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전에 알아 둘 것
1.찬열이는 사육신 중 유응부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잡았습니다.
2. 경수는 청소년 찬열은 20대. 자세한 나이는 읽다보면 나와요.
박찬열x도경수
어린 왕을 위하여
1456년 5월 (세조 2년)
한 남자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급히 누추한 주막으로 들어섰다. 얼핏 보아도 훤칠한 키에 곧게 뻗은 등, 뚜렷한 얼굴선이 그가 보통이 아닌 자임을 알게 했다. 얼굴에서 어린 티가 남에도 그의 기품은 전혀 어려보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얼마나 쉼 없이 달려왔는지 그의 높게 솟은 콧대 사이로 땀이 흘러내렸다. 잠시 주위를 살핀 후 주모에게 다가간 그는 시끄러운 주막 속에서 묻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주고받은 남자의 얼굴엔 왠지 모를 긴장감이 보였다. 남자는 주막 뒤편에 마련된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방 문 앞, 가지런히 놓인 여러 켤레의 신 위로 그의 짚신이 어지러이 놓였다.
좁은 방안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긴장이 서려있었다. 그 곳엔 이미 엄숙함이 깊게 자리해있었다. 덜컥. 엄숙했던 공간을 무너뜨리며 찬열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소리 내어 맞이하는 이는 없었다. 간혹 눈인사만을 전하며 그의 등장을 반기는 이가 있을 뿐이었다. 찬열이 문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그의 반대편에 앉은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침묵을 깼다.
“다 모인 것 같으니 이야기하겠소.”
찬열의 반대편, 정 가운데 앉아 모임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는 결코 쉽게 열 것 같지 않던 두 입술을 떼었다.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벽량이 임명되었다는 건 다들 알거라 믿소.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를 치룰 것이오.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오.”
중후한 목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누추한 방에서 낮게 퍼지는 그의 말은 전혀 가볍지 않은, 오히려 대단히 위험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반기를 드는 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없어야만 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이 모인 이 자리는 단종의 복귀를 도모하는 자리였다. 삼문이 입을 닫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뒤로 팽년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찬열을 닿아 있었다.
“자네가 맡은 바가 크네.”
“알고 있습니다.”
찬열의 짙은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팽년을 향했다. 그의 목소리는 굳은 결의를 보이듯 낮고도 무겁게 깔렸다. 벽량은 찬열의 호였다. 벽량 박찬열. 그는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장에서 세조를 보좌하는 별운검을 맡게 되어 거사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있었다. 세조를 향할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앞날을 좌우했다. 그의 품안에서 조용히 거사를 기다리는 칼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결코 무를 수 없는, 물러서도 안 되는 그 자리가 그에게 작은 흥분감을 가져다주었다. 나의 어린 왕을, 도경수를 내 두 손으로 복위시킨다. 찬열이 조심스레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의 손엔 벌써부터 땀이 차기 시작했다.
몇 번의 대화가 더 오고간 후 삼문은 자리를 급히 마무리 지었다. 누구에게 보여 좋을 자리는 아니었기에 불필요한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모인 중신들은 밖의 시선을 의식하여 무리 짓지 않고 한명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자리의 끝과 끝, 삼문과 찬열은 마지막까지 일어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모인 이들이 모두 흩어지자 둘만이 남은 방은 아까완 다르게 휑해 보였다. 적막함 속에서 삼문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삼문이 방문 옆에 자리한 찬열과 가까워 질 때 쯤 찬열의 목소리가 삼문의 귀에 박혔다.
“이 일이 대감의 욕심이, 소인의 욕심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삼문이 자리에 그대로 섰다. 이 일이 내가 권력을 갖기 위함이라고 보는가. 아까와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넓은 방안을 메꿨다.
“아닙니다. 그저 상왕의 마음이 무엇에 닿아있는지, 혹여 이 일이 상왕을 더욱 불편하게 하는 일은 아닐는지 헤아리고자 합니다.”
“벽량. 자네가 어린 왕을 위한다면 이 일은 분명 옳은 걸세.”
삼문이 찬열의 옆을 지나며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잘 해줄 거라고 믿네. 단호한 말을 끝으로 삼문이 방을 나섰다. 방문이 열린 새로 아까와는 달리 차가워진 밤바람이 찬열의 머릿칼을 간질였다. 그 찰나의 밤바람은 오늘도 궁에서 홀로 잠들 자신의 어린 왕을 잊지 못하게 했다. 그가 걱정됐다. 이 일의 끝에 성왕의 복위가 있다면 관료들의 권력다툼 속에서 허수아비 왕이 되진 않을는지, 이 일의 끝에 실패가 있다면 그를 따르던 많은 신하들이 죽어나가 홀로 외롭진 않을는지. 이러 저러한 생각들이 찬열을 밤새 끊임없이 괴롭혔다.
