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 사장님
04
부제: 경수씨
"....안가세요?"
"어딜 말입니까."
"마감 시간 됐는데요."
퇴근시간 3분 전, 이것 저것 정리하고 이제 내 짐만 챙겨서 나가면 난 퇴근인데, 한참 전에 들어와서는 나갈 생각이 없어보이는 도경수가 눈에 들어왔다.
퇴근을 7시에 했을 도경수는 9시인 지금까지 우리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고있다. 2시간을 앉아있든 3시간을 앉아있든, 평소엔 상관이 없다만 지금은 마감 시간이라고.
안가냐는 내 물음에 느릿느릿 고개를 쳐든 도경수는, 어딜 말입니까, 이 한 마디 뱉고 다시 시선을 책으로 내렸다. 어딜 가냐니, 몰라서 묻냐.
마감 시간 됐으니까 얼른 나가라는 듯이 카페의 커튼과 블라인드를 모두 쳤다. 조명도 웬만한건 다 끄고 정말 영업 끝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몸소 나섰다.
"뭐합니까."
"영업 끝났어요."
"이게 무슨 분위기에요."
책을 보고있다가 순식간에 컴컴해진 카페에 미간을 잔뜩 구긴 그가 책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합니까. 낮고 무겁게 깔린 목소리와, 성큼성큼 내 쪽으로 한발씩 다가오는 도경수에게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영업 끝났어요,
내 말에도 눈 한번 꿈쩍하지 않은 도경수는 내 쪽으로 오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이게 무슨 분위기에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내 눈을 마주했다.
무,무슨 분위기냐니. 멀쩡하기만 했던 분위기를 본인이 오히려 묘하게 만들고있다, 괜히 떨리게. 진짜 팥 뿌리면서 내쫓기전에 사라져....
"갑시다."
"어,어딜요."
"집에 가지 어딜갑니까. 어디 갈데 있어요, 이 시간에?"
도경수 말에 당황해서 그냥 책 마저 다 읽고 가라할까 싶기도 했다. 있는 책 없는 책 다 쳐읽고 가라고, 원없이 새벽까지 읽다가라고 말할까 싶었다.
얼굴에 오르는 열이 느껴지는게, 틈만나면 빨개지는 내 얼굴이 또 홍조 빛을 띄웠노라 생각했다. 어둑어둑한 시야에 도경수는 못봤겠지, 제발.
"부,분위기는 무슨. 정말 안갈꺼에요?" 홱, 뒤 돌아서는 치던 블라인드를 마저 치려는데 또각, 구둣소리를 내며 테이블로 돌아간 도경수가 대뜸, 갑시다, 짐을 챙겼다.
정말 이 인간은 속을 모르겠다. 진짜 안 갈 사람처럼 그러더니 난데없이 가자니, 경수 마음 갈대세요?
무엇보다 '갑니다' 가 아닌 '갑시다' 라는 말에 왜요 라는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갈거면 너 혼자 갈 것이지 왜 함께하자는 거야.
왜,왜요. 누가봐도 방어태세를 잔뜩 갖춘 말이었으나 도경수는, 집에 가지 어딜 갑니까, 얼굴이 너무 태평해서 태평양인줄 알았다. 여러모로 망할 놈.
이 시간에 갈데가 있느냐며 차 키를 든 도경수는 따라 나오라는 듯이 내게 손 짓을 했다. 일단은 나도 퇴근은 해야하니까 뽈뽈뽈, 혼자 있기 무서운 어둠에서 나왔다.
"타요."
"....네?"
"집까지 데려다 줄테니까 타라고요."
도경수 사장님
"매일 이 시간까지 일 합니까."
"네"
"집에 갈 땐, 방금처럼 혼자 가고?"
"네"
"데리러 올 애인 없습니까."
"없어요."
"....푸흡-"
"차 타기 싫으면 같이 걸어서라도 데려다줄게요. 걸어갈껍니까." 거의 협박에 가깝다시피 했던 도경수의 말에 그냥 군소리없이 차에 올라탔다. 선택지가 없어.
어색할 줄 알았던 차 안은 생각보다 틈없이 대화가 계속 됐다. 도경수의 일방적인 질문이 팔할을 차지했지만 아무튼 불편하지는 않아 다행이지, 뭐.
처음엔 어디 사느냐로 시작하더니 일을 이 시간까지 하느냐, 집에 갈 땐 혼자 가느냐, 데리러 올 남자친구는 없느냐 등등 질문거리도 많았다.
분위기 조용하고 좋았는데 마지막 질문, 그러니까 남자친구가 있느냐 없느냐. 그거는 씨발. 없다고 답했더니 도경수가 푸흡- 하고 웃는게 아니겠는가? 나 원, 기가 막혀서.
"고,곧 생길거에요!" 우기는 나(모태솔로,썸남없음_25)의 말에도 입가에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지않은 도경수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웃지요.
"근데 그 쪽은 어디 살아요? 괜히 저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 오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도경수 인데요."
"네?"
"그 쪽아니고 도경수. 난 그 쪽 이름 수시로 부르는데요, ΟΟΟ씨."
"아...."
잠깐 대화가 끊긴 동안 차창 밖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이었다. 도경수 집은 어디길래 밑도끝도 없이 어딘지도 몰랐던 우리집에 데려주겠다고 한건가.
