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우리의 FM W. 담녀 02 따르릉-
침대 옆에 놓인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달콤한 휴식을 즐겨야 하는 주말이건만, 주중에 하는 방송에 늦어서 진짜로 밥줄이 끊길까,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는 훈련을 하기로 결심한 성규는 10시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아씨, 시끄러워!"
퍽-
…작심 세 시간으로 끝나버렸지만.
결국 푹- 자고 12시가 넘어서야 일어난 성규는 울상이 되었다. 아, 난 진짜 구제불능인가봐...
"성규야, 일어났어?"
"허엉- 동우야아 -"
뭐야, 또 무슨 일이야? 왜 일어나자마자 그래?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같이 살고 있는 룸메이트 친구인 동우가 눈앞에 보이자마자 꽉 끌어 안고는 우는 소리를 내는 성규를 보고는 동우가 물었다. 왜그래, 성규야. 오늘은 또 무슨 일인거야?
"진짜 난 구제불능인가봐…."
"뭐? 왜?"
"빨리 일어나려고 알람맞춰놨는데, 그냥 자버렸어…. 어제 PD님한테 협박당했단 말야! 그래서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허엉- 나 밥줄 끊기면 어떡해, 동우야- 흐어엉-"
다시 우는 소리를 내는 성규를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동우는 주먹을 쥐어 성규에게 꿀밤을 놓았다. 이게 진짜 어디서 말도 안되는 투정이야. 아악- 아프잖아!!!! 넌 맞아도 싸!!
"이씨, 위로해달라고!! 친구가 이러고 있으면 위로해 줘야지, 이 바보 짱똥아!!"
"시끄러!! 너 이런게 한 두번이야?! 그동안 그 이호원인가 이호영인가 하는 PD님이 너 짜른다는 협박안한게 더 용하다 이자식아!!!"
"아, 그래도!!! 위로는 해줘야 할 것 아냐!!!"
위로는 무슨 !!! 넌 그래도 싸!!! 얼른 와서 밥이나 먹어!!! 소리를 빽- 지르고는 방에서 나간 동우의 뒤에서 씩씩 대던 성규는 눈썹을 팔(八)자로 만들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 동우말이 맞지…. 안 짤리고 2년을 해온게 더 대단하다…. 갑작스럽게 호원에 대한 존경심에 가득찬 성규는 어떻게 해서든 월요일 방송에 늦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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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신보다 1년 먼저 사진작가로 데뷔한 친구, 명수의 작업실에 놀러온 우현은 몇 달전, 아프리카에서 명수가 찍어온 사진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와, 이 사진은 진짜 이쁘네.
"그 사진이 맘에 드냐?"
"응. 이거, 색감도 이쁘고, 구도도 잘 잡혔다. 많이 늘었는 데, 김명수?"
우현이 손에 든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우현을 본 명수가 피식 웃고는 우현의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맘에 들면, 가지던지. 명수가 손에 들고 있던 포도 주스를 우현의 앞에 놓았다. 명수의 말에 됐다며 거절을 하려던 우현이 포도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 맛있네. 역시 아프리카 포도 주스는 뭔가 다르구만. …뭐?
"…아프리카 포도주스?"
"…장난이다, 임마."
푸하하하. 우현의 썰렁한 드립에 명수는 테이블을 부술 듯 쾅쾅 두드리며 웃어 재꼈다. 꺽꺽꺽. 곧 숨이라도 넘어갈 듯 웃는 명수의 모습에 얼굴이 빨개진 우현이 소리쳤다. 아, 니가 기념품 같은 거 하나도 안사와서 그렇잖아, 이 멍충아!!! 금방이라도 자신의 멱살을 잡을 듯 씩씩 대는 우현의 모습에 명수가 겨우 웃음을 가라앉혔다. 하여튼, 남썰렁이 어딜가나 했다.
"기념품은 정신이 없어서 못 챙겼다. 거기 더 있다간 쪄죽을 것 같아서. 그니까 그 사진으로 퉁쳐."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는 명수가 우현이 방금까지만 해도 손에 들고 감탄하고 있던 사막사진을 가리켰다. 맘에 든다고 했으니까, 그거 가지면 되지? 생글거리며 물어오는 명수의 잘 생긴 얼굴에 손에 든 포도 주스를 뿌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낸 우현이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사진을 홱 집어갔다. …그래도, 사진은 이쁘네.
