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 사장님
07
부제 : 오세훈
지금 시각 오후 6시, 그러니까 도경수한테 전화온지 3시간이 넘어가고 있다. 두시간 정도가 지난 뒤로는 크게 도경수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티비보고, 페북하고, 인터넷 쇼핑하고. 진짜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는 했지만 오래 가지도 못했다. 난 분명 나가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뭘.
3시간을 훌쩍 넘어가는 지금까지 전화 한 통 없는 걸 보니 갔나보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소파에 누웠다. 오늘 엄마도 안들어오는데 속편히 무한도전이나 볼까.
스타킹의 호동이가 그렇게 좋다며 스브스만 고집하는 엄마가 오늘은 병원에서 주무신다고 하니, 도경수고 나발이고 기쁜 마음으로 엠비씨를 틀었다.
"아 지루해..."
시작할 생각이 없는건지 광고만 쏟아져 나오는 티비 화면에 금방 지루함을 느껴 충전하고 있던 핸드폰을 가져와 들었다. 카톡 하나 쯤은 와있겠지?
하품을 쩍쩍하며 무심코 핸드폰을 들면 문자들이 잔뜩 와있고, 그 문자들을 다 읽기도 전에 경악하며 벌떡 일어나 앉아 당장 신발장으로 달려갔다.
집 앞이라는 문자로 시작해서 진짜 안나오느냐고 묻는 문자까지. 전부 도경수의 문자였다. 4시에 와있는 문자가 마지막이긴 한데, 설마 진짜 기다리겠어?
엘리베이터가 우리 층인 8층까지 올라오기까지 발을 동동 굴렀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혹시나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입술을 앙 물었다.
엘리베이터한테 빨리 내려가라고 닥달한다고 이게 빨리 내려가는 것도 아닌데 "빨리 좀 내려가라, 응?"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
혹시 진짜 있을 상황을 대비해, 눈에 들어온 거울로 지금 상태도 확인했다. 존나 최악이네. 이래서 연애하는 여자들이 주말에 불쑥 찾아온 남친을 싫어하는건가.
아 그렇다고 도경수가 남자친구라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거울 속의 내 상태를 확인하고 최대한 가리기 위해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눈의 눈곱도 떼고, 코의 기름도 대충 손으로 닦고, 못생긴걸 떠나서 최소한 더럽게는 보이지 말아야지. 만반의 준비를 끝낸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더이상 급할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게 도경수 차였으니, 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한숨만 쉬었다.
아니, 차를 가지고왔으면 차에 타있기라도 하던가, 바보도 아니고 왜 차 밖에서 기다려? 터덜터덜 주머니에 손을 꽂고 도경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차림이 그게 뭡니까."
"무턱대고 찾아와서 장장 4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도경수씨" 하는 내 무거운 부름에 고개를 든 도경수는 입꼬리 하나 씰룩이지 않고 태연하게 차림이 그게 뭡니까, 고나리질부터 시작했다.
무턱대고 찾아와서 장장 4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한심하고 어이가 없어서 화를 냈다. "일단 타요" 라며 조수석 문을 여는 도경수를 한껏 째려봤다.
내가 지금 이 차를 타게 생겼냐, 새끼야? 사진이 잔뜩 찍혀서는 찌라시로 돈다는데? 어? 인터넷에서만 보던 A양 B양 그 주인공이 내가 된다는데?
"됐으니까 할 말만 해요." 딱 잘라 말하는 내 말에 도경수는 눈썹을 씰룩였다.
"고집 피우지 말고 타요, 찍을테면 찍어보라지."
내 팔목을 잡은 도경수는 찌라시 따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조수석 쪽으로 날 밀어넣었다. 존나 태연한 도경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안심하고 생각없이 타버렸다.
내가 시트에 앉고 문 까지 닫아준 도경수는 운전석에 본인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차림이 그게 뭐냐고 물었잖아요." 아까하던 고나리질을 마저 이었다.
내 차림이 뭐 어때서, 하며 내려다본 내 차림은 "미친" 욕 짓거리가 절로 나왔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확인도 못한 내 옷차림새는 그냥....
"뭡니까."
"....."
"너무 야해서 눈 둘 곳이 없네, 아까부터."
속옷 위에 얇은 끈 나시 하나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푹 파여서는 가슴 골이 다 보이질 않나, 브라 끈이 다 보이질 않나. 미친게 분명했다, 누가봐도.
요 근래 이렇게 창피했던 적이 언제 였더라. 얼굴이 새빨개지는게 여실히 느껴지면서 심장이 살려달라고 쿵쿵 거렸다.
짧은 핫팬츠도 앉아있으니 더 짧아진 것 같고, 진짜 이건 아니다 싶어서 얼른 나가려고 차 문 손잡이에 손을 갖다댔는데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뒤를 빽 돌으니 고개를 앞으로 고정한 채 먼 산을 바라보던 도경수는 "어딜 갑니까." 고개는 빳빳히 앞만 보며 입만 움직였다.
