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of nightmare
00.
창 밖에 보이는 네온사인들의 향연에 호원이 넋을 놓고 밖을 봤다.
야경이 끝내주긴 하는구나...
학교가 산 바로 아래에 있는터라 창 밖을 보면 큰 동네와 번화가가 한눈에 보였다. 원래 야자를 안하기 때문에 야경을 볼 일이 없었는데
야경 하나는 죽여주는구만... 감탄사를 내뱉으며 하라는 야자는 안하고 있는 호원을, 동우는 그저 한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캬아... 아주 그냥 네온빛이 넘실거리네. 네온바다네, 네온바다."
"호원아."
"응?"
"공부 안해?"
"아아 공부...해야지..."
보다 못한 동우가 한마디 하자 그제서야 어물어물 책상 서랍에 교과서를 꺼내는 호원이다.
성적우수자로 기숙사 까지 쓰고 있는 동우와는 다르게 호원은 영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예술계 혹은 내로라 하는 영재들을
모아놓은 종합고등학교에 호원이 들어온 것은 어찌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호원은 예능특기생도 아닌데다 영재라고 할 만큼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중학교 때도 평범하게 중위권에 웃돌던 호원이 이 악물고 공부해서 이 학교에 턱걸이로 온 것도
전부 동우 덕분이다. 기억도 잘 안나는 어린시절 부터 친구였던 둘은 떨어질 일이 없었다. 옆집에 살면서 초, 중학교도 같이 나왔으니.
중 3 올라가는겨울, 당연히 자신과 요 근처 고등학교에 갈 줄 알았던 동우가 저어기 산턱에 있는 종합학교에 갈 거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저히 동우랑 자신이 다른 학교를 다니면서 몇달에 한번씩 만날 자신이 없었다. 상상이 안된다.
그래서 호원이 이 악물고 1년 바짝 공부해 턱걸이로 간신히 동우와 같은 학교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면서
공부의 목적이 사라져 호원은 더 이상 공부 할 이유가 없어졌다. 심지어 같은 반 까지 됐는데 굳이 애를 써서 공부할 이유가 어디있냐.
후. 한숨을 쉬며 영어 교과서를 폈다. 그래, 이왕 좋은 학교 들어온 거 성적 좀 잘 받아보자. 공부 이까짓 거 해보지 뭐.
패기 넘치게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어 위를 눌렀다. 찰각. 찰각. 찰각. 찰각찰각찰각찰각찰각 아오!
짜증을 내며 샤프를 던지듯 필통 안에 넣었다. 존나 샤프도 안나오네. 본문을 봤다. 흰색은 종이고 검은색은 글씨인 것은 알겠다.
아니 씨발, 한국 사람이 한글만 알면 되지 외국 나가서 살 것도 아니고 난 한글도 존나 어렵단 말야.
한글도 존나 어려운 한국인 이호원은 결국 영어책을 덮어 서랍 안에 넣었다.
그래, 수학을 하자. 호원은 책상서랍을 뒤져 수학책을 폈다. 알파벳과 이상한 기호들로 가득했다. 내가 지금 편 것이 수학책인가 제 3의 언어인가.
수학은 수로 된 학문을 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뜻이 바뀌었나. 이딴 외계어 집어치우라고.
호원은 집어던지듯 바닥에 책을 두곤 흐물흐물 책상에 엎드렸다.
야경 예쁘네. 나도 저 빛바다 어딘가에 스며들듯 있었겠지.
아까부터 야경 감탄만 하는 호원에 동우가 혀를 쯧 차더니 책에만 향하던 시선을 드디어 호원에게로 옮겼다.
자신을 보는 느낌에 고개를 홱 돌린 호원이 동우의 얼굴을 보고 씨익 웃었다. 드디어 얼굴 좀 보네.
"너 계속 그렇게 정신 사납게 하려면 그냥 집에 가."
"응?"
"집중이 안되잖아. 자습 안 할 거면 그냥 집에 가라고. 어차피 너 원래 야자 안하잖아."
동우는 제 할말만 하고 다시 펜을 쥐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조용하기 그지 없는 교실엔 펜 서걱거리는 소리만 텅 빈 공간을 채웠다.
이런 정적이 어색한 호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뒷 문을 열고 밖을 나갔다.
드르륵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책에만 고개를 박고 있던 동우가 홱 뒷문을돌아봤다.
아아, 내가 말을 좀 심하게했나. 금새 후회가 들어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였다. 너무 착한 동우였다.
밤기운을 잔뜩 머금은 학교는 어둡기 그지 없었다. 돈 많은 우리 학교가 전기세는 아끼려는 건지 학생들이 공부 하고 있는 교실 외에는
불이 다 꺼져 있었다. 덕분에 교실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 외에는 복도가 깜깜했다.
