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충 없이 사는 법 "우리 지민이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거실엔 온통 형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대답을 넣어 두고 가방을 현관에 내려놓았다. 레슨은 잘 받았어? 내가 일어서자 등 뒤에서 형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품에 고개를 젖히고 형과 눈을 맞췄다. 응. 그리고선 고개를 끄덕인 후에 본 형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만면했다. "응, 그래야지. 그렇지?" "응." 형은 참 단순하다. 그래서 복잡하게 미쳐버린 김태형보다 무섭다. 내가 형을 안으면 형은 나를 마주 안아 준다. 그럴 걸 알고 나는 형을 안지만 형은 내가 그래서 형을 안는다는 걸 잘 알았다. 한 마디로 나는 형에게 묶인 거였다. 방금 에어컨을 틀었는지 윗공기는 차가웠고 아랫공기는 따뜻했다. 형에게서 벗어나 소파에 누웠다. 형이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올리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많이 피곤해? 씻겨 줄까?" "아니, 됐어. 내일 일찍 깨워 주면 안 돼? 씻고 가게." "알았어, 옷만 갈아입고 들어가서 자." "응." 눈꺼풀이 달라붙은 것처럼 무거웠다. 더이상 눈을 뜨고 있다간 피곤해 쓰러질 것 같아서 방으로 들어왔다. 형의 말대로 옷을 갈아입으려고 마이를 벗었다. 손이 미끄러져서 와이셔츠 단추가 자꾸만 툭툭 빗나갔다. 아, 잠 온다. 그래서 그대로 침대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바이올린이 허공에서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어쩐지 김태형이 나타날 것 같아서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서 본 나는 편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형이 옷을 갈아입혀 똑바로 눕혀뒀을 게 분명했다. 해가 뜬 것 같았다. 거실로 천천히 걸어나와 소파에 누웠다. 형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안 깨웠는데 일찍 일어났네, 착하다." "아침 뭐야?" "지민이가 좋아하는 스파게티." "아." "아, 맞다. 형 내일 저녁에 출장 가." 혼자 집에 잘 있을 수 있지? 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출장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기껏 해 봐야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형은 날 두고 나가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밥을 먹은 뒤에는 교복을 챙겨입고 집을 나왔다. 형이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나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줬다. 형이 웃었다. 잘생겼다. 학교 가는 길에 김태형을 만났다. 껄렁하게 등 뒤로 둘러 멘 가방이 퍽 날라리 같았다. "굿모닝." 김태형이 인사했다. 한숨을 내쉬고 김태형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우리 아가씨 어디 아파? 김태형이 느끼하게 물었다. 이번엔 고개를 내저었다. 어깨 위로 김태형의 손이 척 올라왔다. "아침 먹고 왔어? 안 먹었으면 사 주게." "형이 해 줘서 먹고 왔어." "뭐 먹었어?" 스파게티 먹으셨나? 정확한 김태형의 예상에 김태형을 의심스러은 눈초리로 쳐다봤다. 김태형이라면 스토킹도 모자라 집 안에 카메라도 설치해 둘 인간이었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 말에 김태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묻었어." 김태형이 손을 뻗어 내 입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 나른하고 담백한 손짓에 김태형과 나 빼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안 가? 김태형이 내 어깨에 둘렀던 팔에서 힘을 뺐다. 기분이 별로였다. 학교에 도착해선 입을 열 틈도 없이 바빴다. 몇 번 도와 줬더니 종으로 알고 부려 먹는 건가 싶다. 뭐가 하나 꼬이니까 전부 꼬였다. 김태형 무대 하나에 참 별 게 다 들어간다 싶었다. 정작 본인은 무대 준비는 제대로 했나 모르겠다. 대기실에 들어서자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김태형이 보였다. 계속 돌아다녀서 힘이 빠진 다리를 쉬게 해 주려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왔어?" "응." "바빠?" "응, 너 때문에." 나? 김태형이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팍을 가리켰다. 응. 김태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왜? 태연한 목소리에 입술 끝이 뒤틀렸다. 너 때문에 지금 다 바쁜데. 안 보여? 내 물음에 주위를 둘러보던 김태형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내 덕이지." "그냥 닥치고 있어 줄래." "알았어. 