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말 할수 있겠지.
너를, 잊었노라고.
육지 모든 면을 감싼 푸른 바다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김종인은 그랬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제 어미의 성미와 소같이 둥그렇고 큰 눈을 빼어닮은 종인은, 새벽
의 푸른 내음을 사랑했고 바다의 진실됨을 동경했다. 그의 동생, 동생이라고 할 것 없다고 생각될 수 있는 연년생의 동생 오세훈. 다방 계집들이나 드나든다는 미장원에 들어가
딱 제 피부만큼이나 허연 색으로 머리를 바꾸었을 때, 섬에 사는 남자들의 냄새나는 입으로는 세훈을 욕하고 짓겨내는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었지만 그 누렇게 색이 바랜 눈으로
는 세훈의 낭차한 몸을 좇아내고 있었으니까. 세훈의 어머니는 마을 다방에서 일하는 싸구려 여자였다. 늘상 벌겋게 칠하고 다니는 빨간색 루주와 길게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흩
날리면 풍기는 독한 장미향. 그것을, 이 진절머리나게 투박한 시골마을을 증오하는 세훈이 제일 싫어하는 것.
*
분명, 종인의 귓가에 들려온 같은 반 동급생의 다급한 날숨에 쥐고있던 까만 샤프를 책상위에 내던지듯 두고는 뛰어나온 종인의 발이 몇 번이나 비틀거렸는지 모른다. 뺨에 어룽
어룽 상처를 달고 베시시, 초승달처럼 웃던 네가 마지못해 종인에게 내밀던 새끼손가락.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정말 나만의 착각이었나,
싶었다.
“세훈아.”
높게 쳐들어낸 다부진 주먹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일렁이는 다갈색 눈동자. 그리고 빌어먹게 눈가가 시릴만큼 반짝이는 은색의 머리카락. 그것에 질투를 느낀것인지, 그렇게
깨끗하고 하얀 너인데. 늘상 앉아있던 창가 근처의 책상위는 가정통신문으로 보이는 종이조각과 어린애들이 했다고 볼 수 없는 지저분한 낙서들. 그것에 나는 네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냥, 형이 다 미안해. 세훈아. 차마 그 말은 모조리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고 먼지가 가라앉듯 제 자리를 찾아 앉는 반 학생들을 느끼고서는 부들거리는 마음을 쥐어잡
고 감정만 앞서 뛰어온 복도를 다시 걸어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훈아, 너는 왜. 나는… 나는 왜.
*
종인아, 인아. 아이들이 다치거나 무서울때 제일 가깝고 제게는 믿을만한 엄마를 부른다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엄마 보다는 종인아. 하고 입 밖으로 튀어냈고 누구와 함께 섞이
기에는 너무나도 불완전한 내 옆에서 어룽거리는 사람이 너였다, 그렇게 치부한 삶이었다. 어릴때부터 서로에게 유독 다정하고 믿는. 그게 문제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미남형의 얼굴에 여자아이들이 네게 말을 걸기 시작하고 남자아이들에게 남모르도록 추앙받을때 나는 네 음지였다. 어린 아이들 입에서 나올 수 없느 말들에 게이 라는 수식어
를 늘 달고 다녔지만, 내가 아니면 된거지, 하는 생각으로 빳빳하고 융통성 없는 성질머리를 세우고 다녔었다. 마치 사람을 물기 전 이를 들어낸 개처럼.
아마 그 생각이 더욱이 깊어진 내가, 너를 길거리에 피어있는 한 송이의 들꽃같다고 생각했고, 늘상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고 서로를 챙기며 흘긋거리다 맞춰진 네 다갈색
눈에 방그르르 웃어내며 끝난 하루가 한달이 또 한달이 일년으로 지나 어느새 9년이 지나고 있었다.
*
내가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이 작고 초라한 촌구석에 퍼져나갔다. 마치 물에 핏방울을 떨궈낸 것 처럼. 웃기게도 나는 그 소문처럼 구멍가게 서씨 아저씨에게
다리를 벌리지 않았다. 내가 네게 늘상 하는 말처럼 이 빌어먹을 섬동네가 곱으로 싫어졌다.
*
"더러워?"
낮은 색의 책상 위에 뿌려진 벌건 자욱들이 눈을 확 찔러왔다. 내가 더러워?! 악을 질러내며 평소 너와 나를 곱게 보지 않고 언질을 하던 남자아이의 뺨을 후려쳐내고 난 후에 내
오른쪽 뺨아리에서 확 하고 불길이 이는가 싶더니 시야가 왕창 흔들렸다. 마치 안개가 자욱한 그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횡단하는 것 처럼 아무런 도움도 장비도 없이 흔들리는
꼬락서니가 지금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들리는 김종인, 네 이름 . 적어도 내 핏줄인 형에게, 그 깨끗한 사내에게 건낼 수 없는 더러운 말들을 하고 있는 입과 그런 줄
알았다는 수 많은 눈길. 등장한 담임 선생님에 의해 멈춘 상황을 끝으로 그럴리가 없다며 내가 여자같은 이 모습이 싫다며 푸념하듯 네게 던졌던 말들을 되내이고 네가 그런게
아닐것이라 주문을 걸던 내게, 네 소매의 벌건 자욱은 여린 손바닥을 꾹 짓눌러와 마치 내 생의 모든 미련을 담은 것 같이 발발 떨리는 그 사이로 본능적으로 터진 거친 숨과 함
께 물처럼 튀겨나간 손이 동공에 맺힌 물기와 함께 볼을 그어내려갔다.
