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애들이 너랑 김태형이랑 사귄다던데 진짜냐?" "뭐?" "너 김태형이랑 사귀냐고." 미쳤냐? 나 걔랑 별로 안 친해. 뜬금없이 태형과 사귀냐는 물음에 그렇게 말할 뻔한 지민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댑했다. 난 그런 적 없는데. 돌아오는 대답에 이내 바람처럼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놈 덕에 지민은 당황스러웠다. 언제 저런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형과 계속 어울렸다간 삽시간에 태형과 저 모두 게이라고 확실하게 낙인 찍혀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 김태형이랑 같이 하교하기로 했는데 어쩌지. 고민하던 지민이 태형에게 문자를 찍어 보냈다. [ 야 오늘 마치고 먼저 집에 가 ] [ 왜? ] 태형의 답장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가방에 던져넣은 지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태형의 문자를 씹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망각한 지민이 머리를 싸매고 속으로 앓기 시작했다. 이 소문의 근거지를 찾아내면 태형에게 족치라고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지민이 책상에 볼을 대고 엎드렸다. COMING-OUT SCANDLE 1. 저 분 최소 부처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더니, 속앓이를 그렇게 해대던 지민이 감기에 걸린 건 충분히 화젯거리가 될 만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태형이 반으로 당장 뛰어 들어왔을 때도 지민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고개를 돌렸다. 태형이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지민이 다시 고개를 들고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태형의 얼굴을 보니 머리까지 복잡해지는 느낌에 차라리 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지민이 책상에 엎어졌다. 하지만 이내 허벅지에서 울리는 진동에 지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 야 너 괜찮음? ] [ 몸 많이 안 좋은 거 아니면 마치고 데려다 줄게 ] [ 많이 안 좋으면 조퇴하고 쉬어라 ] 연달아 도착하는 문자에 지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지민이 툭툭 책상을 손가락으로 쳤다. 태형과 저는 거의 10년지기에 가까운 절친이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지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속으로 끙끙 앓기 시작했다. [ 웅 마치고 봐 ] 짧게 답장을 써 보낸 지민이 책상에 볼을 문댔다. 이게 무슨 미친 스캔들이야……, 게다가 주인공이 나라니. 절망에 빠진 채로 잠이 든 지민을 보고 짝이 쯧 혀를 찼다. 저거 미친 놈 아냐. 지민은 그 길로 세 시간을 내리 퍼질러 잤다. 상쾌하게 잠에서 깨어난 지민은 조퇴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쿨하게 조퇴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닥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였지만 학교에 더 있다간 미칠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대신 태형에게 먼저 문자는 보내 놔야겠다 싶어 폰을 집어든 지민이 태형의 번호를 꾹 눌러 문자를 전송했다. [ 나 먼저 집에 감!! ] [ 뭐야 많이 안 좋냐 ] 문자를 보낸지 몇 초도 안 지나 도착하는 태형의 답장에 지민이 깜짝 놀라 손에서 휴대폰을 놓쳤다. 손을 떠나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휴대폰을 보고 지민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곧 팍 하는 불길한 예감을 조성하는 효과음과 함께 지민의 손이 휴대폰을 집어올렸다. 이 거친 유리의 느낌은 필시 액정이 깨진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 생각한 지민이 휴대폰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아, 씨발…… 깨졌어. 