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 사장님
02
부제 : 처음 만난 사이?
"마셔요."
"......"
"입 안댔습니다."
일단은 타라는 도경수 말에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조수석에 가서 앉았다. 마셔요, 방금 전 본인이 우리가게에서 사간 라떼를 대뜸 내미는걸 받아들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져 금세 흥건해진 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에헤이, 엉겁결에 들고나와버린 신문지도 젖어버렸네.
입 안댔습니다, 단호하면서도 장난끼가 서린 도경수 목소리에 얼른 그를 쳐다봤다. 알아요, 먹던걸 누구한테 줄 만큼 그 쪽이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생각 안한다구요.
"왜 부르셨어요."
"글쎄요."
"....."
"왤까요."
왜 부르셨어요, 낮고 무거운 내 목소리가 차 안에 조용하고도 크게, 크고도 작게 울려퍼졌다. 지금 굉장히 불편하거든요?
더이상의 대화가 필요할리도 없고, 무엇보다 얼굴 마주하기도 껄끄러운 우리 사이에 이 무슨 내 남사친들보다 가까운 만남을 갖느냔 말이야.
글쎄요, 왤까요. 골 때리는 그의 말에 대꾸도 못하고 입을 다시 다물었다. 왜겠냐 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말투가 다시금 생각에 잠기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이렇게 마주할만한 이유는 그저께 그 일 밖에 없는데, 양심도 없이 나한테 사과하라는건 아니겠지.
멋쩍게 들고온 신문지만 접었다 폈다, 옆에서 느껴지는 도경수의 시선에 부담스러워 고개를 들지못헀다.
"덕분에 요즘 안부 전화 많이 받습니다."
".....네?"
"이틀 전에 있었던 일, 사내에 파다하게 퍼진건 알고있습니까."
"......"
내가 알리가 있나, 몸은 그 쪽 회사 안에 있어도 하는 일은 완전 별개인데. 소문이 났다하면 그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어떤 식의 소문인지 알 도가 없다.
이틀 전에 있었던 일, 사내에 파다하게 퍼진건 알고있습니까? 진지한 듯 진지하지 못한 도경수 말에 큼큼, 라떼 한 모금이나 마시며 대답을 회피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기업 디오그룹, 거기 최고 윗대가리가 일개 알바생에게 시급쟁이라는 발언을 했으니 소문이 안나는게 이상하지.
근데 그게 파다하게 퍼지든, 미미하게 퍼지든. 어차피 조만간 잘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어 대충 씹고 다시 은근슬쩍 신문에 시선을 꽂았다. 나 바빠, 이 양반아.
"ΟΟΟ씨."
"....."
"듣고있습니까?"
"엄마야!!"
ΟΟΟ씨. 뭔들 말 해보라는 듯이 호명되는 내 이름에 못들은 척 마냥 신문만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난 할 말 없으니까 사과 받아낼 생각이면 이만 보내줘요.
그러니 또 짜증이 잔뜩 섞인 듣고있습니까? 도경수의 말이 울리고 이내 곧 빵-! 도경수가 누른 클락션 소리가 차 내부에 크게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방방 뛰는 심장은 둘째치고, 얼음 먹으려 뚜껑을 열어놓은 라떼가 손에서 떨어진 바람에 내 다리 위로 보기좋게 엎어져 버렸다.
된 라떼가 내 옷에 잔뜩 묻어나 놀라기도 전에 "괜찮습니까? 어디봐요. 안차가워요?" 티슈를 미친듯이 뽑은 도경수가 얼른 벨트를 풀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순간적인 차가움에 놀랐다기 보단, 정말 빛의 속도로 다가온 도경수에 더 놀랐다고 해야하나.
"이리주세요, 제가 닦을..."
"가만히 있어요, 좀. 다 젖었네."
"......"
"아끼는 옷 입니까?"
도경수 사장님
갑자기 내 옷을 사주겠다며 차에 시동을 거는 도경수에게 괜찮다고, 곧 버릴 옷이었다고 아무리 당부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뭘 듣는 척이라도 해야 말이지.
내 말을 싸그리 무시하던 도경수는 조용히 내 벨트까지 손수 매주고는 결국 옷 집까지 데려왔다. 딱봐도 옷에 금칠해놓고 금 값 받아낼 것 같은 옷 집엘 말이다.
라떼에 젖은 내 바지는 얼마전에 엄마랑 시장에 갔다가 폐업정리 하는 집에서 5000원주고 산 옷인데 무슨 이런 곳에서 옷을 받는단 말인가.
도경수가 얼른 고르라며 몇 개 골라온 바지들의 가격표들을 봤을 때 대충 이 가게 옷들은 100만원을 기본으로 웃도는 것 같았다. 이딴 천쪼가리들이 무슨....