금새 사진 감상에 빠져 진지해진 우현을 보며 명수가 살짝, 웃음을 지었다. 대학 때,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는 기술에 대해서는 4학년 선배들 마져도 감탄했던 게 우현이었다. 교수님들의 강의도 한번 들으면 온전히 제 것으로 흡수하는 데다가,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사진기를 마구 들이대는 듯 하지만 프로작가 못지않은 사진을 뽑아내는 것이, 모두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런 인기와 재능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실, 저와 정말 밀접히 관련된 것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는 아웃사이더 아닌 아웃사이더였다. 그런 우현이 처음으로 관심을 뒀던게, 심하게 아파야만 했던 첫 사랑, 이었는데.
우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명수가 흘러 들어오는 과거의 기억에 한숨을 작게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친구의 재능이 썩어가는 것을 보기는 힘들었지만, 제가 알아서 정리했길 바랄 수밖에 없다.
"아참, 명수야."
"응?"
"나, 이번에 어떤 잡지에서 하는 사진 콘테스트, 한번 나가보려고."
담담히 얘기하는 우현의 표정에 비해 눈이 동그래져서 입까지 벌어진 명수가 되물었다. 저, 정말?
"그럼, 거짓말을 하겠냐."
"……."
"그리고, 잊어야지. 6개월이나 지났는데."
…허이고, 6년이 되도 못 잊을 것처럼 굴더니만. 투덜대듯 제 말을 받아친 명수에 우현이 작게 웃어줬다. 자신이 보던 사진을 차곡차곡 정리한 우현이 사진첩을 명수에게 밀어 놓으며 일어섰다.
"가려고?"
"응. 늦었어. 너도 작업해야 하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우현과 쉽게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던 명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명수의 표정을 읽은 우현이 피식 하고 웃고는 가방을 챙겨서 일어섰다.
"나도, 사진 좀 찍어야지. 아직 마음에 드는 사진을 못 찾았거든."
"아직도? 얼마나 남았는데?"
"글쎄, 3일? 5일? 모르겠다."
"뭐? 니가 웬일이야? 그새 거북이가 됐나."
"아, 아. 라디오 듣느라고, 시간 때를 놓쳤거든."
라디오? 의아한듯 우현을 쳐다보던 명수가 이내 수긍을 하더니 못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첫 관심사 다음으로 처음 관심을 가졌던 그, 라디오 얘기하는 구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명수를 보며 멋적은 듯 씨익 웃은 우현이 가방을 고쳐 메고는 작업실 문으로 걸어갔다. 그럼, 나중에 또 올게.
계속 흘끔거리며 시간을 체크하던 우현이 라디오를 놓칠세라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명수는 우현을 배웅하러 엉거주춤 일어섰던 모습으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뭐지, 방금 느껴졌던 느낌은.
미소를 띄우며 나갔던 우현의 모습이 3년 전, 사랑을 만났을 때 설레하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명수가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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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DJ규, 출근했습니다!"
라디오 스튜디오로 들어선 성규가 웃으며 스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스튜디오의 한 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본 성규가 곧바로 허리에 손을 올리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오늘은 20분 일찍 왔죠?
"주말에는 항상 일찍 왔잖아요."
"…쳇, 그냥 인정해주면 안되냐, 치사한 이성열 작가님."
시끄러워요. 여기, 대본. 꼼꼼히 읽어야해요! 주말은 무거운 분위기니까, 발음이랑 말투 같은 거 신경 쓰는 거 잊지 말고. 네, 네. 알겠습니다-. 라디오의 메인 작가, 성열이 전해 준 대본을 손에 든 성규가 소파에 앉아 찬찬히 대본을 읽어내려갔다.
그런 성규의 모습을 보던 성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중 라디오는 제가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고 차에 치어 몇 미터를 날아가도 살아남을 확률로 시간에 맞춰오는 성규였다. 항상 방송시작 5분 전에 헉헉 거리며 들어와서는 겨우 앞 멘트만 한번 읽어보고는 방송에 들어가지만, 이상하게도 방송사고는 한번도 성규의 잘못으로 난 적이 없었다. …아, 한번 빼고는. 어쨌든, 그런걸 보면 능력은 있는 데…. 한숨을 푹 하고 쉰 성열이 제 머리를 톡톡 때리고는 노트북 앞에 앉아 오늘 소개할 사연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기 시작했다. 음, 이건 좀 감동 코드가 떨어지고, 이건… 너무 자작나무 타는 냄새가 심한데?