이번 달 다음 달 용돈은 상상도 못하겠다. 한숨을 내쉰 지민이 그 자리에서 콩콩 발을 굴렀다. 미치겠네! 얼른 집에 가서 약 먹고 쉬려던 계획이 태형 덕에 모두 흐려졌다. 아, 김태형 개새끼! 지민이 생각하며 휴대폰을 조심스레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래도 속액정은 안 깨져서 다행이다.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집으로 걸어가던 지민은 성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보살이지. 내가 부처야. 집에 도착한 지민은 계획대로 약을 먹고 또 몇 시간을 잠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휴대폰이나 김태형 같은 건 새까맣게 잊고 자다 여덟 시나 돼서 일어난 지민이 눈을 비비다 말고 곧장 냉장고를 향해 돌진했다. 열여덟 고등학생의 식성을 모두 털어낼 기세로 도시락을 꾸역꾸역 밀어넣던 지민의 뇌가 태형을 떠올린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태형에게 답 문자도 안 보내 줬다는 걸 깨달은 지민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에라이, 글자도 제대로 안 보이는 휴대폰 액정에 지민이 조금 있다가 컴퓨터로 메신저 어플을 켜 답장해 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다시 도시락에 고개를 묻었다. 얼마 전에 새로 출시했다더니, 생각보다 맛있는 제육볶음 덮밥 덕에 지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제육볶음 덮밥을 빠르게 해치운 지민이 싱크대에 도시락 껍질과 쓰레기를 모아 가져다 놓은 후에 컴퓨터를 켰다. 카톡은 몇 개 오지도 않았네. 그것마저도 거의 태형의 것이라 왜 이런 소문이 났는지 알 것 같다고 느껴졌다. 김태형 게이야? 왜 이래? 생각하며 태형과의 대화 창에 들어간 지민은 조금 겁을 먹었다. [ 야 왜 읽씹함 ] [ 미친 놈아 카톡해 ] [ 집 도착했냐 ] [ 야 ] [ 진짜 안 봄? 뭔 일 있냐 ] [ 야 지민아 ] [ 이거 보면 바로 전화하셈 씨발아 ] 비슷한 카톡이 50개 가량 쌓여있는 처참한 꼴을 보고 지레 겁을 먹은 지민이 천천히 태형에게 보낼 답장 내용을 생각해 냈다. 아파서 집에 와서 잤어. 폰 액정 깨져서 컴퓨터로 들어온 거야. 이 정도면 되겠지? 마음을 가다듬고 모니터에 바짝 붙어 앉은 지민이 타자를 치던 중 스크롤이 밀렸다. [ 이 씨발 년 ] [ 또 읽씹? ] [ 존나 참다 사리 나올 듯 ] 네가 무슨 부처냐……. 속으로 생각한 지민은 지민대로 애가 타 해명 글 비스무리한 걸 마구 써 보냈다. 야 그게 아니고 위에 거 읽고 있었던 거야 어쩌구 저쩌구 아파서 조퇴했다고 했잖아 궁시렁 궁시렁 폰 액정 깨졌어 주절주절. 이 정도면 됐겠지? 지민은 전송 버튼을 누르고 괜히 뿌듯한 마음에 웃었다. [ ㅇ 그래서 ] [ 안 아프다는 말?? ] [ 야 그럼 지금 슈퍼로 나오셈 ] 뭐야 이 새끼. 지민은 속으로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슈퍼에 약이라도 사 놨나. 태형의 엄마가 아파트 상가 일층에서 하시는 작은 슈퍼를 떠올린 지민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곤 옆에 있던 츄리닝 바지와 티셔츠를 집어들고 뱀이 허물을 벗듯 옷을 벗어냈다. 하하 김태형 이 개새끼. 별 일 아니면 죽여버리겠어. 낮의 일은 전부 까먹은 지민이 입술을 꾹 눌려 오리처럼 만들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꽤 쌀쌀해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민이 일층 버튼을 누른 뒤 거울을 봤다. 음, 자다 일어났는데도 귀엽고 멋지네. 같이 올라탄 태형을 닮은 옆집 남자가 자아도취에 휩싸인 지민을 한심하게 쳐다봤지만 지민은 굴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슈퍼로 뛰어간 지민은 평상에 신문지를 깔고 누운 태형을 보고 조금 황당해졌다. "야, 너 나 왜 불렀냐?" "오이 먹으라고." "고작 오이 가지고?" "아, 당근 아니지. 당근도 있음." 뭐 씨발? 똥 같은 드립을 쳐 놓고 배실배실 잘도 웃는 태형의 머리를 후릴까 잠시 고민하던 지민이 태형의 옆에 걸터앉았다. 나도 오이 좀 줘 봐. 별 일 아니면 죽여버리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별이 촘촘히 박힌 하늘을 보니 그럴 마음도 없어졌다. 나시에 반바지 차림으로 누워 있던 태형이 지민에게 예쁘게 잘린 오이 하나를 건넸다. "진짜 이거 갖고 불렀어?" "아니." "그럼." "계속 피해 다녀서. 얼굴이나 보게." 너 뭔 고민 있냐. 짐짓 진지한 태형의 얼굴에 지민이 오소소 소름이 돋아오른 팔뚝을 쓸어내렸다. 