"네, 아니. 응! 내일 봐!"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편의점의 문이 닫히고 지민은 나가버렸다. 투명한 문 밖으로 보이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 까지 바라보던 윤기는 벽에 달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조그만한 놈이 부모님 생각도 하고. 나이에 비해 의젓해 보였다. 제가 이렇게도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던가, 윤기는 살포시 미소를 짓고는 혼자라 외로웠던 판에, 아는 얼굴 한 명이라도 생기니 마음 한 켠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알바 시간에 심심한 일은 없을 것 같네. 

자잘한 생각에 잠겨 있던 윤기는 6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보고는 다음 파트 사람을 위해 인수인계를 급히 마쳤다. 몇분 후, 다음 파트의 알바생이 들어오자 윤기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밖을 나섰다. 저녁 시간대가 되니 비는 어느 새 그쳐 있었다. 제 검은 우산의 끝을 길바닥에 톡, 톡, 건들며 걸어가던 윤기는 집으로 올라가던 중, 골목 한 구석에서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짐에 고개를 골목을 향해 돌렸다. 

보통은 아무런 관심 없이 지나가는 윤기지만, 이번엔 꼭 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현듯 스치는 요상한 기분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그곳으로 향했다. 서너명의 남학생 무리 사이에 둘러 싸인 체구가 작은 몸. 





"너 돈 많잖아. 돈 많으니까 우리 돈 좀 꿔줘라."


"너 돈 많다고 학교에 소문이 장난이 아닌데, 자꾸 구라 칠래?"



"아니.. 선배... 저는 진짜 돈 없어요.. 진짠데.. 믿어주세요...."


"박지민 주제에 말이 많아? 맞고 줄래, 그냥 줄래?"






박지민이었다. 

박지민 보다 선배로 추정되는 무리들 사이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당하고 있었다. 
윤기는 욕짓거리를 내뱉고는 한 학생의 목덜미를 잡아 돌렸다. 마른 체구의 윤기였지만 운동을 잠깐 배웠던 날이 있어 그런지, 강한 악력에 못 이긴 학생은 멀리 나가 떨어졌다. 다른 학생들의 관심이 윤기로 향했고, 지민은 얼른 가라며 윤기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런 지민의 얼굴을 보니 다시 화가 차오른 윤기는 나머지 두 학생의 정강이를 걷어 차 무릎을 꿇린 후, 머리채를 잡아 쥐고는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처음 윤기에게 나가 떨어진 그 학생은 도망을 갔는 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나머지 두 학생도 세게 나오는 윤기의 손아귀에서 벌벌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맷집이 없는 것을 보니그냥 센 척을 하며 돈을 뜯고 다니는, 양아치 행세를 하는 학생들인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선택권을 줄게. 맞고 떨어질래, 그냥 떨어질래?"



"죄송합니다... 그냥 갈게요.."



"꺼져. 앞으로 또 박지민 앞에 나타났다간, 그땐 진짜 아작나는 줄 알아라."







윤기가 학생들을 놓아주자, 서로 먼저 빠져나가겠다는 듯, 얽히고 설키며 줄행랑을 치는 두 학생이었다. 
윤기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자신을 벙찐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 지민에게 다가갔다. 저에게 가까이 다가온 윤기를 올려다 보는 지민. 윤기는 그런 지민을 내려다 보며 괜찮냐며 물었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응, 고마워 형. 하고 내뱉는 그 얼굴이 윤기의 눈동자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가득, 전부 차고 나면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그 눈동자에 그 얼굴을 담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 없이 제 얼굴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윤기의 시선에 지민이 살짝 고개를 숙여 내렸다. 
순간이었다. 윤기의 손이 지민의 얼굴을 향한 것은. 지민의 볼에 제 손을 살짝 얹은 후 들어올려 제 얼굴을 보게 만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기를 올려다 보는 지민은 점점 가까워지는 윤기의 몸을 느꼈다. 

지민이 살짝 몸을 내빼자 윤기는 먹잇감을 찾아낸 호랑이처럼, 지민의 가는 허리를 팔로 감싸 저를 향해 깊게 당겼다. 지민은 어느새 윤기의 품에 가득 차, 한 봉우리의 꽃을 피워내었다. 그 꽃내음은 윤기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놀랐는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지민의 얼굴만을 제 눈에 담는 것은 너무나도 박지민이라는 존재 자체에 예의기 아닌 행위였다. 윤기는 그렇게, 지민을. 박지민이라는 존재를 제 눈동자 속이 아닌, 오롯이 윤기 자신에게 스며들기를.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먼저 그 매력적인 머리카락을 윤기의 커다란 손으로 잔뜩 쓸고 헤집어내며, 가까이 다가가 스치는 꽃 봉오리 같은 콧망울. 그리고 겹쳐지는 그 말캉한 입술.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그 안에서는 더욱 뜨겁게 요동치는 그 순간. 하늘에서는 보슬보슬 내려오는 빗방울이 꽃잎을 적셔내며, 그 향을 더욱이 진하게 만들고 있었다.






박지민이란 존재가 민윤기에게 스며드는 그 순간. 민윤기가 박지민이란 존재에게 스며드는 그 순간. 저 혼자 담아낼 수 없다면 그 청량한 마음을 깨어서라도 담을 것이다. 아니, 이미 윤기는 너무 달아올라 터지고 깨져 버렸다. 그의 심장은 오로지 박지민에게만 향해 있다.




애틋한 인연은 부숴진 심장과도 같은 것. 지금 이 순간부터의 민윤기의 좌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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