원래 야자를 안했던 호원이라 이렇게 조용하고 어두운 학교는 낯설었다. 슬쩍 교실 안을 보면 대부분 비슷했다.
공부를 하거나, 엎드려 있거나 각자 할 일에 집중해, 주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교실도 교실이지만, 사방이 이렇게 어두컴컴 한데 교실 불빛에만 의존하는 이 복도의 적막함이 그렇게 이질적일 수가 없었다.
이상한 느낌에 호원은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다시 교실로 들어가기가 눈치 보여 그냥 성열한테로 갈 생각이었다.
그냥 김명수랑같이 집에 갈걸, 후회된다. 성열도 자거나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이다. 걔도 공부를 하는 애는 아니지.
호원은 음 고개를 끄덕이며 코너를 돌았다.
교실이 있는 본관 건물은 'ㄷ'자 형태였다. 이번에 2학년 올라오면서 부득이하게 반을 하나 더 늘려버려 제일 마지막 반인 9반은
원래 창고로 쓰이던 곳을 비우고 새 반을 만들게 되었다. 1반부터 4반까지 한 복도에 있고, 코너를 돌아 5반부터 8반까지 한 복도,
또 코너를 돌아 빈 교실과 창고 몇개를지나, 제일 끝 교실이 9반이었다.
2학년은 꼭대기 층이라 마지막 복도는 원래 쓰이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으슥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그 으슥한 곳, 그것도 하필 제일 구석진 곳에 교실이 만들어진다 했을때 모든이의 반발이 심했었다. 코너돌아 바로 앞 교실을 두고 왜 저 끝
으슥한 곳에 교실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교실 바로 앞에 계단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다니기 쉽다는 학교측의 주장으로
결국9반은 다른반과 동떨어져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반에 이성열이 있었다.
처음에 이성열 자신이 9반이라는 소리를 들었을때 엄청 욕 했었지. 그나마 김명수랑 같은반이라 위로 된다고 감기들어 코 훌쩍이며
말하던 성열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구석진 곳에 있는데다 햇빛도 잘 안들어와 한 낮에도 어두워서 그 복도를 지날 때 약간 오싹할 때가 있는데,
이 놈의 학교는 고장난 형광등도 갈아주지 않는다.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하면 같이 어두워지는 이 곳에서 생활하는 9반 아이들이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래도 이런곳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마련이다. 이 학교에도 어느 학교에나 있다는 그 흔한 괴담이 있었는데, 그 괴담의 근원지는 거의 다 9반이었다.
그 덕에 생긴지 1년도 안된 9반은, 저주의 9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도 있었다.
9반으로 향하는 복도로 코너를 도는 순간 음칫 발을 멈추었다. 끝이 있을 벽은 깊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복도가 한 없이 길어보였다.
꿀꺽. 괜히 침 한번 삼켜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펴 보았다. 낮에는 그렇게 잘 돌아다니던 복도였는데 어두워졌다고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새삼 이런데에서 잘도 생활하는 9반 아이들의 담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필 이 복도가 다른 복도보다 긴 편이다. 복도의 끝에 있을 9반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아득하게만 보였다. 손에 땀 차는 기분에 바지에 슥슥 닦아내고 발을 떼었다. 이런 곳에서 공부하니 괜히 1등이 아닌가봐.
9반은 1등을 놓친 적 없는 앨리트 반 이기도 했다.
깊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천천히 그 복도를 지난다. 쓰지 않는 교실과 창고만 지나면 9반이다. 옆에 슥 보이는 빈 교실의 창문에
갑자기 제 반 여자애가 호들갑을 떨며 하던 얘기가 생각났다.
아마 야자시간에 우연히 맞은편에 있는 9반쪽을 보면 9반의 옆 반 창문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다고. 아무도 쓰지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 교실에
무슨 실루엣이 보인다고 아이들이 꺅꺅 대며 자신도 봤다며 뭔가가 자신을 보는 기분 까지 느껴졌다고 이야기를 털어 놓았었다.
그때는 너희들이 착각한거라고 한심하게 쳐다보며 코웃음 까지 쳐줬었는데. 그 이야기가 왜 하필 지금 생각나는 건지. 괜히 목가가 뻣뻣해졌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9반이 점점 가까워져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빛이 가까워진 그 순간, 갑자기 벌어진 일에 우뚝. 멈추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뭔가가 문 밖으로 팍 뿜어져 나왔다.
호원은 경악에 가득 찬 눈을 크게 떴다.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럽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게 현실인가 분간이 안간다.
몸이 잔뜩 굳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교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새빨간 바닥을 밝혔다.
새빨간 바닥.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밖을 뛰쳐 나왔다.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패닉이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8:40
저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