오이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던 태형이 작게 대답했다. 어. 고민 있어. 예상 외인 태형의 대답에 지민은 조금 당황했다. 어……? 속내를 알 수 없는 태형에게도 고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고민인데?" "한 번 맞춰 봐라." "뭔데, 그냥 말해 줘." "음, 좋아하는 사람 생겼는데." 지민은 그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조금 망설였다. 그렇다면 저와 태형이 사귄다는 엉터리 소문도 풀 수 있을 테고, 태형에게도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생긴다는 좋은 소식인데 지민의 기분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 왜 이러지? 아들 다 키워서 장가 보낸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지민이 속으로 생각하며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근데 심란해. "야, 축하한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걔가 나랑 사귀어 주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말해 줘." "아, 그러지 말고 말해 줘! 누군데!" "너." "뭐?" "너." 씨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평상에 누운 몸을 조금 움직여 돌아누운 태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이 반쯤 사실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럼 넌 어쩔 건데? 난 어떡해야 하지? 고민하던 지민이 평상에 놓인 담요를 집어 들었다. 몸에 담요를 두르고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던 지민이 태형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진짜?" "어." "장난 아니고?" "처맞을래?" "아, 아니……." 난 진짜 어떡해야 하지……. 태형을 그저 좋은 친구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본 적이 없어서 지민은 조금 고민했다. 태형을 고백을 받아 주는 건 당연히 할 수 있었다. 가짜로, 연기로라도 사귀는 시늉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까지 태형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씨발, 내가 지금까지 기다린 게 몇 년인데." "미안." 뭐가 미안한데? 불퉁한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나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 개미만한 목소리에 평상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태형이 지민의 정수리에 손을 짚었다 뗐다. 먼저 들어간다. 모기 조심하고 일찍 들어가. 슬리퍼를 직직 끌며 들어가는 태형의 뒷모습에 대고 지민이 소리쳤다. 야, 담요 들고 들어가! 2. 김태형 박지민 사귐 시 (험 잘 보게 해 주세요 제) 발 그 이후로 지민은 태형과 서먹해졌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제 의지로 태형을 찾아간 건 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적어졌다. 그 전에는 체육복도, 교과서도 전부 태형에게 빌렸는데 그것도 못하게 되니 꽤 불편하다고 지민이 생각했다. 대신 어색하더라도 하교만큼은 태형과 함께 했다. 그게 제가 태형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야, 나 등에 모기 물렸다. 아, 미치겠네." "꼴 좋네." "빨리 등이나 긁어 봐라. 아, 죽겠다." "야, 모기 물렸을 땐 긁는 것보다 때리는 게 나아." 말하고서 태형의 등을 찰싹찰싹 내리친 지민이 실실 웃었다. 내가 살다가 김태형을 때리는 날도 다 오고. 꽤 매운 지민의 손에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찌푸리던 태형이 한숨을 내쉬곤 웃어 보였다. 야, 우리 초딩 때 여기 참 많이 왔었는데. 기억하냐? 긴 손가락으로 동네 놀이터를 가리키는 태형에 지민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야, 당연하지! 저거 타다가 너 입술 다 터지고 난리였잖아!" "무서워서 미끄럼틀도 못 탔던 주제에 말은 잘 하네." "시끄러워!" 