"막내, 성종이 왔어요!"
성규의 출근을 끝으로 잠잠하던 스튜디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막내 작가답게 일찍 출근을 해서는 스텝들을 위한 커피를 사러 갔다온 성종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어린 것이 다르긴 한 것인지, 항상 밝은 모습인 성종은 누구에게나 이쁨을 받는 존재였다.
"요기, 우리 진아 작가 누나는 카페라떼, 정혁 음향 PD님은 커피 안드시니까, 오렌지 주스! 맞으시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스텝들부터 취향에 맞춰 음료를 나눠준 성종이 성열의 옆으로 다가왔다. 성열형! 형은 아메리카노 맞죠?
"응, 고마워, 성종아. 항상 고생이네, 우리 막내."
"아니에요, 막내니까 당연한 거죠!"
야 이성종! 난 안줌? 미안해 하는 성열에게 밝게 웃어준 성종이 제 이름이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성규 형!
"뭐야, 다른 사람들은 다 주고, 나는 안주는 거?"
"아이, 아니죠! 여기, 형꺼 있어요! 뭐든 다 잘먹으니까, 음, 오늘은 카라멜 마끼야또!"
오, 역시 센스하면 우리 막내다! 엄지까지 치켜들며 자신을 칭찬하고는 커피를 받아드는 성규에 괜히 뿌듯해진 성종은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 호PD님은 어디가셨어요? 커피드려야하는데.
"어, 그러고보니 PD님 안 계시네? 뭐야! 나한테 일찍 오라고 하고선 오늘은 PD님이 지각이신 거야? 헐, 배신이다."
비어있는 호원의 자리를 보고는 투덜대던 성규가 어제, 자신이 혼났던 것을 생각하며 눈을 흘겼다. 흥, 가장 중요한 DJ한테는 밥줄로 위협하면서 본인은 뭐, 바로 지각이신가? 그것도 주말에! 나도 일찍오는데! 입이 댓발나와서 중얼거리며 대본을 읽는 성규의 머리를 누군가 세게 헝크러뜨렸다. 어푸푸, 으아악-! 누구야!
"나다. 와, 잠깐 화장실 갔다 왔더니 내 뒷담화하는 녀석을 현장에서 잡는 행운이 오는 구만."
"헉 ! 아하하하. 지각이 아니셨구나-."
그래, 임마. 내가 너같은 줄 알아? 시끄럽고, 방송시작 시간 얼마 안남았으니까, 빨리 들어가! 오늘 하나라도 미스나면 넌 이따 나 좀 보자? 호원은 어느새 성종이 사들고 온 커피를 손에 들고는 성규의 엉덩이를 툭툭 차서는 녹음 부스 안으로 보내면서 살벌한 협박을 남겼다. 그 협박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이 든 성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윽, 오늘은 진짜 정신 차려야겠다.
"자, 방송 5초전! 5, 4, 3, 2, 1!"
호원의 손짓에 스피커에서는 감성적인 음악이 흐르고 ON AIR 에도 빨간 빛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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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DJ 규의 라디오 주말 버전, <규하고 우는 밤>의 DJ 규, 입니다.'
명수의 작업실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달려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들어온 우현은 현관에 신발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라디오를 틀었다. 자신이 듣는 채널은 하나 밖에 없기에 전원을 켜기만하면 된다는 것이 오늘따라 왜이리 고마운지 모르겠다.
어휴, 늦을 뻔 했네. 작게 중얼거린 우현은 왠지 모르게 저를 간지럽게 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손을 뻗어 음량을 키운 우현은 티 위에 걸쳐 입었던 가디건을 벗었다.
'자, 오늘은 토요일, 토요일은 무슨 날? 바로 야식 먹는 날! 지친 일주일 중 쉬는 날의 첫 스타트, 토요일을 잘 보내야겠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DJ 규 라디오 시리즈의 비타민, <규네 야식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피식, 제가 던지듯 벗어 놓은 신발을 정리하던 우현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밝을 때면 자신까지 같이 정화 시키는 듯한 목소리다. 신발을 다 정리하고는 간단한 저녁을 준비하려 부엌으로 들어간 우현이 계속 뒤에서 들려오는 들뜬 듯한 목소리에 조금 더 맑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도, 기분 좋은 잠을 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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