네가 원한다면야." 김태형이 어깨를 으쓱하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거웠지만 밀어내기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더니 김태형이 웃었다. 태형아 이리 와.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누나가 김태형을 불렀다. 김태형이 금세 누나 앞으로 달려갔다. 누나와 몇 마디 하던 김태형이 나를 슬쩍 쳐다봤다. 뭐지, 기분이 나빴다. - 김태형은 바이올린을 자주 부쉈다. 악기는 본인의 신체처럼 소중히 해야 한다던 김태형의 말이 모순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끔은 칼로 나무를 난도질했다. 저 비싼 걸. 그래 놓고 자기가 해친 바이올린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 가끔은 미친 듯이 웃었고 가끔은 울었다. 오늘은 울었다. 큰 손으로 얼굴을 덥썩 감싸고 고개를 두어 번 움직인다. "눈에 수도꼭지 달려서 미지근한 물 나온다." 슬프다는 말을 굳이 저렇게 돌려서 해야 할 필요가 있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여간 미치긴 제대로 미쳤나 보다. 의자를 뒤로 한껏 젖히고서 팔을 벌린 김태형은, 공기 중의 무언가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안 그래, 지민아?" 느끼하게 묻는 목소리에 나는 조금 소름이 돋아올랐다. 옆에 놓인 난도질 당한 바이올린이 불쌍해질 즈음이었다. 나 바이올린 받으러 가야 돼. 같이 가 줄 거지? 묻는 눈이 꼭 아니라고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수식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형이 환하게 웃었다. "나랑 놀자." "나 지금 가야 되는데." "어딜?" "레슨." 김태형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가지 말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더니 김태형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레슨은 가야 되잖아. 나중에 봐……. 풀 죽은 모습이 답지 않게 귀여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참 이상했다. 레슨을 받는 내내 김태형 생각이 났다. 그래서 발목을 접질렀다. 덕분에 연습도 제대로 못 하고 연습실 구석에 처박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어쨌든 몸이 미치도록 아프지 않은 이상은 얌전히 있는 게 내 신상에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 시키고 앉아 있기 시작한지 이삼십 분이 지났다. 발이 저렸다. 연습실 문이 열렸다. 전정국이었다. 잘생긴 얼굴이 휙휙 연습실을 둘러보더니 내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앉았다. 엉덩이를 털썩 붙이고 내게 웃어 보이는 꼴이 꽤 익숙했다. "형님 저녁 드셨습니까." "못 먹었어." "삼각김밥 사 왔어요. 드세요." "고마워." 전정국이 내민 봉지를 받아들었다. 봉지 안에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삼각김밥 두 개와 잡다한 군것질거리가 들어 있었다. 넌 안 먹어? 삼각김밥 하나를 내밀자 전정국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손도 크고 잘생겼다. 그 위에 삼각김밥을 올려 줬다. 전정국은 눈치가 좋다. 싹싹하고 눈치도 좋아서 전정국은 편했다. "맛있어요?" "아직 비닐도 안 깠는데." "아, 그래요?" 응. 작게 대답하곤 삼각김밥 비닐을 쭉 깠다. 비닐을 버리려고 뒤를 돈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내 손에 들린 비닐을 가로챘다. 씨발 연습 잘 하고 있나 했더니 둘이 노닥거리고 있었네. 김태형이었다. 잔뜩 비아냥거린 김태형이 비닐을 손에 꽉 쥐었다. 비닐이 우그러들었다. "뭔데 또." "같이 바이올린 받으러 가 준다며." "아, 맞다." "아 맞다는 미친 놈이." 김태형의 꼭 곧 뭐 하나라도 찢어발길 것만 같은 시선이 내게로 들러붙었다. 씨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김태형이 내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나는 순순히 김태형을 따랐다. 전정국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나는 그걸 사과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 씨발." 뒤에서 변성기가 막 지난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이였다. 낮게 깐 목소리를 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전정국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기, 저도 같이 가도 돼요?" 김태형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나는 김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야, 너. 중딩. 김태형의 말에 전정국이 김태형을 똑바로 쳐다봤다. 따라와. 