잔뜩 상기된 얼굴로 태형의 팔뚝을 찰싹 내리친 지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태형과는 많이도 어울려 놀았다. 추억이 쌓여 인생을 만들어 간다는 말이 처음으로 옳다고 생각한 지민이 건너편 피자집을 가리키며 태형에게 말을 걸었다. "야, 저기서 우리 초딩 때 아이스크림 되게 많이 사 먹은 거 기억 나냐?" "미친, 당연하지. 그 땐 피자 한 판 먹으려면 용돈을 몇 주 모아야 됐었냐." "그러니까. 야, 우리 피자 먹으러 가자." "다메. 나 집에 가야 돼." 왜? 오늘 아버지 안 계시는 날이잖아. 지민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태형이 지민의 머리통을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지민아, 넌 시험 공부도 안 하니? 꼭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말투로 묻는 태형에 지민은 얼마간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저렇게 생겨 먹었어도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하는 태형 덕에 지민은 부모님에게 자주 욕을 먹었다. 태형이는 저렇게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잘 하는데 넌 대체 뭐니. 태형이가 불쌍하다. 기타 등 등. "시험 공부? 나 시험 공부 좀 도와 주라." "싫어. 도와 주면 뭐 해 줄 건데?" 새침떼기 같은 태형의 말에 지민은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친구 공부 도와 주는데 대가를 요구하는 김태형 같은 놈이 다 있나. 조금 어이없어진 지민이 뭐 해 주면 되는데? 하고 묻자 태형이 씩 웃으며 지민의 앞으로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뽀뽀." "미쳤어? 저리 가." "농담이고 피자 사 줘." "알았어." 영 내키진 않았지만 콜을 외친 지민이 왠지 태형에게 말려든 것 같은 기분에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야, 너 돈 삼천 원만 보태. 지갑을 뒤지다 삼천 원이 모자라던 것을 깨달은 지민이 태형을 특툭 쳤다. 삼천 원? 응. 아, 박지민 거지. 약올리는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이 태형을 노려봤다. "죽을래?" "박지민 내 거지." "이, 미친!" 말 장난을 성공해 신난 태형의 등짝을 지민이 한 번 더 내리쳤다. 저런 드립은 어디서 배워오는지 꾸준 드립을 실천해 주는 태형이 이젠 아주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태형을 지나 다다다 피자집까지 뛰어간 지민이 힘차게 피자집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저희 치즈 피자 한 판 포장해 주세요!" "네." 주문을 마치고 뒤돌아선 지민은 코앞까지 다가온 태형의 얼굴에 놀라 태형의 어깨를 퍽 밀쳤다. 뽀뽀라도 할 것처럼 입술까지 쭉 내민 태형에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야, 놀랬잖아! 지민의 말에 얻어맞은 어깨를 문지르던 태형이 입술을 불퉁 내밀었다. 야, 아프잖아. 지민의 말을 흉내낸 태형이 자리에 턱을 괴고 앉았다. "야, 턱 괴면 턱 비뚤어져." "걱정 감사." "괴지 말라니까?" "응." 순순히 턱에서 손을 떼낸 태형이 지민의 앞에 손을 턱 내려놓았다. 뭐? 물끄러미 그 손을 쳐다보던 지민이 주인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제 손을 얹자 힘을 빡 줘버린다. 아야! 손을 빼내려 뒤로 물렸지만 태형의 악력이 꽤 센 탓에 지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야, 빼." "소원 하나 들어 주면." "됐거든? 누가 이기나 한 번 해 봐, 그럼." "그럼 나야 좋지." 아 맞다, 얘 나 좋아하지. 그 사실을 떠올려낸 지민이 태형의 손을 팍 뿌리쳤다. 그리고 난 뒤 이는 묘한 공기에 지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태형에게 미안해서 입을 열려던 중 피자가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맛있게 드세요! 타이밍 장난 없네. 접시 두 개를 앞에 내려놓은 아르바이트생의 발랄한 목소리를 듣고 지민은 조금 후회했다.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는 지민을 보고 태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안 차갑냐?" "응, 괜찮아." "접시 대 봐." 접시를 가져다 대자 피자를 칼로 잘라 제 접시에 가지런히 얹어 주는 태형의 행동에 지민의 이성이 꼼짝 못하고 얼어 붙었다.