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사 랑 이 돌 아 왔 다 W. 문달 *4- 마음이 시끄러워 사람 관계 면에서의 욕구가 그리 강한 편은 아니다- 라고 나는 평소 내 자신이 그렇게 생각되는데 아주 냉철하게 멀리 두고 보면 인정받고 싶다라든지, 이 친구가 나를 더 소중하다고 여겼으면 좋겠다라든지 하는 게 약간 많이 있긴 한 것 같다. 정말 우연찮게 발견한 장면이었다. 막학기 즐겁게 보내자고 친구랑 둘이서 생활 스포츠 강의를 듣기로 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체육관을 향해 가는데, 한 가운데에 모여 앉아 청춘 영화 한 장면 찍는 이들이 있더라. 침착하고 단정한 채도 낮은 계절 옷들을 저마다 입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떠들며 노는데 그 가운데 낯설지 않은 얼굴이 껴 있었다. 재민 선배였다. 선배임을 확인하자마자 갑자기 목구멍이 콱 막혀왔다. "야- 너 양갈래만 하고 다녀라. 존나 귀엽다." 친해보이는 여성 분의 머리를 양 손에 잡고 방긋 웃으며 그런 말을 하는데 안 봐도 내 표정이 종이처럼 구겨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종이였으면 좀 좋아. 정말 구겨지기라도 하지, 접히기라도 하지. 나에겐 그 장면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와서 운동장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얼빠진 채로 다녔다. 귀엽다는 말이 얼마나 흔하고 아무 상황에서나 붙이기 좋은 말인지 안다. 그런 거에 사족 못 쓰는 사람인데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귀여워 할 것들이 무궁무진 한 거 역시 이해한다. 연연하면 안돼- 머리는 그렇게 시키는데 기분이 한없이 안 좋아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낮은 텐션은 그 다음 날 전필 시간까지 이어졌다. 전엔 선배 생각만 해도 설레고 괜히 미소짓게 되고 그랬는데 지금은 어제의 운동장 그 장면만 오버랩 됐다. 졸작 수업은 자유로운 분위기라 마음대로 자기 할 작업물만 열심히 하다가 중간에 교수님 컨펌 받고 상담 받으러 가고 하면 된다. 노트북 충전기를 꽂을 수 있는 콘센트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한글 파일 문서를 여는데 선배가 다가와 앞에 앉았다. "여기 충전할 수 있는 거 있지?" "네." "여기 앉아야겠다." "네." "되게 못미더운 눈친데?" "아니에요!"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 있는데?" "아아 진짜아..." "알겠어, 알겠어." 옆으로 살짝 빗겼어도 마주본 자세라 안 그려러고 노력해도 눈이 간다. 선배 얼굴이 화면에서 나오는 푸른 빛을 받아 환했다. "...선배님." "응." "...아니에요." 선배는 중간 중간 대놓고 턱을 괸 채 나를 쳐다봤다. 열심히 모르는 척 해봤지만 희미하게 보였다. 고갤 들어 마주치니 더욱 부담스러웠다. 계속 저러고 나만 보고 있었어. 신경 쓰지 말자고 최면 걸며 자판 위를 살살 두들겼다. 여기서 남주가 뭐라고 말해야 재밌을까 고민 중이었다. 장면을 상상하며 글을 쓰는 편인데 남자 주인공 얼굴이 별안간 선배로 바뀌었다. 웃긴게, 선배를 대입해서 상상하니까 갑자기 술술 써지는 거 있지. 하다못해 나중 가서는 내가 치는 주인공의 대사에 선배 목소리가 입혀지기까지 했다. "뭐 보는데 웃고 있어?" "네?" 선배가 손가락으로 반원을 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웃고 있었다고. 몰랐는데 듣고보니 광대가 솟아있다. "흐믓한 미소 짓던데. 뭐 좋은 거라도 봐?" "아니에요, 그런 거!" 선배가 내 노트북을 젖히길래 황급히 붙잡았다. 그러자 선배가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앗, 내가 깜빡했다. 새현이 화나면 엄청 무서운데 나 이제 큰일났네." "하, 하하아..." 당신이 뮤즈가 되어 제 시나리오를 인도하는 중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은사님인데 화를 낼 수는 없지, 하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선을 다시 화면으로 돌렸다. "선배, 다 하셨어요?" "응?" "그, 하고 계시는 거." "아니. 