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이란게 거센 바람 앞 촛불처럼 얼마나 연약하고 작은 존재인가. 후 하고 불면 사라져버릴 툭 하고 건들면 깨져버리는. 자기 맘대로 들어와서 출구조차 찾지 못해 떠날 수조차 없어 그 자리에만 서성이고 멤돌 뿐. 갇혀버린 채 외로이 홀로 남겨져 있다. '경수야 안녕. 난 김종인이라고 해. 우리 첫 짝꿍이네?' 고등학교 1학년 설레고 긴장되던 3월. 새 학기에 우린 처음 만났다. 구릿빛 피부가 참 매력적인 김종인이라는 아이는 내가 앉아있는 책상옆에 앉으며 내 이름을 불러주며 밝게 말을 걸었다. 날 아는앤가. 하지만 난 널 모르는걸. '날 아니?' '네 명찰에 쓰여있는 거 본 거야. 도경수.'
도경수. 이름은 어느 길을 가도 마주치는 김밥천국 간판만큼 흔한데 성이 널 살렸다고 3년 내내 입버릇처럼 말해오던 종인이였다. 같은 반이 배정될 때마다 종인이는 나 좀 그만 따라 다니라며 자기가 그렇게 좋으냐며 나를 타박했고 그럴때마다 난 픽 웃으며 웃기지 말라고 되받아쳤다. 소극적이고 말수가 적어 친구도 몇 없었던 나였지만 그런 나에게 항상 다가와 준 건 종인이였고 난 그런 종인이가 늘 고마윘다. 너랑 같은반이 돼서 참 다행이야. 우린 놀랍게도 3년 연속 같은 반이 되었고 그래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느새 고3이 되고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뛰어난 사교성으로 늘 친구들을 몰고 다녔던 종인이지만 저도 상황파악이 되었는지 고3이 되어선 내 옆에 딱 달라붙어 공부란 걸 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연필을 들고 몇 시간씩 책상에 앉아 공부한다는 건 종인이에겐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심히 필기하던 날 유심히 보더니 나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를 따라할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모범생을 따라 해야 자기도 모범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참 김종인다운 생각이다. 어느 날은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다니던 날 따라 하겠다며 똑같은 걸 쓰고 온적이 있었다. 야 넌 안경 쓰지 마. 진짜 못생겼어.
그런 나의 말에 입술은 삐죽 내밀며 알도 없는 싸구려 오천원짜리 뿔테안경을 휙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너도 못생겼거든? 심술난 종인이는 매점 갔다 오겠다며 내 볼을 툭 치고 사라졌다. 언제부터였을까. 네 말에 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던 게. 난 아직도 의문이야. 넌 그렇게 소리 없이 내게 스며들었어.
'졸업 축하한다!! 도경수!!!!!' '너도 축하한다. 김종인.'
호되게 입시전쟁을 치르고나서 수능이란 마침표를 찍고 졸업식이 다가왔다. 나름 이름있는 대학에 진학해 원하는 과에 들어갈 수 있어서 나로선 굉장히 나 자신이 기특했다. 종인이도 3학년 때 벼락치기 한 성적치곤 꽤 괜찮은 결과를 안겨주었다. 종인이는 나에게 졸업해도 계속 연락하며 살자고 했고 난 좋다고 했다. 계속 널 볼 수 있겠단 생각에 난 몽실몽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근데 너 나중에 성공하고 나 몰라라 하는 거 아냐? 너 진짜 그러면 안돼. 경수야. 너 벌 받아.' '너야말로 나한테 그러기만 해봐. 지구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말이 끝나고 동시에 푸하하 웃어버렸다. 그래. 알았어. 나 몰라라 안할게. 진짜로. 그렇게 미성년자 생활을 끝내고 시작한 대학생활은 생각하는것과는 많이 달랐다. 신입생환영회에 OT에 MT에 공부하느라 바쁜 게 아니라 술 마시랴 바빴다. 워낙 술을 잘 먹지 못하는데 신입생이라 건네주는 술을 한잔, 두잔 받아먹으니 영 속이 말이 아니었고 매번 그럴 때마다 종인이는 날 데리러 와 주었다. 술도 잘 못 먹는 놈이 뭔 술을 그렇게 받아먹었냐는 둥 타박을하며 날 업고 집으로 향하는 종인이의 등은 생각보다 넓고 따스했다. 바보 멍충이 미련곰탱아 넌 내가 왜 이렇게 취하도록 마시는지 모르지? 넌 눈치도 더럽게 없는 놈이니까. 나쁜 김종인.
