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 13
꽤 쌀쌀해진 늦가을의 바람이 흥수와 남순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촬영장을 나와 오 분 정도 말없이 앞만 보고 걷던 흥수가 갑자기 역시 말없이 자신을 따라오던 남순에게 몸을 돌렸다. 남순은 고개를 들어 흥수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괜찮아?”
남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흥수는 건물 벽에 등을 기댔다.
“남순아”
“왜 박흥수”
“9년 전에 말이다. 그 사건 후로 널 처음 마주쳤을 때”
“……응”
“내가 가장 처음 한 생각이 뭐였는지 아냐?”
“뭐였는데?”
“그때 널 때리고 있는 오정호를 보면서 한 생각이 저 새끼가 지금 감히 누굴 때리고 있는 거지, 하는 거였다.”
“……그랬었냐.”
“그리고 무작정 다른 생각은 안하고 오정호의 팔을 붙잡고 나서 너와 눈이 마주쳤을 때, 사실 그때서야 생각났다. 네가 내 다리 부러트린 죽일 놈이라는 거”
남순은 흥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흥수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 넌 항상 그랬다고.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먼저 드는 생각은 걱정과 애정이었다고. 왜 전화 안했냐. 기다렸는데”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어서.”
“그래도 나 계속 안 볼 생각은 아니었지?”
그리고 그제야 흥수와 남순의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을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남순은 흥수의 옆 주저앉으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었지 이 새끼야. 전화하려고 그랬어, 곧”
“근데 새끼 병신 같이 맞고만 있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또 맞고 있냐?”
“그럼 그 상황에서 때려? 그거 자폭 아니냐?”
“야 그래도 최영훈 그 새끼한테 맞아주고 있냐. 그 놈 때문에 어릴 때 네가 고생 한 게 얼만데. 따돌리고 때리고 놀리고. 그 새끼가 너 엄마 없다고 소문내면서 다 주도한 거잖아.”
“아 뭐 그랬었지”
“한참 당해주다가 고작 한 대 때리고 그만하라고 소리쳤던 네가 최영훈한테 무슨 잘못을 저질렀겠냐?”
“근데 그 후로 너무 달렸다.”
“어?”
“그쯤으로 그냥 그 괴롭힘에서 벗어난 걸로 그만 뒀어야 했는데 놈들이 내 앞에서 쩔쩔매는 그 모습이 너무 달콤해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고.”
“너무 어렸어. 너”
“똑같이 어린 넌 안 그랬잖아. 나보다 키도 더 크고 힘도 더 셌던 놈이”
“나한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난 더 큰 후에도 그랬잖아. 나 상처받았다, 그래서 괜찮아 하고 징징거리면서”
“넌 그럴 만 했지”
남순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흥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와 내가 뭐가 달랐겠냐. 고남순. 우리 잘못한건 잘못한 걸로 당했던 건 당했던 걸로 따로 기억하자. 잘못한 것 때문에 정말로 당했던 게 아무 일도 아니게 된다면 그것도 문제 아니겠냐.”
남순은 우리 흥수 어른 다됐네, 라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흥수는 남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돼 박흥수. 나 때문에 촬영장 엉망 됐는데 수습하러가야지.”
흥수는 웃으며 촬영잘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거의 촬영장에 다다랐을 때 흥수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고남순”
“어?”
“너 다시 담배 피냐?”
남순이 발걸음을 멈추고 흥수를 바라보았다. 들켰다는 그 표정에 흥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요즘 다시 피기 시작한 거면 더 못 그만 두기 전에 끊어라. 나보고 담배 좀 끊으라고 옆에서 온갖 잔소리 하던 게 누군데”
“이제 끊어야지”
이젠, 다시 돌아올 테니까. 남순이 흥수의 팔을 툭툭 쳤다.
“그리고 고남순”
“또 뭐?”
“송하경이랑 잘 하고 있냐?”
일순간 남순의 얼굴을 살짝 붉어졌다. 흥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냐 그 얼굴은? 송하경이 그렇게 좋아?”
