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성시경 - 태양계
04. 그의 이야기 L
나는 여태 사랑 앞에 가장 나약한 사람이 내 자신일 거란 믿음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해본 적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다니면서까지, 내 청춘을 다 바쳐 사랑한 송이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이후, 나는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꺼내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은 내가 이럴수록 송이가 슬퍼할 거라며 이제 송이에게 그만 미안해하고 다른 여자 좀 만나보라 하지만, 다 나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였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송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을 거라 여긴 건 당연히 아니었다. 다만, 그런 일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내 삶을 밝히는 향기로운 한 송이 꽃이 되어준 그 아이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새 사랑을 시작하기에 나는 너무나도 어리고, 나약했다. 나는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었다. 길었던 만큼이나 깊었던 그 사랑을 떠나보낸 뒤, 나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고장 난 기계에 불과했다. 누군가 사랑을 준다며 다가와도, 겁에 질린 사람마냥 도망치기 급급했으니까.
끔찍했던 그 일이 있은 지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고장 나 있고, 이제는 나에게 사랑을 주겠다는 사람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이대로라면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내가 평생 사랑 없이 살게 될 거란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딱히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건, 사랑 때문에 아파할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겪어야 할 위험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우선 문득문득 떠오를 송이에 대한 기억이 나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고, 그것이 상대방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사랑에 비관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누구보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화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주제가 등장하면 나는 나를 줄곧 ‘사랑지상주의자’라 소개하곤 했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도 믿기 때문이라고 하는 건 조금 과한 해석이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해석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사랑이 놀랄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고 많은 것 중에 그깟 사랑 하나 없어졌을 뿐인데 완벽했던 내 일상이 이렇게까지 무너졌을 리 없으니까.
누구보다 사랑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을 동경하는 내 앞에 흥미로운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내가 출연하기로 한 프로그램의 막내 피디로 추정되는 그 여자는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는 사랑을 믿지 않는단다. 사랑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웃기는 소리였다. 나도 사랑과 애증 관계에 있는 사람이지만, 사랑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사랑은 있다. 그 사랑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가느냐, 또 어느 정도로 그 사람의 삶을 흔들어놓느냐의 차이이지, 누구에게는 사랑이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그런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당신의 삶이 참 불쌍하다고.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터무니없는 그 주장에 어떻게 반박할지 생각하고 있는 와중,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며 사랑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유 모를 쓸쓸함이 비쳤다. 나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다며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차분히 뱉어내는 그녀에게 쓸쓸함 따위 보였을 리 없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에 반하는 쓸쓸함 따위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틀림없었을 것이므로.
미친 소리로 들릴 것을 잘 알지만, 궁금해졌다. 그 여자가 사랑을 그렇게까지 싫어하게 된 이유가. 그 답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오래 보아야만 했다. 오늘 하루 보고 말 인연이 되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파일럿 프로그램을 반드시 정규 편성시켜 그 여자를 점차 알아가려는 나의 의지를 꺾어버린 건 계획에도 없던 진상 부장이었다. 당사자인 나조차 전혀 기분 나빠하고 있지 않은데 제 심기가 대체 왜 불편해진 것인지, 미팅 중간에 생긴 쉬는 시간에 나를 불러 그 여자를 이번 프로그램에서 빼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기라도 한 것인지, 괜찮다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그녀를 팀에서 방출하겠다며 언성을 높이는데, 그 순간 내 안에 내재 되어 있던 정의감이 불타올랐는지 그 부장이라는 사람에게 조금 강하게 말했던 것 같다. 그 피디를 프로그램에서 제명하는 날 나도 함께 하차하겠다고. 그 사람이 없으면 나도 이 프로그램 출연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남이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던 내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 중이다. 단지 그 부장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일개 부하 피디를 다른 부서로 강등시키려는 모습에 화가 났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곁에 오래 두고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일까.
결국 녹화가 끝난 이후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그녀와 끼니를 함께 할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사실 미팅 날 그녀가 정말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가 너무 궁금해 그나마 그 여자와 친해 보이는 다른 스태프에게 그녀의 연애사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연애사라고 하면 내가 너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니 연애경험이라고 정정하겠다. 그 선배 피디라는 사람의 대답은 기가 막혔다. 사랑의 존재를 그토록 부정하던 그녀가 남자를 사귄 적이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 사람과의 연애가 그닥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었을까.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미궁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다른 방법은 없었다. 식사 약속까지 하게 된 마당에, 궁금했던 것들을 전부 물어보는 수밖에.
사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사랑에 대한 그녀의 불신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그녀는 사랑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아픔을 나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나의 아픔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 교통사고가 한 번 나고, 또 나고, 그 사고로 인해 누군가 죽기까지 하면요, 다시는 운전 같은 거 하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 운전대를 잡는 게 겁이 나서, 또 누군가 나를 들이받을 것이 무서워서, 어쩌면 도로로 걸어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질지 모른다고요.
고의로 교통사고를 언급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 그녀의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저 그녀가 무심코 던진 돌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상처를 후벼 팠을 뿐. 애써 그녀를 이해해 보려 너무나도 쓰라린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다 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 가지 의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사고가 한 번 나고, 또 나면’이라는 표현이었다. 저 표현대로라면 그녀는 사랑에 한 번 데이고 만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랑이 그녀에게 상처를 준 횟수가 두 번 이상이라면? 그리고 그 상처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것들이라면? 상황이 정말 그러하다면 사랑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것마저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비친 그 여자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본 그 여자는 그 누구보다 사랑을 굳게 믿고 있었다. 단지 자신이 그토록 믿던 사랑에 배신을 당한 후 같은 상처가 반복될까 두려워 안간힘을 써가며 사랑을 믿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 뿐.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다. 자신의 마음을 속여가며 스스로를 옭아매는 그녀를 동정하던 것도 잠시, 그녀에게 사랑다운 사랑이 찾아온다면 한없이 강인한 척하는 그녀의 벽이 조금이나마 허물어질까 하는 쓸데없는 궁금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보듬어줄 진짜 사랑을 만나게 되면 삭막한 그녀의 사막에도 달콤한 단비가 내려올 텐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마침내 혼자만의 결론을 내렸다. 사랑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감히 나의 보잘것없는 사랑을 꺼내 보이겠노라.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길에 타고 남은 재와 같은 나의 사랑을, 그녀 앞에 아낌없이 펼쳐 보이겠노라.
당신은 당신의 아픔을 자꾸 감추지만
난 그 아픔마저 나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 이정하, 종이배 中
+ 다음화는 다시 연주의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미치게 사랑해요 우리 독자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