"형 이름, 더이상 들먹이면 다 죽여버릴거야"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모여든 아이들이 점점 그 수를 더해가기에 거멓게 물든 사내애의 머리카락을 쥐고 핏발을 세우며 눈동자를 굴리다 닿은 그곳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는 네 얼굴, 김종인.
“세훈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쳐들었던 손이 툭 허공으로 떨어져냈고, 나는 온 몸에 힘이 풀어지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으륵 숨을 몰아쉰 내가 볼을 적셔가는 물기를 닦아낼 새
도 없이 그저 망부석처럼 자리에 앉았다. 여기저기 수근거리는 소리가 모두 귀에 박혀와 이를 악물고 책상 위에 엎어졌다. 그리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발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같은 아버지, 다른 엄마. 배꽃처럼 고상한 김종인의 어머니와 허름한 다방에서 일하는 싸구려 장미같은 내 어머니. 그래서 너를 사랑하는건지 모르겠다. 나와는 달리 태생부터
고운 너라서, 나는 안 되는걸까. 나는, 너와 나누었던 약속도 지키지 못 하는 것일까.
2.
세훈은 3-1 이라고 박혀있는 그 교실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이미 손때가 탈만큼 타버려 은칠이 다 벗겨진 그 문고리에 뭔가라도 있는듯이 구는것은 달싹달싹 움직이는
입술도 똑같았다.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던 세훈이 결국 조심스럽게 문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옆으로 밀어내자, 어스푸른 빛을 반사시키는 종인의 까만 머리카락이 눈에 가득
차와, 제 실수를 다시 상기시키는 바람에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촌구석의 학교라서 그런지 야자는 필수도 또 권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럴 의욕마저 그닥 들끓지 않
는 선생들은 6시 까지는 자유롭게 남으라는 말에, 수험생이 된 종인은 매일 남아서 벌청소를 도맡아하는 세훈을 기다렸다. 알고있었다. 종인은, 세훈이 학교가 파한 이후로 넙쭉
제 반 앞으로 다가와 마음을 추스리지도 못하고 잔뜩 미안한 기세를 감고는 고 앞을 연신 머무르고 있다는것을. 형으로써 그냥 한 번 눈을 감아주고 지나가기에는, 조금 독하게
마음을 먹은 종인이기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국어 본문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소월. 본문에서 몇 차례나 중요하다고 짙은 테의 안경을 쓴 선생이 강조한 것.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훈날 그때에 ‘잊었노라.’
벌겋게 익은 빨간색 펜 자욱과 까만색의 필기자국이 마음을 쿡 쿡 찔러왔다. 왜 하필 이렇게 애닳는 부분인지, 풀지도 않은 문제를 그저 넘기려는 순간, 수줍을만치 느릿하게 열
린 문틈 사이로 여름 내음이 확 끼쳐올랐다. 그것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종인은 딸깍 딸깍 샤프 뒷 꽁지를 톡 톡 노크를 하고는 그대로 문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세훈은 천
천히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는 그 모습을 담아내지도 못하고 바닥 나무 판자의 무늬를 따라서 눈동자만 굴려냈다. 먼저 애가 닳은 종인은, 그저 툭 하니 말을 던져냈다. 사실, 종
인의 심장은 평소 이상으로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너….”
운을 떼어내는 순간,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물기에 종인은 다급히 시선을 들어 세훈을 흘겨내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아랫입술이 허옇게 변할 때 꺼정 물어짓기고는 굵
은 물방울을 흘려내리고 있는 두 눈에서는 이른 여름의 소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훈은 조금 억울했다. 내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닌데, 왜 그런 놈들 때문에 종인과 이렇게 서먹
한 분위기를 타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의문을 품은 상태에서 종인의 호칭이, 평소와 같은 제 이름이 아닌, 타인을 부를때의 호칭이라 참고 참았던 설움이 화다닥 흘러내렸
다. 종인이 다급하게 펜을 내리고선 그대로 세훈의 시선에 맞게 몸을 낮추고 그대로 머리카락을 대어충 쓰담았다. 네 잘못이 아니다. 괜찮다. 무심한 행동은, 이미 많은 마음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세훈은 끝내 흑 흑 소리를 내었다. 저를 다독이는 종인의 손은 남자다우면서도 퍽이나 다정했기에,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세훈은 부끄러운줄도 모르
고 그 둘 만큼이나 따끈하게 데워진 교실 안을 축축하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