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you 너만이 내 세상을 흔들어놔
1.
- 반장! 남친 왔다!
- 조용히 해.
- 이름아 잘 잤어?
- 오~~~~~~~
진짜 죽고 싶다.
- 작작 해.
- 뭐를?
- 놀리지 말라고.
- 놀리는 거 아닌데.
- 오~~~~~~~~~~~~~~~~~~~~~~~~~~~~~
진짜, 진짜 죽고 싶다.
2.
모든 문제는 아마도,
- 제노야! 진짜 잘하더라!
이때부터.
솔직히 난 그때부터 이제노가 좆같았다.
참고로 ‘그때부터’가 아니라 ‘좆같았다’가 중요하다. 이제노를 좆같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내 편을 들어줘야 할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다.
- 이름아 사회 프로젝트 나랑 할래?
- 나 애들이랑 할 건데.
- 지우 예나 시은이? 다섯 명까지 같은 조 할 수 있대.
이제노는 눈치를 씹어먹은 듯 뻔뻔하고,
- 우리끼리 이미 분담했어.
- 한 명 더 있으면 할 거 더 줄어들지 않을까?
끝을 모르는 듯 질겼다. 하지만,
- 맞아 맞아. 우리랑 같이 하자.
- 야. 김예나.
- 제노 잘하잖아~
최악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얘를 나만 싫어한다는 점,
그리고 ‘잘한다’는 점!
3.
다시 ‘그때’로 돌아가보자. 이제노가 좆같아진 그때.
- 제노야! 진짜 잘하더라! 차분하게 또박또박!
- 이제노 뭐냐? 덕분에 이겼어.
- 진심. 기장 나왔네.
첫 외부대회였다. 대회를 준비한 지, 동아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건 물론이고 학교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을 때. 팀 결성은 서로에 대해 뭘 알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그냥 가까운 반끼리. 만나기 편해야 한다는 초-단순한 이유였다. 사실상 제비뽑기였는데 우리 팀은 우승까지 했다.
이제노 덕분에.
그 많은 전학에도 불구하고 학교생활 십 년 동안 한 번도 임원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선도부 그런 거 말고. 반장, 회장, 뭐 동네마다 명칭은 달랐지만. 작년엔 학생회장도 했다.
그런데 말이야. 저 쌩긋거리는 새끼 때문에 이겼다고? 내가 한 건 어디로 가고? 쟤가 기장감이라고? 나는? 나는 안 보여?
폭발 일보 직전이었지만 참았다. 참고, 참고, 또 참고. 차라리 폭탄 제거하는 것처럼 담판이라도 지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물 끓는 냄비를 가슴에 담고 사는 것 같았다. 이제노는 1학년인데도 어찌나 따르는 애들이 많은지 기장 언니는 대놓고 이제노를 차기 기장, 1학년 대표처럼 대했다. 반장은 내가 미리 ‘먹어두어’ 다행이라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먹어둬? 다행? 내년에 또 같은 반 되면 이제노가 반장 되는 거 아냐?
아. 생각을 말자.
4.
교내 대회를 앞두고, 참가 팀을 꾸린 동아리원들끼리는 서로 피드백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이제노에게는 칭찬 일색이었다. 허허실실 하면서만 말하면 되는 거야? 나한테만 보여 저 괴상한 논리 점프? 발음 좋으면 다냐고. 홀린 것도 아니고!
- 그럼 이제 넘어갈까? 다음 지현이?
- 나 할 말 있어.
- 어, 뭔데?
- 이제노, 논거가 다 비슷해. 너 3월부터 계속 레파토리 같아. 시기상조다, 해외사례는 적용할 수 없다. 아니면 이상한 가정 하거나. 그만 반복하고 앞으론 자료조사를 더 해. 영어 말하기 대회 아니고 토론이잖아. 특히 아까 최종변론 때, 너도 알텐데.
내가 와다다 말을 쏟아내는 동안 분위기는 급속냉각 되어 얼음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 고마워.
응?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나를 보던 이제노가 쌩긋 웃으면서 “고마워.” 하자 얼음 땡! 한 것처럼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 이름아 고마워. 자세하게 말해줘서.
- 하하... 예리하다~ 지현이 할까 이제?
- 성이름 완전 심사위원이네. 이번에 못한 거 아니까 난 좀 살살 말해줘~
- 어..ㅎㅎ 그래! 살살!
5.
그리고 이제노네 팀은 우승했다.
이제노가 우승하지 않았더라면 이 상장도 나름대로 감동을 주었을지 모른다. 내 인생은 17살 치고 전개가 괜찮았다. 괜찮은 학교 괜찮은 과 괜찮은 기숙사에 왔고, 친구도 괜찮게 사귀었고, 괜찮게 반장도 됐고, 성적까지 괜찮았다. 모든 게 괜찮았다. 그 영어 잘하는 학교 가서 영어로 3등이나 했다고 기뻐할 상황이었는데. 이제노가 앞에서 축하를 받고 있자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저런 꼴을 안 보고 살 순 없었을까? 미지의 우등생으로 성적표의 숫자로나 만나면 안 되는 걸까? 복도의 유명인사로나 보면 안 되는 걸까? 왜 하필 같은 반이고 왜 하필 같은 동아리여서 내 괜찮은 일상을 초라하게 만드는 걸까?