왜?" "저 자꾸 보시길래 다 하셨나 싶어서요." "아하~ 뭔데 자꾸 쳐다보냐, 네 할 일이나 하지." "악. 그런 거 아니에요오!" "이거 후배님 무서워서 감히 있는 쪽으로 고개 돌리지도 못하겠네." "으아 선밴니이임..." 절로 머리에 손이 갔다. 쥐어뜯으며 악 쓰고 싶다. 맨날 당해. 알면서 당해.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몰라서 혼자 실성한 듯 웃다가 아니라고 울부짖다가 낯 뜨거워서 얼굴 감싸쥐다가 난리를 쳤다. 선배는 그저 재밌어했다. 그 이상으로는 선배도 아무 말 하지 않아서 손부채질을 하며 진정시켰다. 그때 희진 선배가 다가와 나에게 뭐 하나 좀 봐달라고 부탁하셨다. 내가 앉아있는 의자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종이 한 장을 내미시는데 재민 선배가 말 한 마디를 날렸다. "선배는 바닥에 앉아있는데 내려다보네?" "아아...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아이쿠, 나 방금 꼰대 같았다. 죄송합니다, 선배 주제에 하늘같은 후배님께 내려다본다 어쩐다 했네요." "아니에요. 제가 내려갈게요. 선배님 여기 앉으세요." 재민 선배 말에 주르륵 미끄러지듯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어앉았다. 웃음이 터진 희진 선배가 몰이에 가담해서는 그래. 하며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봤다. 이제 만족하냐는 눈빛으로 재민 선배를 노려보다가 금방 눈에 힘을 풀었다. 희진 선배는 전공을 살리지 않고 다른 길을 알아본다고 말이 된 상태라서 졸작에서는 빠졌고, 기본적인 포트폴리오만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둘이서 계속 날 몰고 즐거워하다가 희진 선배가 할 일이 있다고 자리를 떴다. 그 사이에서 기가 쭉 빨려버린 가엾은 권새현은 지친 표정으로 내려놓은 한글 창을 다시 띄웠다. "다시 우리 둘만 남았네." 조금은 동 떨어진 자리긴 했다. 나는 그저 콘센트를 찾아 왔을 뿐인데 다들 한 구석에 몰려있고, 나랑 선배만 구석에 꽁 박혀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우리 주변만 살짝 더 조용했다. 의미심장한 선배 말에 헤헤, 웃음 소리만 냈다. 선배는 그 뒤로 다시 말없이 있었다. 나도 다시 시나리오 작업에 집중했다. 3시간짜리 연강 수업인데 저녁 시간 때와 걸쳐져 있어서 배가 고팠다. 뭐라도 때우고 오자 싶어서 일어나 편의점으로 향했다. "곰돌아~ 어디 가." 통장에 남아있는 잔고를 확인하고서 사천원 안으로 어떻게 알찬 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선배였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선배가 내 옆에 발맞춰 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였다. "곰돌이요?" "네 손에 너 닮은 곰돌이." "아아. 곰방와요." "그래. 곰방와. 진짜 귀엽게 논다. 너 저번에 미니언은 어디갔어?" 동전 지갑을 바꾼 이유가 있다. 원래는 혈육이 홍콩 여행 갔다가 선물이라고 던져준 미니언 동전지갑을 때가 타 거뭇해질 때까지 들고 다녔다. 그런데 선배가 지갑을 한번 보더니 새현아 이거 얼굴에 문대면 여드름 날 거 같애ㅡ 라고 놀려대서 빨 거예요. 하다가 귀찮아서 버리고 새로 산 게 바로 곰방와라 지어준 지금의 지갑이었다. "걔, 어차피 갈아치우려고 했어서!" "그렇구나. 지금은 인사해도 나중에 우연히 만나서 내가 인사했는데 모르는 척 하는거 아니야? 친구가 누구냐 물어보면 아~ 옛날엔 선배였는데~ 갈아치운 지 좀 됐는데 자꾸 아는 척 하네~ 이러고," "아아아! 아니거든요 선ㅂ, 와아, 아니에요 저 그런 애 아니, 흐아아!" "알겠어,알겠어. 울겠다. 그만할게." "...네." "지금. 째려보는 거야?" "슨배늠....그믄 하신다면스요..." "미안해. 진짜 그만할게." 선배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앞에 있는 나보다 먼저 손을 뻗어서 편의점 문을 밀었다. 