"안고르고 뭐합니까."
"저 정말 괜찮다니까요."
"제가 골라줘야 합니까? 저 보는 눈 없습니다. 노티나도 괜찮아요?"
멀뚱하게 서서 눈 앞에 보이는 옷들 가격표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진짜 집는 옷마다 백만원은 기본이네, 여긴 만원짜리 팔찌 같은 것도 없으려나.
안고르고 뭐합니까. 내 옆에 다가와서 묻는 도경수에게 괜찮다는 말만 또 늘어놓았다. 차라리 어디 지하상가에 데려다주면 실컷 쇼핑할게요. 네?
제가 골라줘야 합니까? 저 보는 눈 없습니다. 노티나도 괜찮아요?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보이는 도경수의 대답에 또 한번 좌절했다.
아니 내가 왜 그저께 처음 본 사람한테 백 이백하는 바지를 받아 입어야 돼? 받는다 한들 그거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입고다니냐고, 응?
"유진씨."
"네, 사장님."
"이 여자한테 어울릴만한 바지 두 벌만 차에 실어줘."
"네, 알겠습니다."
내가 끝까지 가만히 서서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보다못한 도경수가 한숨을 깊게 쉬고는 아까부터 졸졸 쫓아다니던 여직원을 불렀다.
이 여자한테 어울릴만한 바지 두 벌만 차에 실어줘. 내 팔을 잡고 가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여직원에게 흘린 말이었다. 뭐야, 본인 가게인가.
나를 차에 태우고선 정작 본인은 차 밖에서 아까 그 여직원을 기다리는 듯 담배를 입에 무는 도경수에 인상을 찌푸렸다. 담배도 피나보네.
그리고 얼마 안가 쇼핑백 두개를 들고 쫄쫄쫄쫄 내려와서는 도경수에게 전해주는 직원이 보이고 담배를 발로 지져 끈 도경수가 차에 올라탔다.
도경수 사장님
"그냥 좀 받아주면 안됩니까."
"성의만 받을게요. 그 쪽 지인 주세요."
"ΟΟΟ씨 입으라고 산 옷을 왜 지인한테 줍니까."
"우리 그저께 처음 만났어요, 그것도 되게 악연으로."
"......"
"고작 커피 한번 쏟았다고 이렇게 이틀 전 처음 만난 사람한테 몇백짜리 선물 받는거, 되게 이상해요."
"......"
"그 쪽 저 때문에 곤란해진거 잘 알았어요, 그건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말아요, 우리. 예?"
회사 앞에서 쇼핑백 2개를 가지고, 도경수와 내가 또 다시 티격태격 하는 이유는 굳이 말 안해도 알렸다.
회사 앞에서 내리고, 우리 카페 앞에 다다라서는 나한테 그 쇼핑백을 주는 도경수 손을 "저 못받아요" 단호하게 밀어냈다.
비싼거 아니니까 받으라는 그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도경수한테는 싼 옷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금덩어리와 같잖아, 차원이 달라, 차원이.
끝까지 사양하는 내 단호함에 또 한숨을 깊게 내쉰 도경수는 그냥 좀 받아주면 안됩니까? 또 짜증병이 도진 듯 했다.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까지 꼭 주고싶어 하는 이유를 묻고싶어 옴짝달싹, 대화도 더 길게 붙이고 싶지 않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악연으로 이틀 전 처음만난 우리 사이에 실수아닌 실수로 몇백만원짜리 물건이 오고가는게 정상이느냐, 말하자면 이게 대충 내 본론이었다.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말아요, 우리. 마지막으로 내가 도경수에게 한 말은 거의 부탁에 가까웠다. 만나봤자 득 될 것도 없으니까.
나 입으라고 산 바지 두 벌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한숨만 마냥 쉬어대는 도경수 모습이 좀 안돼보여, 언짢긴했다.
그래도 이미 뱉은 말인걸 어떡해. 어찌됐건 해고 하겠다는 말도 없었고, 옷을 사준 성의도 있고. 감사한 마음에 고개도 꾸벅-. 목례 후에 뒤돌았다.
뒤를 돈 후에야 생각나는건, 결론적으로 오늘 왜 날 주차장까지 불렀냐 이걸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다는 거?
다시 뒤돌아서 주차장으로 부른 이유를 물어볼까 말까, 참 많이도 고민했다.
"......"
"처음 만난 사이?"
"....."
"우리가 그저께 처음 만난 사이인건 확실합니까?"
".....네?"
"아니라면,"
"......"
"아니라면 이거 받아줄거에요?"
그러다 얼마안가 도경수한테 손목을 잡혀 다시 얼굴을 마주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