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너무 본능적이어도 탈이야. 괜히 또 냉수만 벌컥벌컥 들이킨 지민이 피자를 조각내 포크에 찍어 입에 넣었다. 근데 넌 왜 안 먹어? 아까처럼 턱만 괴고 빤히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조금 민망해진 지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서. 너는 나한테 그런 사람이야." "야." "나랑 사귀자고. 좋아한다고." 응? 지민아. 꼭 동굴을 파고 기어들어갈 것 같이 낮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태형에 지민은 얼굴에 열이 훅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떡하지. 그냥 확 그러자고 해 버릴까……. 아까 전부터 꽁꽁 얼어 있던 이성은 돌아올 생각도 않았고, "아, 알았어." 지민은 홧김에 그러자고 해버렸다. 헐, 진짜? 제가 고백을 해 놓고도 당황했는지 벙한 얼굴을 한 태형에 민망해진 지민이 피자 한 조각을 태형의 입으로 쑤셔넣었다. 야, 뜨거워! 방금 나온 피자를 입 안에 쑤셔넣은 탓에 결국 입천장이 다 까진 태형이 지민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야, 이거 손해배상 해야 돼." "됐거든?" "내가 안 됐거든? 나중에 나갈 때 아이스크림 사라." 이 새끼가 아까부터 자꾸 미친 소리만 해 대네. 태형이 오늘 약 안 먹었어? 그러는 네가 제일 미친 것 같은데. 뭐래 미친 놈이. 따위의 콩트 아닌 콩트를 해대며 식사를 마친 둘은 곧장 태형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결국 태형에게 아이스크림을 뺏긴 지민은 입술이 오리가 돼선 태형에게 불만을 토해냈다. "아, 오늘 너한테 다 털렸어!"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아주머니가 그냥 주셨잖아. 뭐가 그리 심각해?" "그건 나 먹으라고 준 거였거든!" "나눠 먹으라고 준 게 아니고?" 몰라! 잔뜩 토라진 지민의 어깨를 잡아 돌린 태형이 입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지민의 입 앞에 들이댔다. 먹어. 그나마 쭈쭈바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한 지민은 실실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위에서 아래로 핥아내렸다. 아, 극혐. 내가 침 다 묻혔으니까 김태형도 못 먹겠지? 꼴 좋다. 나름 뿌듯해하는 지민의 예상을 보란듯이 깬 태형이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지민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아, 간접 키스가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더러워 이 병신아!" "나는 한 번도 네 침을 더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어쩌라고 이 오글킹 새끼야.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하고 애써 하하 그러냐? 하고 대답해 준 지민이 손 끝을 잘근잘근 물어씹었다. 사귀기 전이나 사귀게 된 후나 별반 차이가 없는, 오히려 전보다 더 능글맞고 저를 놀리는 데에 몰두하는 태형에 지민은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 얘랑 사귄 거 잘 한 짓인가……. "야. 오늘 안에 수학 열 페이지 다 풀면 내가 치킨 사 줄게." "헐, 진짜?" "어. 두 마리." 김태형 짱짱맨. 역시 태형과 사귀길 잘 했다고 생각한 지민은 금세 태형의 어깨에 매달려 방방 뛰어 다녔다. 근데 나 요새 살 쪄서 치킨 먹으면 안 되는데……. 야, 괜찮다. 넌 살 쪄도 귀엽고 안 찌면 예쁘고 귀엽고 멋있으니까. 위로하는 것 같지만 왠지 저를 디스하는 듯한 훼이크 가득한 말에 지민이 태형을 곁눈질로 노려봤다. "야 그 말은 또 뭔데? 살 빼라는 말 아님?" "아니, 그냥 귀여워서. 족팡매야?" "뭔데 그건 또!" "밥 먹었냐는 건데?" 진짜? 다른 뜻 없고? 경계 가득한 지민의 눈에 웃음을 터뜨린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곤 지민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 보면 볼수록 매력있어. 태형은 지민의 뺨을 붙들고 몇 번이고 뽀뽀해 주고 싶은 걸 참고 애써 허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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