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게 떨어지는 소나기에 빠른 걸음을 길을 걷고 있었다. 약속시간에 늦은 것도 있고, 습하고 후덥지근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저기요.."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잘못 들은 줄 알고 계속해서 걷다 다시 한번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 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약간의 파마끼가 남아있는 긴 머리의 여자가 비를 홀딱 맞으며 서있었다.
"네? 저요?"
"네..죄송한데 근처 버스 정류장까지만 우산 씌워주시면 안될까요..?"
이 소나기를 맞을 대로 맞은 상태에서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에 우산을 씌워주었다. 우산 속에 들어온 여자는 키보다 작은 체구를 갖고 있었는데, 비를 홀딱 맞아 몸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더 작아보이는 듯 했다
"괜히 저 때문에 피해 보시는건 아니죠..?"
"아니에요, 어차피 지나가야 되는 길인데요 뭘."
분명 여자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은지도 꽤 된 것 같았는데, 이상하리만큼 주변에 버스 정류장이 보이지를 않았다. 약속시간이 늦은 탓에 빨랐던 걸음은 여자의 걸음과 맞추기 위해 느려졌고, 그 덕에 시간 또한 당연히 지체되었다.
"버스 정류장이 왜 안 나오지.."
내 말에 여자는 놀라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생각보다 큰 눈에 창백하다 느낄만큼의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에 눈에 들어왔다. 내가 생각해왔던 이상형에 가깝다고 하는게 맞았다.
"저 때문에 혹시 선약 있으신데 늦으시거나.."
"아, 아니에요. 약속 없어요. 집에 가던 길이라 괜찮아요."
그 후에도 아무리 걸어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적막한 길 뿐이었다. 여자를 신경쓰다보니 나도 모르는 길로 빠진 건지 아니면 비가 와서 그렇게 느낀 것 뿐인지 헷갈렸다.
"저기요."
여자는 내 팔뚝을 잡고 걸음을 세웠다. 여자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하며, 여자를 내려다 보았다. 그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물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하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 그리고 어느순간 정신이 번쩍들었다.
정신이 들자 내 눈에는 차도가 보였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으며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사람들 몇몇은 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지나갔고,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재중 3통 전부 만나기로 했던 학연이 형에게서 온 전화였다. 먼저 천막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야 이재환 너 어디야?'
"나 지금 여기가.."
'아 됐고, 만나기로 한게 2시인데 벌써 6시야 6시!'
"6시..?"
'그래, 6시! 무슨 일이라도 있던거야? 연락도 없이 약속 펑크내고'
"진짜 미안, 나중에 밥 한번 크게 살게."
'으휴, 알았어-. 나 지금 친구 옆에 있어서 끊는다?'
"응응, 끊어. 나중에 봐-"
대충 젖은 머리를 털고,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 안은 에어컨을 틀지 않는 듯 찬 기운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저씨, 이런 날 에어컨 안 틀어도 습기 안 차요?"
"에어컨 틀었는데, 약해요?"
"아, 트신 거에요? 몰랐네.."
"근데 학생 목에 그건 뭐에요? 요즘은 목에도 문신을 하나?"
"저 문신 없는데.."
"그럼 그 목에 그건 뭐야"
택시 기사 아저씨의 말에 핸드폰 액정을 통해 목을 비추어 보았다. 선명하게 나있는 구멍이 두개. 작은 구멍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구멍에서 피 한방울 흘러 나오지 않았다.
* * *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나와 다시 한번 목을 살폈다. 그대로였다. 선명한 두개의 구멍. 그리고 평소보다 하얘진 얼굴.
똑똑-
그 순간 적막과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혼자 자취하는 집에 찾아 올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기껏해야 부모님이나 친구 몇몇. 하지만 연락 없이 온 적은 없었다. 혹시나 연락이 왔었던건가하고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아무 연락도 없었다.
"누구세요..?"
"저기..아까 우산.."
아까 낮에 우산을 씌워준 여자가 생각나면서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여자는 낮과는 다른 말끔한 모습으로 있었다.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안걸까하는 생각과 함께 문을 닫고, 문을 잠궜다. 무서웠다. 그리고 문을 닫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아씨, 짜증나게 왜 문을 잠궈."
잠긴 현관문은 열려있는 문처럼 쉽게 열렸고, 여자의 태도는 돌변해있었다. 살벌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힐을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왔다. 또각또각 한 걸음 다가올때마다 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뭐야 겁쟁이야? 내가 잡아 먹기라도 해?"
"ㅎ..혹시 알아요? 우리 집은 어떻게 안거에요."
"지금 내가 너네집 찾아 온게 신기한거야?"
"신기한게 아니라.."
"뭐, 아니라 뭐"
뒤로 물러나다보니 어느새 벽이 등에 닿았다. 물러날 곳이 없어지고 여자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그리고 여자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날 째려보았다.
"물어볼게 있어요."
"뭔데?"
"제 목에 이 구멍 뭔지 알아요..? 그쪽 만나고 정신 잃고 생긴거 같은데"
"넌 영화도 안 보냐?"
"갑자기 무슨 영ㅎ.."
"됐고,"
내 말을 끊더니 의자에 앉아 날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혼자 몇마디 중얼거리더니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뱀파이어 영화 본 적 없어?"
그 여자의 말에 온 몸이 곤두섰다. 뱀파이어가 피를 빨아 먹을 때 목에 구멍을 뚫어 먹는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여자의 말을 깨달은 뒤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제야 알겠냐? 아 진짜 멍청하네"
"그럼 저도 이제 뱀파이어인거에요..?"
"응, 근데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그걸 알려주려고 온게 아닌데"
말끝이 흐려지고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꽤나 섬뜩한 웃음이었다. 여자의 웃음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깨달았고, 동시에 내 목의 구멍을 손으로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