우리 집이 카페랑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나 때문에 괜한 걸음 하는게 아닌가 싶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쪽은 어디살아요? 반대 방향에 살면 미안해서 어쩌나 싶은 마음으로 도경수를 쳐다봤는데 그는 되게 난데없는 목소리로 도경수 인데요, 했다.
? 도경수에 사세요? 이제와서 통성명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뭔 헛소리인가 싶었던 나는 도경수가 덧붙이는 말에 아차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그 쪽, 그 쪽 하다보니 이젠 내가 방금 이름을 불렀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겠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야할 일이 틀림 없었다. 이름이 버젓이 있고, 알고있기까지 하니.
"네비도 안찍고 잘 오셨네요?"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길 30년인데 모르는 바보가 어디있습니까."
"여기서 태어나셨어요?"
"그런데요."
"저도에요!"
"....."
"저도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쭉- 자랐는데?"
"그럽니까."
한동안 말이 없다가 창 밖을 보던 내가 우리 집 근처 가게들이 보이면서 들뜬 마음에 입을 열었다, 네비게이션 안찍고도 잘 왔다고.
내가 시도때도 없이 그 쪽이라고 칭한게 기분 상했던 도경수에게 은근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정말 환하게 웃으며 최고의 드라이버에게 찬사를 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길 30년인데 모르는 바보가 어디있습니까. (후비적)이라는 말이 붙어야할 것만 같았던 도경수의 대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이 동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도경수도 그렇단 말이야? 니가 말한 그 초면인지 구면인지 그게 혹시 슈퍼에서 만났다거나 뭐 그런...?
어쩌다 만난 도경수와 내가 같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니, 난 지금 신기하고 놀라워죽겠는데 도경수는 떨떠름하다.
그럽니까, 심드렁한 그의 대답에 더이상 대꾸 할 만한 말도 없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뭐 이새끼야, 나랑 같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게 불쾌하냐.
우리 집 아파트가 눈에 들어오고 내릴 준비를 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으왕 덕분에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네.
"고마워요."
"압니다."
"카페오면 커피 한 잔 사드릴...."
"아, 잠깐만."
입구 들어가기 전에 내려달라는 내 말에도 "다 들어왔는데 뭘 또 중간에 내립니까. 가만히 있어요." 단호한 도경수의 말에 결국 우리집 코 앞까지 와버렸다.
터프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도경수에게 또 목례를, 그리고 도경수는 또 도경수 다운 대답을. 이젠 화도 안나는 것 같았다. 애새끼 성격이 원래 저러려니.
헐렁하게 벗어놨던 신발을 고쳐신고, 카페오면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 라는 인사를 하며 내리려했는데 "잠깐만" 도경수의 부름에 채 다 말하지도 못하고 멈췄다.
"받아요."
"....."
"적어도 그저께 처음 만난 사이는 아니잖아요, 이제."
"...글쎄 괜찮다니..."
"오늘도 안받으면,"
"......"
"안내려줍니다."
도경수 사장님
도경수(협박이 취미_나이모름)의 또 협박아닌 협박에 결국 그 쇼핑백을 받아들어 집까지 들고와버렸다. 진짜 철컥- 하면서 문을 잠궈버리는데 어떡하냐고.
일단 들고온 이 쇼핑백은 벌써부터 2000000원의 0이 눈 앞에 아른거려 열어보지도 못하고 큰 고민에 빠졌다. 이걸 진짜 입고다녀? 어떻게 입고다녀? 난 못해.
"후....."
한참동안이나 지켜보기만 하던 쇼핑백을 일단은 손에 들었다. 그래, 일단 열어보고 무조건 내 스타일 아니라고 박박 우기면서 다시 돌려주면 되지 뭐.
투둑- 테이프로 붙여놓은 쇼핑백의 입구가 열리고 눈에 바지가 보였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바지가 보이기도 전에 하얀 종이가 먼저 보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 바지 위로 놓여있는 웬 작은 종이를 들어 확인해보면 ' DO그룹 사장 도경수 ' 도경수 명함, 일부러 넣은건지 뭔지 아주 대놓고 올려져있다.
"......"
그리고 덕분에 핸드폰을 들고 쇼핑백을 뜯느냐 마느냐의 고민보다 더 크나큰 고민에 빠져있는 지금, 괜히 손도 떨리고 심장도 떨린다.
아니 왜 명함을 또 이렇게 보란듯이 보내서는 소심한 A형 또 잠 못들게 해, 이 도경수 십새기야.... 미안하니까 일단 저장해서 글을 쳐놓긴 했는데, 이걸 전송을 해, 말아?
고민하던 와중에 "시간이 몇신데 안자고 뭐해, 내일 알바 안나가?" 문을 쾅 치면서 한마디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놀라 핸드폰을 놓칠 뻔 했다. 놀래라, 우리 엄마 터프하긴.
엄마 말에 시계를 보니 정말 시간이 많이 늦었긴 늦었다. 그래, 이시간에 괜히 문자 보냈다간 도경수한테 또 고나리질 당할게 뻔해.
아무래도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내는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판단(핑계)이 서서, 문자는 다음 기회에 하는 걸로 하고 화면을 끄려했다.
아침이나 돼야 보내든지 말든지 해볼 마음으로 시선을 다시 핸드폰 화면에 고정했는데 "이런 미친." 발신 ΟΟΟ, 수신 도경수, 문자가 이미 전송되어있다.
[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경수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