"올라갔다 올게요. 갈아입고 얘기해요, 갈아입고."
"입어요."
"......"
"올라갔다가 또 4시간 기다리게 할 지 어떻게 압니까."
입어요, 라며 본인 수트 자켓을 주섬주섬 벗어다가 내 위에 덮어준 도경수는 내가 제대로 갖춰입을 때 까지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했다.
"고맙습니다..." 내 작은 인사에 "큼, 크흠," 하며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도경수 사장님
"사람이 안오면 그냥 가던가, 연락을 하던가 했어야죠."
"연락 했잖습니까."
"6시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6시 즈음에도 문자를 보내는게 정상 아니에요? 난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다! 이걸 알려줬어야죠!"
그냥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자면 지금 도경수는 나한테 혼나고 있다. 연락을 왜 하다 말아서 애매하게 하냐, 무식하게 왜 기다리냐 등의 이유로 말이다.
문자를 왜 4시까지만 보냈냐는 내 호통에는 "배터리 없습니다" 라며 본인의 꺼진 핸드폰을 내 눈 앞에 대고 흔들흔들, 흔들어댔다.
"친구한테 들었어요, 사진 찍혔다는 얘기."
"조만간 돈 넣고 사진 본파일들 삭제 하기로 했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
핸드폰을 보자 그제서야 생각난 찌라시 얘기에, 얼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어떡하냐며 표정을 우울하게 축 늘이고 도경수를 쳐다봤다.
그런 내 표정을 마주한 도경수는 또 입꼬리를 말아 올려 작게 웃더니, 조만간 돈 넣고 사진 파일 삭제 하기로 했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돈의 힘을 보여줬다.
역시 돈이면 다 되는구나. 아까부터 사진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부터 알아봤다, 그래. 돈으로 벌써 해결했다니 믿음직스럽긴한데 떫은 내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DO그룹 사장이라는게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거리감도 드는 것 같고, 할 대답도 없어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막았다면 다행이고....
"이왕 도는거 기사부터 났다면 좋았을걸. 난 좀 아쉽다고 하면 화낼겁니까."
"....."
"팔할은 안믿는 찌라시 말고, 누구나 믿는 기사로."
"....."
"물론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겠지만."
말 같지도 않은 말.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도경수의 말에 씁쓸하게 짓던 표정을 거두고 똑바로 그를 쳐다봤다.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는다는 부가 설명 후에 활짝 웃는 그의 표정이 와중에 참으로 예뻤다, 웃는게 정말 예쁜 사람이다.
도경수 사장님
"10분안에 갈게. 엄마, 제발 울지말고 있어. 응? 나 금방가, 알았지."
아침부터 집으로 온 전화에 정신이 절로 번쩍 뜨이고 직감적으로 수화기를 얼른 받아들었다. 집으로 올 전화는 그런 용건 밖에 없단 말이야.
역시나 "ΟΟ아, 어떡하니. 어떡하면 좋으니..." 엄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또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얼른 닦았다. 괜찮아.
최대한 울음을 꾹꾹 누르며 엄마를 달래고 전화를 끊고 옷만 후딱 갈아입었다. 괜찮아. 괜찮아. 속으로 괜찮다고 새기는 방법도 이젠 소용이 없다.
세훈아, 누나가 얼른 갈게. 도통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두들기며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급성 호흡 부전입니다, 횟수도 빈번해질거에요. 앞으로는 놀라지마시고 즉시 주치의 불러주세요."
"....위험....한거죠?"
"호흡의 기능을 상실한다는게, 아무래도 위험하긴 하죠.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세훈이는 편안한 표정으로 색색 자고있었다. 엄마는 놀라서 울다 지쳐 옆 보조침대에서 자고있고 그저 난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급성 호흡 부전, 앞으로 빈번해질거라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호흡 부전이 곧 호흡 곤란인데. 위험한걸 모를리가 없는데 괜히 한번 물었다, 위험 하느냐고.
기대한 대답은 커녕, 예상한 대답이 나와 더 가슴이 저릿했다. 90도 인사를 하고 나와 세훈이의 병실로 들어서면 특유의 가습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훈아."
"....."
"1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내려가자."
세상 모르게 잘도 자는 세훈이 옆에 가 앉아서 녀석의 손을 잡고 눈을 꼬옥 감았다.
분위기 급 반전 쩔어주네요....(민망)
하지만 그보다 더 쩔어주는 분위기 급 반전이 따로 있죠.
오늘 제 글의 포인트는 경수도, 세훈이도 아니라는 점 입니다, 하하.
제일 중요한건 이겁니다
[ 암호닉 / 하실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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