의외였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김태형을 쳐다봤다. 왜? 이거 아냐? 김태형이 순한 눈으로 내게 물어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연습실에서 김태형을 따라 택시를 타고, 김태형의 고모 댁에 도착할 때까지 전정국은 별 말이 없었다. 김태형도 마찬가지였다. 매일매일 이렇게 조용했으면 좋겠는데. 택시에서 내려서 가로수가 잔뜩 심긴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꽤 높은 오피스텔이었다. 여기 살면 돈 많이 들겠다. 전정국이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타서 사 층을 누른 김태형이 안 타냐는 눈빛으로 우리 둘을 쳐다봤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김태형이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사 층에 도착할 때까지도 정적이 일었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김태형이 먼저 내렸다. 익숙하게 제일 앞 집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꾹꾹 누른 김태형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굴을 디밀었다. 우르르 몰리는 꼴이 흉해 보일까 봐 가만히 있었더니 김태형이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바이올린 어디 놔뒀어요?" "저쪽 세번째 방에 놔뒀으니까 가져가.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겠네. 옆은 태형이 친구?" "아, 네." 어색하기 짝이 없는 공기에 입안이 바싹 말라 들었다. 전정국과 나는 말이 없어졌다. 김태형의 고모가 우리에게 오렌지 주스를 한 병씩 건넸다. 공손하게 받아들고 인사를 한 뒤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아직 한참 남았네. 속으로 생각하곤 김태형이 나오기만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김태형은 악기랑 교감이라도 하는 건지 몇 분 동안이나 나오질 않았다. - "야, 울어봐." "뭐?" "울어보라고." "미쳤냐."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문 앞에 기대 서 있던 김태형의 첫 마디였다. 뜬금없지만 김태형스러운 말이었다. 김태형이 팔짱을 끼고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나를 훑어뵜다. 너 못 울어? 병 걸렸냐? 사람이 뭐가 그렇게 솔직하질 못 해. 김태형이 주절거리는 걸 싸그리 무시하고 거실로 와 앉았다. 물 묻은 손을 탁탁 털어내고 드라이기를 집어 들었다. "한 번만 울어 보라니까? 때려야 울어? 그런 취향 있어? 어?" "시끄러워."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와 앉았다. 내가 머리를 말리는 동안 김태형은 질리지도 않는 지 끈덕지게 물어욌다. 대단한 집념이다. 이럴 때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 고 나는 생각했다. 드라이기 소리에 김태형 목소리가 묻혔다. 드라이기 소리는 시끄러웠지만 덕분에 비로소 평화로워진 것 같았다. 대충 머리에 남은 물기만 털어내고 드라이기를 끄자 김태형이 나를 툭툭 쳤다. "야." "뭐." "옷 줘. 갈아입게." "아, 어." 대충 형의 옷장에서 제일 편해 보이는 바지 하나를 꺼내 가져다 주자 김태형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이 옷 누구 거야? 그 형?" "응." "너랑은 다르게 큰가보네." 김태형의 말에 고개를 으쓱했다. 어쨌든 형이 큰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 네 침대에 좀 누워 있어도 돼?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티셔츠를 쑥 집어넣고 엎드린 김태형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내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붉게 염색해 퍼석거릴 것 같은 머리카락이 그닥 좋아 보이진 않았다. "머리, 왜 염색했어?" "아, 이거? 그냥." 뭐야, 싱겁게. 내 말에 김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내 팔을 끌어 옆에 눕혔다. 김태형의 눈가가 연필로 그려 번진 듯 까맸다. "아이라인 그렸어?" "응. 멋있지?" 대답 대신 김태형의 눈을 더 빤히 쳐다봤다. 예전에 공연을 할 때 아이라인을 그린 적이 있었다. 내 눈이 그닥 큰 인상을 남겨 주지 못 해서 그려야 된다고 했다. 김태형 눈은 인상적인데. 쌍꺼풀 없이 큰 눈. 굳이 저걸 그려야 되나 싶었다. "부끄럽게 왜 계속 쳐다봐. 잘생긴 건 알아 가지고." "화장 지우고 자." "알았어." 김태형이 순순히 대답했다. 화장을 지울 만한 게 없어서 물티슈를 몇 장 뽑아 건넸더니 김태형이 웃었다. "지워 줘." "화장실에서 거울 보고 지워." "귀찮아. 피곤해." 그럼 지우지 말던가. 내 손해 아니다. 김태형에게 말하자 한숨을 내쉬더니 대충 눈가를 물티슈로 벅벅 문지른다. 아, 김태형답다. 문득 형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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