6.
- 이름아 고마워.
- 뭐가?
- 피드백 해준 거. 그렇게 얘기해준 사람이 없었어. 진짜 도움 많이 됐어. 나 앞으로도 자료조사 열심히 할 테니까 동아리에서도 같이 잘해보자.
엿 먹이는 건가?
이제노는 아주 쌩긋 웃고 있었다. 재수 없다는 말의 현현 같았다. 빙썅 그거. 그래 네가 공부만 잘했으면 이렇게 짜증 났으려고. 너 분위기 파악 못하지. 책상을 엎었다. 상상 속에서.
- 그럼 Economy 세션 할 사람 손 들어. 지현, 이름, 제노. 오케이 세 명 끝.
- 저 안 할래요.
- 아... 그럼 Economy 할 사람 또 있어?
- 저도 바꾸고 싶어요.
- 제노도 안 한다고?
- 네.
- 얘들아 이거 연습이잖아. 주제 계속 바꾸면서 연습할 거야.
- 그래도 안 할래요. 저 Public Policy 할게요.
- 저도요.
- 하.........
- 성이름, 왜 그래?
- 아니.. 아닙니다.
같이 잘해보자는 게 이런 뜻이었냐고. 이제노의 침착한 웃음은 뻔뻔함과 끈질김의 전조 증상이었던 셈이다. 그거 이제 보니까 침착도 아니고 그냥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증거 같다.
7.
그 뒤로 이제노는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자기 싫어한다는 걸 왜 몰라? 또 내가 나서서 대놓고 말하고 나쁜년 돼야 하는 거야?
뭐 그렇게 잘났다고 칭찬도 아닌 예찬 받는 꼴 못 봐주겠어서 조목조목 까내린 건데. 이제노는 ‘조목조목’에 감동받아 혼자 의미부여를 한 모양이다. 알에서 깨어난 오리도 아니고 무슨 각인이라도 한 양 굴었다. 그렇게 얘기해준 사람 없었어.... 그거 고백 같은 거였냐고.
피곤하다.
- 놀리지 말라고. ㅋㅋㅋ
- 놀리는 거 아닌데. ㅎ... 아 각잡고 각잡고.
- 놀리지, 말라고.
- 진짜 죽을래?
- 아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너무웃겨
봐달라고 앞에서 어그로를 끌던 애들이 내가 참다못해 성질을 내자 미친 듯이 웃었다. 점심시간 왁자한 복도가 두 배는 울리는 거 같았다.
- 징짜 쥬글랭?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 야 그냥 사겨.
나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 중지를 치켰다. 예나가 팔짱을 딱 끼고 능글대면서 물었다.
- 뭐가 문젠데? 야 솔직히 이제노 같은 애가 어딨냐.
- 어 그래서 싫어.
- 아니 뭐라는 거야. 들어봐. 웬만하면 그런가 보다 하는데 이제노는 그런가 보다-가 안 된다니까?
- 맞아. 너무 바로 싫어해서 내가 다시 다 비교해봤는데 이제노가 우리 기수에서 두 번째로 잘생겼어.
- 아, 뒷말 하지마.
- 나재민 빼면 제일 잘생겼다니까?
- 아.......
시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했다.
- 그냥 짜증나. 그냥 싫어. 뭐가 그렇게 짜증나는데? 그냥 말고. 설마 이제노한테 열폭해?
- 뭐?
- 나 진짜 개진지해. 나쁜 뜻 아닌 거 알지. 그런 거면 나라도 같이 까줄 테니까 말이라도 해. 이해가 안 돼서 그런다구.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싫어.
8.
- 제노 국제중 나왔어?
- 역시.
노트북을 연 김에 SNS을 들여다보는지 예나랑 시은이가 또 시끄러웠다.
- 뭐가 역시야. 김예나는 미국 살다 왔어.
- 왜 나로 니가 유세 부려. 그래서 영어 잘하는구나?
이제노 열전은 끝이 없구나. 냄비 하나 추가. 부글부글부글.
- 주말인데 빨리 하고 끝내자!
내가 말을 그냥 끊어버리자 그제야 다들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노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개요는 다 짜놨고 사례조사가 대부분이라 과제는 빨리 진행됐다. 참고 문헌이 중요하다고 해서 영양가 있는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느라 마무리가 좀 피곤했다. 이제노는 자료조사 열심히 하겠다는 말이 진짜였는지 복잡한 통계를 여러 개 긁어왔다.
- 좀 눈에 들어오게 필요한 정보만 떼서 차트 다시 그려.
- 아, 그러네. 고마워 이름아.
- 자꾸 뭐가 그렇게 고맙냐? 다같이 하는데. 성이름 좋아해?