눈치도 더럽게 없는 나쁜 김종인은 대학 다니는 6년 동안에도 나에게 자기 여자친구라며 몇 명의 여자들을 소개시켜주었다. 그리곤 매번 여자친구랑 싸웠다고 술에 취해서 헤롱헤롱 거리며 그 여자들 이름을 말하는 널 보고 있으면 괜히 심술이나 동네 쓰레기더미 속으로 널 던져놓고 간 게 몇 번인지 사실 기억도 잘 나질 않는다. 그 다음 날 어떻게 자기를 쓰레기더미에 내던져버릴 수 있느냐고 화를 내는 너를 보며 괜스레 눈가가 빨개졌다. 그렇다고 내가 매번 그런 것도 아닌데. 한번은 나보다 덩치가 큰 종인이를 간신히 들쳐메고 낑낑거리며 자취방에 도착한 적이 있다. 매트리스만 있는 싱글 침대에 거의 던져버리다시피 종인이를 눕히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찾았다. 작은 원룸 주제에 있을 건 다 있다며 큰소리치던 종인이가 생각나 물을 들이키다 피식 웃어버릴 뻔했다. 다시 생수병을 냉장고에 넣어놓고 침대 옆에 털썩 앉아버렸다. 빨리 가야 막차 안 놓치는데. 이미 앉아버린 엉덩이는 다시 일어날 줄 몰랐다. 가까이서 본 종인이는 화가날정도로 잘생겼다. 이래서 매번 여자들이 꼬이나... 예전에 여자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멏번이나 물어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몇 번 고백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물을 때마다 이게 다 이 형님이 능력이 좋아서 그렇다는 시답잖은 대답만 돌아왔다. 그땐 못 느꼈는데 진짜 능력이 좋은 건가. 난 네 얼굴 보고 좋아한게 아닌데. 어느새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손에 땀이 나고 마른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미안 종인아. 미안해 처음 맞닿은 너의 입술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그게 너의 온도일까. 아님 내 온도일까. 입술을 떼고 멍하니 널 바라보다 너의 잠꼬대에 흠칫 놀라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한참동안을 종인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왠지 날 보는 눈이 저에게 다 들켰다고 말할 같아서였다. 마음 단단히 먹고 다잡고 있던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릴것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고 다시 만난 종인이는 평소 종인이였고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무척이나 씁쓸했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되는 사랑이지만 누구든 한명쯤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꼭 위로를 해주는게 아니더라도 그냥 누군가를 좋아하고있구나. 남들보다 힘든 사랑을 하고있고있구나. 라고.. 종인이와 난 아무탈없이 대학을 마치고 청년실업 390만명이 달하는 시대에서 운 좋게 반듯한 직장에 얻었다. 종인이와는 다른 직장을 다니면서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이 뜸한 채 바쁜 인턴 생활을 해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종인이는 나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 잠깐 보자고 말했고 안 본 사이에 얼굴 까먹었을까 괜한 걱정을 하며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서 들뜬 마음으로 널 기다렸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엄청 쓰게 해주세요' 그냥 먹어도 쓴 아메리카노를 더 쓰게 해달라는 나의 말에 알바생은 주문을 받으면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고3시절 밤새워 공부를 할때마다 종인은 늘 아메리카노만 먹었다. 그것도 아주 쓰게 해서 말이다. 난 종인이가 눈살이 찌푸려질정도로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마다 무슨 맛으로 먹냐고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고 그런 날 보는 종인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 더 쓰거든. 그걸 망각하기 위해 마시는 거야. 잠시동안만 잊기 위해서. 가끔 미친놈 같은 소리를 하는 김종인 때문에 인생보다 쓴 아메리카노를 손대기 시작한 나 역시 미친놈일지도. 오랜만에 본 종인이는 말끔한 정장차림에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난 이렇게 그대론데 넌 하루하루 변해가는구나. 종인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내내 내게 고딩때부터 변하는게 없느냐고 투덜거렸다. 자기만 늙어가는 것 같다고. 그래도 경수야 난 네가 한결같아서 참 좋다. 끝말은 항상 똑같았다. 또다시 내 마음이 일렁거린다. '오랜만이다 그렇지?'
