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 외전
사랑하는 경수에게.
이 편지를 쓰려고 종이를 몇 장이나 버렸는지 몰라. 이번에는 잘 쓰고 싶은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어렵다. 저번에 썼던 게 지금 쓰는 것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누구인지 쓰려고 했었는데, 편지봉투에 내 이름을 쓸 테니까 굳이 안 쓸게. 경수야, 너는 참 이름이 예쁘다. 부르기 좋아. 그래서 내가 네 이름을 아주 자주 불렀었는데, 너는 모르겠지? 그래도 괜찮아. 사실은 나는 너를 처음부터 좋아했어. 네가 나를 마주하기 그 이전부터. 네가 쓴 글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만나고 싶었어. 그래서 어쩌면 내가 조바심을 내서 너에게 다가갔는지 몰라. 내가 너무 서두른 것은 아닌지, 지금 생각해보면 미안하다. 너는 나한테 항상 선을 그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 가족 얘기도 했었고, 우리 가족들에게 너를 소개시켜주기도 한 거야. 나한테는 가장 약점이 가족이랑, 너거든. 이걸 쓰는 순간에도 자꾸 네가 보고 싶다. 이제는 보고 싶어 하면 안 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너는 항상 내가 부담스러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아서 나는 많이 슬펐어. 사실은 나는 네가 나에게 조금만 더 다가와 줬으면 하고 생각했거든. 어쩌면 너를 보냈던 이유에는 이게 있었을지도 몰라. 다가가는 것에 지쳐있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네가 다가가는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내 착각이었더라. 다른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는 너를 보면서 나는 참, 많이 울었다. 경수야, 내 기다림이 무너지면서 나는 참 슬펐어. 그래서 너를 쉽게 보냈는지도 몰라. 더욱 슬퍼지기 싫어서. 보내고 나서 후회했지만 나는 내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해. 아마 너를 붙잡아 두었다면 힘들어하는 너를 보면서 나는 더 괴로웠겠지.
이 편지에 내가 너를 보낸 후로 어떻게 살았는지 다 쓰고 싶어. 그러면 혹시 내가 불쌍해서 네가 나를 돌아봐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날 아파트에서 너와 그 사람이 같이 있던 모습을 떠올려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더라. 나와 헤어지고 그 사람 손을 잡으며 웃는 너를 보면서, 너는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걸 느꼈어. 언젠가에는 그런 웃음을 나에게도 지어줬었는데. 그날 만난 너는 내게 웃어주지 않아서, 나는 사실 그제야 실감했었어. 우리가 이별했다는 것을. 그날 나는 너한테 잘 지낸다고 했지만, 잘 지내지 못했어. 아마 믿지도 않았겠지만. 침대에 빈자리를 볼 때마다, 주인을 잃은 책들을 볼 때마다, 네가 좋아하던 TV프로를 볼 때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순간순간들에서 네가 보여서 아주 힘들었어. 그래서 차도 사고, 운전면허도 땄어.
사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날 양복입고, 운전을 멋있게 하면 네가 혹시나 나에게 반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가은이가 얼마 전에 나랑 술 마시면서 그러더라. 그렇게 해서 반했을 거라면 벌써 내 옆에 와 있을 거라고. 그래 어쩌면 그게 맞는지 몰라. 처음을 생각해보면,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너는 외로워서 내 옆에 있었는지도 몰라.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네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그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더라. 네가 없는 집에는 다시 살 자신이 없어. 그래서 네가 없는 집을 한동안 떠나 있으려고 해. 그 집에 돌아와서 잘 살 수 있을 때까지만. 아주 못된 부탁일 수 있는데, 가끔 가서 먼지도 좀 털어주고 해줘.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 경수야. 네가 없는 어딘가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까 벌써 무섭고 긴장된다. 그래도 늘 너를 바라보면서 살 수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사물함에 넣었던 선물들은 그냥 간직해줬으면 좋겠어. 사실은 며칠 동안 그 상자를 바라보면서 너를 바라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었어. 내가 너에게 뭔가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었어. 근데 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더라.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보낸 거였는데, 너를 불편하게 해서. 그냥, 내가 아직은 많이 어리구나 생각했어. 물론 우리 모두 다 아직 어리지만, 나는 아직 너를 만났던 열일곱에 머물러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앞으로 부지런히 노력해서 얼른 스무 살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면 어쩌면 너를 아주 잘, 곱게 보내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근데 다 쓰다 보니 네가 이 편지를 받고 아주 많이 미안해 할까봐 걱정이다. 너는 항상 그런 것들을 싫어했으니까. 근데 내가 널 보낸 것도, 지금 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 나를 위해서 결정한 일이고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시나 그렇게 생각이 된다면, 아니 너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러면 집에 몇 번 와서 청소해줘. 한 달에 한번 정도? 근데 내가 네가 청소를 몇 번 하면 오겠지, 하는 감도 못 잡겠다. 그냥, 가끔 생각나고 혹시나 그 사람과 싸우게 된다면 집에 와서 청소도 해주고 하룻밤쯤 자다가 집에 돌아가. 그리고 마지막 부탁일 수 있는데 많이 울지 마. 경수야, 저번에 네가 우는 거 볼 때 나는 진짜 세상이 다 나만 빼고 돌아가는 기분이었어. 그러니까, 혹시 울고 있다면, 울게 된다면 네 부탁을 떠올려 줘. 울지 말아달라는.
어쩌면 나는 네게 부담을 엄청 놔두고 가는 걸지도 몰라. 결국 너 때문에 내가 떠나는 거니까. 근데 그냥 받아들여줘. 이것도 내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해줘. 어쩌면 내가 밉겠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조금 더 편히 보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이기적이라고, 내게 짐만 주고 갔다고 욕해도 돼. 아니 욕하면서라도 나를 조금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를 꽤 오랫동안 생각해줘.
내게 돌아오지 않겠다던 경수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고 밤을 새서 쓴데도 모자라겠지만, 결국 하나겠지. 사랑해 경수야. 아주 많이. 그리고 가지 말라고 오늘도 외치고 싶다. 나를 많이 생각하며, 혹시나 기다릴 수 있다면 기다려 줘. 어른이 되어 너를 보낸 채로 나타날 나를. 다시 한 번, 사랑해 경수야. 아주 많이. 그리고 나를 잊지 말아줘. 나도 너를 잊을 수 없을 테니.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고 싶은 여름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