*
세조가 즉위함과 동시에 폐위된 단종은 궁궐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불행 중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세조는 자신의 어린 조카를 불쌍히 여겼다. 여럿 신하의 목숨을 앗아가 무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그였지만 조카에게 박하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단종에게 궁궐의 가장 깊은 곳으로 거취를 마련해준 건 세조였지만 그 이후로는 단종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단종의 궁 안엔 단종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찬열이 단종의 궁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보름달이 중천으로 서서히 떠오를 무렵 찬열이 궐복을 갖춰 입고 경수의 궁을 찾았다. 어둠이 깔린 궐 안은 어느 누구의 기척도 없었다. 찬열이 걸으면서 나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이 궐 안을 채웠다. 긴 복도의 끝, 경수의 방문 앞에 선 찬열이 헛기침을 두어번 냈다.
“들어오세요.”
경수의 작은 목소리가 문 밖으로 새 나오자 찬열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찬열이 마주한 경수는 잘 준비를 마친 채 요 위에 앉아있었다. 찬열을 보자 경수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앉으세요. 짧은 말 뒤로 찬열이 경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벽량.”
“전하,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보았습니다. 이보다 더 오래 못 볼 때는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찬열이 보고 싶었단 말을 전하며 울상을 짓는 경수를 보며 작은 웃음을 내었다. 이에 경수가 뾰로통하게 찬열을 흘겼다. 어린 왕은 오늘 하루 동안 궁 안의 어느 누구에도 보이지 않던 모습을 이제야 나타냈다. 오로지 찬열과 있을 때만 상왕은 정말 어린애가 됐다. 찬열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잘 헤아렸다.
“벽량은 이제 더 이상 소인이 보고 싶지 않은게지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또한 전하가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경수가 진심으로 실망한 듯 보이자 찬열이 당황하여 눈썹을 축 내린 채 답했다. 꼭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찬열이 경수의 눈엔 퍽 귀여워 보였다. 그의 진심어린 표현에 경수는 심통이 난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살짝 돌렸던 몸을 찬열을 향해 다시 고쳐 앉은 경수는 살며시 찬열의 손을 잡았다.
“어디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내일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꼭 이렇게 찾아 와주셔야 합니다.”
찬열이 경수가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다시 맞잡았다. 하지만 경수의 말에 확답을 줄 수 없는 그는 차마 떨군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거사의 끝에 자신의 죽음이 있을지 그 죽음 뒤에 자신의 어린 왕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릴지 헤아릴 수 없었다. 반대의 경우라면 좋겠지만 장담할 수 없는 일인지라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소인의 욕심입니까?”
경수가 찬열이 들지 못하는 고개를 살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 눈동자에는 불안함이 서려있었다.
“...왕이 되셔야 합니다.”
“아...아닙니다. 아닙니다, 벽량. 소인은 그럴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때문에, 저 하나 때문에 이미 너무나도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저는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 전하는 이미 저에게 하나뿐인 군주시지만 백성들에게도, 많은 신하들에게도 전하가 필요합니다.”
“소인은 벽량에게 그런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누구보다, 그 누구보다 벽량의 피가 흘러야 하는 일이라면 저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경수의 떨리는 목소리가 찬열의 온몸에 전율이 되어 흘렀다. 찬열이 답답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어 짓이겼다. 무릎을 꿇어 바닥에 댄 한 손에 무겁게 힘이 들어갔다.
“왜 이리도 소인의 마음을 몰라주신답니까. 저는 그저 한 사람의 마음만을 바랄 뿐입니다.”
경수가 찬열의 잡은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다 댔다. 경수의 눈엔 벌써 눈물이 몽울져 하나 둘씩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찬열의 한번 고꾸라진 고개는 다시 들 줄 몰랐다. 경수의 가슴에 가있는 손 위로 그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지만 찬열은 그마저도 바라볼 수 없었다.
“약속해주세요. 벽량. 그냥 제 옆에만 있겠다고.”
“전하……”
“하. 전하. 전하. 전하! 그 놈의 전하 소리 좀 집어 치우세요. 이 일이 그리도 어려운 일입니까. 도대체 소인이 바랄 수 있는 건 무어랍니까. 네? 대답해보세요, 벽량.”
처음엔 그저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이젠 거의 울먹임으로 바뀌어있었다. 경수는 더 이상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경수는 속이 답답해 찬열과 맞잡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게 때려댔다. 찬열이 놀라 저지하자 경수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찬열도 처음 보는 경수의 모습이었다. 가장 어린나이에 누구보다 어른인 척 해야 했던 경수는 절대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남들 앞에서 감정표현을 늘 숨겨왔었다. 그런 그가 찬열의 앞에서 정말 어린아이라도 된 듯 슬프게 울었다. 찬열 또한 마음이 심히 저려 그런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팔을 뻗어 안고 싶지만, 안아서 달래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찬열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경수의 앞에 놔두고 조용히 방 밖으로 나섰다. 방문을 닫고 몇 발자국 가던 찬열은 복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경수의 울음소리가 복도에서도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팠다. 나의 주군, 나의 어린 왕, 나의 정인, 도경수. 그의 이름 석자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찬열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벽량. 자네가 어린 왕을 위한다면 이 일은 분명 옳은 걸세.’
전 날 만났던 삼문의 말이 찬열의 귓속에서 맴돌았다. 진정 왕을 위함이 무엇일까. 무엇이 옳을까. 찬열의 생각에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끝까지 쓰려면 더더 오래걸릴 것 같아서 그냥 나눠서 올려요!
달달아니라 죄성해요(눈물)(눈물)
처음써보는 사극물이라 부족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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