'그러게. 얼굴 보기가 힘드네.'
'나 안 보고 싶었어?'
'.....넌?'
'난 우리경수 못 봐서 죽을 뻔 했는데.'
'뭐야 그게.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나 못 믿는 거야?'
나도 보고 싶었어.
우린 영양가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너의 웃음이니. 얼마 만에 듣는 너의 목소리니.
'근데 할 말 있다며. 뭔데 그래?'
'아, 사실은 나 곧 결혼해.' 뭐.....?
'이제 우리 나이도 나이고 취직도 하고 자리도 어느정도 잡았으니 가정 꾸려야지. 집에서도 성화고.
명절 내려갈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 매번 눈치주고 선보라그러고 그래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휴.' '.......결혼식 날짜는?'
'5월쯤? 애가 되도록 빨리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
'축하해. 근데 되게 갑작스럽네......'
'그래도 너한테 제일 먼저 축하받고 싶어서 이렇게 형님이 달려왔잖아.'
'.........'
커피가 쓰다 종인아. 많이 써. 한참을 아무 말도 떠오르지도 할 수도 없었다. 너의 말들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박혀 피가 흐른다. 결혼. 결혼이라. 물론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간 부딪혀야 할 문제였고 수 없이 생각해보았다. 결혼. 너와 내가 할 수 없는 것.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너와 할 수 없는 것. 어쩌지 종인아. 난 미처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어쩌지. 무섭다. 네가 없는 난 완벽해질 수가 없는데. 종인이와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잠도 오질 않았다. 외출했던 그 복장 소파에 앉아 그대로 하루가 지났다. 시간은 똑같이 흘러갔고 변한 건 없었다. 넌 결혼을 할것이고 난 여전히 미친 듯이 힘들다. 그리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이 직장엘 나가고 일을 했다. 야근에 주말근무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동기들마저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 가끔 집에 돌아올 때면 공허함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술뿐이었다. 취하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고 취하면 더 선명해지는 너였다. 손 뻗으면 닿을줄 알았고 빠르게 걸으면 잡힐 줄 알았고 부르면 뒤돌아 봐줄 주 알았고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줄 알았어. 봐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그저 좋았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었고 욕심은 끝이 없었다. 난 너에게 더 많은 걸 바랬고 기대했다. 그것은 엄청난 오만이었고 자만이었다. 이게 신이 내게 주는 대가일까. 감히 바라봐서도 안 될 존재를 바라봤던 나에게. 신이 내리는 벌.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고 소리 없이 찾아왔다. 그날이야. 종인아. 그날이 왔어. 넌 그 사람 옆에서 잠을 자고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장도 보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너를 쏙 빼닮은 아이도 가지겠지. 넌 그 아이를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야. 넌 아이를 참 좋아했으니까.
시작은 내가 했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너를 조심스레 원망한다. 그러다 내 시야밖에 벗어나 버린 너를 찾아 해메이다 다른 사람 옆에 웃고 있는 너를 찾고 난 또다시 동물원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사육사가 던져주는 먹이만 먹는 무기력한 짐승처럼 또다시 스스로 우리 안에 가둬버린다. 한 번도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열매도 맺히지 못한채 끝나야 햇던 끝내야했던 그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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