“어, 음, 뭐 좋지 좋기는 하지 음 좋지 그럼”
남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수는 남순의 어깨에서 팔을 내리고 남순을 툭툭 밀치며 말했다.
“우리 고남순, 제법이야? 이번에는 꼭 이뤄라. 첫사랑?”
“놀리지 마라”
남순이 툴툴대며 앞서갔다. 흥수는 그 뒷모습을 따라 걸으며 길고 길었던 짝사랑을 그제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정정기사가 나고 남순은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드라마도 나름 높을 시청률을 기록하며 방영 중이었다. 그리고 흥수는 어느 때와 똑같이 출근하기 위해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 날도 흥수는 허우적거리며 침대 속을 빠져나왔다. 남순은 막바지 촬영이 많았는지 어제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흥수는 익숙하게 아침을 거르며 집을 나왔다.
인재와 조회를 들어간 흥수는 비어있는 최한의 자리에 눈을 치켜떴다. 흥수와 얘기를 한 후로 조금씩 결석 횟수가 적어졌던 최한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자리는 비어있었다.
“한이 아직 안 왔니?”
옆에서 인재가 물었다. 최한과 친했던 이시훈도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인재는 흥수를 바라보았다. 흥수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인재는 한숨을 쉬며 조회를 마쳤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고, 회장?”
인재와 흥수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교무실로 가는 길에 인재가 흥수에게 물었다.
“한이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요즘 학교 열심히 다녔잖아. 근데 갑자기 왜 안 나오지?”
“내일은 나오겠죠? 내일 오면 잘 타일러서 물어볼게요. 선생님은 걱정 마세요”
인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흥수의 얼굴은 어두웠다. 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10시. 야자 감독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던 흥수는 느껴지는 진동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누나 아니면 남순이겠거니 한 생각과는 다르게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최한’이었다. 순간 흥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흥수는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나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었다. 흥수는 다급하게 물었다.
“최한이냐?”
“……예”
“너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기 쌤”
“어 그래”
흥수의 대답에 잠깐 망설이던 최한이 말했다.
“아니에요”
흥수는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무슨 일 있지? 말해봐라 무슨 일인데”
“그냥 쌤 저 좀, 데리러 오실 수 있어요?”
“어디냐 갈게”
“우리집 근처 놀이터요. 우리 집 어딘지는 아세요?”
“안다. 조금만 기다려”
전화를 끊은 흥수는 달렸다. 최한의 목소리가 위태위태했다. 어디선가 많이 느껴보았던 위태로움이었다. 그래서 흥수는 더 빠르게 달렸다.
도착한 놀이터 그네에 걸터앉아있던 최한은 흥수를 보자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고 외치려던 흥수는 최한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얼굴이 온통 상처였다. 그 상처들이 왜 생긴 건지 알 수 있는 흥수는 무슨 일이냐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덤덤하게 말을 건냈다.
“우리 집 갈래?”
“…….”
최한은 대답이 없었다.
“뭐 혼자 사는 집은 아니지만 같이 사는 친구도 이해 할 거다. 물론 오늘도 안 들어 올수도 있고. 집은 넓고 남는 방도 있으니까 지내가도 괜찮을 거야. 갈래?”
최한은 고개를 숙였다. 놀랍게도 고개 숙인 최한은 울고 있었다. 흥수는 한숨을 쉬며 최한의 어개를 토닥였다.
“가자. 일단 가서 몸 녹이고 상처 치료하고 그러고 얘기를 하더라도 하자, 응?”
흥수는 최한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최한은 흥수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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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요
저도 알아요
죄송해요....
저는 한번도 흥수가 좋아한 사람이 누구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망상은 여러분의 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올라님, 깡주님, 소금님, 비랑님, 이경님, 메가톤님, 흥순홀릭님, 보라돌이님, 넥타이님, 미미님, 맷님, 모카님, 끙끙이님, 콘칩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