동작 연결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는데 알 바 아니지, 하고 편하게 손 안대고 들어갔다. "선배 뭐 드시게요?" "글쎄. 고민 중. 넌 뭐 먹을건데?" "모르겠어요. 우와 새로 나왔나보다." "우와 새로 나왔어? 그거 먹게?" "아니요." 결정 느림보라 고민만 하다가 벌써 다 고르고 계산 줄에 서있는 선배에 조급함을 느꼈다. 각자 오다가 만난 거라지만 왠지 선배랑 같이 사서 가야할 것 같아서 샌드위치 하나, 요구르트 5개 들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런 식으로 깜찍하게 먹는단 말이지." 요구르트 포장을 뜯지 않은 채로 빨대만 옮겨가며 쭙쭙 뽑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 나와 선배 말고는 없는 휴게실이라지만 부끄러워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 참. 너 생활 스포츠 듣는다며." "네!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그때 운동장에서 날 봤나 싶어서 입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나는 새현이에 대한 거라면 뭐든 알지~" "와하하...근데 왜요?" "오늘 키 크고 좀 까무잡잡하고, 눈 크고 동그란 애랑 같이 추지 않았어?" "어어~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약간 소름." "걔 내 친구야." "진짜요? 아하... 친구분이 제가 영화과인건 어떻게 아셨대요?" "너랑 같이 있는 애 과잠 보고." "아하 주희 과잠..." "음악 틀어졌는데 너가 멀리 있어서 오라고 부르니까 강아지처럼 헐레벌떡 뛰어왔다며." "허..헐레벌떡..." 생활 스포츠 강의에서 각종 운동들을 배우는데 내가 듣는 건 스포츠 댄스였다. 수강생들 중 남학생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남자 한 명에 여자 둘 씩이 짝이 지어졌다. 파트너 당 두 번씩 하고 교체하는 식으로 했는데 음악과 같이 동작을 맞추면서 교수님이 즉흥적으로 파트너 바꾸기를 시켰다. 교체 후 멀찍이 떨어져서 혼자 연습하다가 그 말에 후다닥 달려갔는데 그게 헐레벌떡 뛰어오는 강아지 같았다니. 쪽팔림이 밀려왔다. "귀여웠대." "...감사합니다..." "아무데서나 흘리고 다니면 어떡하냐?" "네?" "귀염둥인 거 벌써 내 친구도 알게 됐잖아. 너 큰일났다. 어떡해." 그러게요 선배님 큰일 났네요. 예뻐해주시는 선배가 좋은데 안 좋게 남은 기억 하나 때문에 편하지 못하네요. 실없이 웃고 말았다. 오래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서 빨리 먹어치우고 살금살금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서 어디 갔다오냐?" "배고파서 밥 먹고 왔는데?" "헐~ 그 말 들으니까 배고프다." 자리에 막 앉았는데 희진 선배가 어슬렁 걸어왔다. 재민 선배 어깨에 팔을 걸치고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신경 쓰였지만 손은 바쁘게 움직이며 시선을 모니터로 돌리려고 애썼다. "나랑 저녁 먹기로 했으면서 치사하게 먼저 뭐 먹냐." "에이 너랑 이따 밥 먹을 배도 있지." "진짜? 완전 돼지네, 돼지. 새현아, 얘 뭐 먹었어?" "열심히 글 쓰는 애한테 이상한 거 물어보지 마. 그냥 빵 먹었어." "음, 그러면 이따 나랑 밥 먹을 수 있겠다." 선배. 다 좋은데, 잘해주셔서 감사한데요, "주앙이네서 같이 살았다며." "어. 걔가 들어와 살아도 된다고 해서." "윤주앙 걔는 뭐하고 산대? 학교 다시 안 돌아온대?" "주앙이는 여기 아예 오고 싶지도 않대. 주앙이 꿈 그거잖아, 자기 카페 차리는 거." "아아 진짜? 하긴." 제가 선배를 이성으로 보고 있어서요. 달갑지가 않네요. 이런 저런 상황들이요. 좋아하는 게 죄가 되지는 않았으면 했는데 연약한 마음이 자책을 하네요. 괜히 좋아하는 거 아닐까, 하고. 오늘 제가 조금 많이 여리네요. 그러려니 해주세요.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어련하겠지 하고 이해해주세요. - 명절만....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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