- 대답하지 마.
- 아.... 알겠어.
- 와... 성이름 대박. 이제노 넌 왜 성이름 같은 애를 좋아하냐.
- 누가 좋아한대? 그만 좀 해!
내가 소리를 지르자 교실을 같이 쓰던 다른 조 애들까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 이런 사람 아닌데. 머리가 띵해져 왔다. 물 마시고 올게, 겨우 그 말을 하고 교실을 나왔다. 나 진짜 왜 이러지. 이쯤 되면 장난이든 아니든 관심 없으니까 그만하라고 말해야겠지. 아니 이미 그렇게 말한 셈인데. 그런데도 이제노가 알아들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9.
그 뒤로 누구도 나한테 이제노가 어쩌고 하는 소릴 꺼내지 않았다. 이제노가 이내 나를 따라 나왔다는 걸 모를 수가 없을 텐데도 그것도 아무도 안 물었다.
- 미안해 이름아.
- 너 내 이름 좀 그만 부를 수 없어?
- ... 미안해.
- ....
- 미안해. 네가 그렇게 불편해하는지 모르고...
- 당연하지. 난 눈치가 있어서 참았고 넌 눈치가 없어서 분위기 파악 못하니까!
- 맞아.. 맞아. 그래서 그랬구나. 미안해.
- 너 진짜 재수 없어. 다들 너 좋다고만 하니까 상상이나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 진짜 재수 없다고. 실실 웃기만 하면 다야? 자세히 들어보면 진짜 허접한데 아무도 말 안 하는 거야 왜?
- 그래서, 그래서 네가 말해준 거 정말 고마워. 그거 생각하면서 수행도 더 열심히 할게.
- 그만 좀 고마워해! 넌 그게 제일 재수 없어. 차라리 미안해해. 속으로. 그래 그거 나한테 대놓고 말할 거 없었어. 그렇게 말을 하고 싶으면 분위기 좀 맞추라고. 난 고작 장려상 받았는데 거기다 대고 나 덕분에 우승했다는 식으로 말하면 내 기분이 어떨 거 같은데?
- 맞아. 그러네. 네 말이 다 맞아. 정말 미안해. 눈치 없이... 기분 망치게 해서 미안해.
내 악다구니가 허무하게 무너져내리는 걸 보자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쩔쩔맸다.
- 어.. 어 울지마. 미안해. 정말로. 내가 다 미안해. 좋아하는 것도 안 할게... 헉.
- ....
- 헐. 아. 진짜 미안해. 나 이제 말 안 할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노가 손을 움찔대면서 어깨를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 너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 당연... 아. 말해도 돼..?
- 말해 병신아.
- ... 너를 누가 안 좋아해.
다시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 미안해. 미안해 좋아해서.
- ...
- 너는.. 토론할 때도 진짜 논리적이고 똑똑하고. POI(이의제기)도 너만 많이 받잖아. 힘든 일 엄청 많이 맡고.. 나 알아. 선배들이랑 선생님들한테 애들 얘기 대신해주고. 반 애들한테 칭찬 엄청 많이 하고. 아... 근데 나한테는 거의 안 하더라. ㅎㅎ... 그리고 엄청.. 예쁘잖아. 네가 제일 예뻐! 진짜 멋있어. 그래서 엄청 좋아했어. 미안해.
- 엄청 좋아했어?
- 응... 이제 안 좋아할게. 신경 안 쓰이게 할게.
어느새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내 어깨 위의 손이 그 말과 함께 힘없이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고 이제노에게 입을 맞췄다.
10.
- 너네 혹시...
또다. 이게 몇 번째더라. 이런 걸 귓속말로라도 묻는 사람은 이제 지우밖에 없긴 했지만.
- 아니.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턱을 괴었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몸을 돌려 손을 흔들어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도 손을 들어 흔들어주자 나의 시선을 따라가던 지우가 가볍게 짜증을 냈다.
- 이래도 안 사귄다고?
- 어―.
- 너 웃고 있다.
세븐틴 - ROCK |
재밌으셨나용.. 여러분의 평가를 기다립니다.. 살다 보면 가끔 의도 없이 재수 없는 친구들이 있지요. 열폭씨앗을 잭과 콩나무 수준으로 키워버리는 엄친아 제노 캐릭터... 아무리 뭐같아도 찌끄러기들을 볼 때랑은 완전 감상이 다른 그런 거 있잖아요..? 엄친아는 재수가 털려도 엄친아이기 때문에.. 게다가 훈남 잘생남이라면..!!! ㅎ 그런 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치환 이름은 항상 받침으로 끝나는 이름도 잘 들어가게 하고 있어요. 사람 이름이 대부분 받침으로 끝나니까! 치환 이름이 '여주'로 되어있는 데에다가 받침으로 끝나는 이름 그냥 넣으면 뭉개지잖아요ㅠㅠ? 저는 그게 너무 싫었답니다 .. * [Do you feel the same?], [Oh maybe maybe]의 연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