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두 한 번 신어 볼랍니까?
w. 랑데부
[단독] 배우 ㅇㅇㅇ 태도 논란 가중, 잠적설까지 돌아
[단독} ㅇㅇㅇ 브랜드 평판 5위로 4단계 급속 하락 하향세 타나
[단독] 국민 여배우 ㅇㅇㅇ 이번에는 일진 논란?
1.
"우선 여론 기울기 전에 좀 쉬자. 너 쉴 새 없이 작품한다고 힘들어했잖아, 응?"
"지금 내가 이렇게 들어가면요? 나 잘못한 거 없어. 진짜야"
"그걸 몰라? ..우선 이사님 기분 풀릴 때까지만,"
ㅇㅇ는 핸드백을 거칠게 낚아챘다. 내가 잘못한 게 도대체 뭔데?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누나,"
"비켜"
"누나 짐 나가면 안 돼요. 밖에 기자들 쫙 깔려가 괜히 다치지 말고 주차장으로 가요"
"너 집으로 운전할 거야? 아니잖아. 또 그 오피스텔에 처박혀 있으라고? 난 가족도 없고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 아는데. 너까지 왜 이래 정말!"
"아니 집까지 지금, 아이다. 알겠어요. 대신 좀 늦게 출발하께요. 됐죠"
내가 뭘 그렇게.. 알았어.
ㅇㅇ는 도운이 건넨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바로 눌러썼다. 누나야 잘못한 거 없다, 또 이상한 아재한테 걸리가 그런 거니까.. 도운은 벤을 열어주며 애써 ㅇㅇ를 달랬다. 물론 그 위로는 손톱만큼도 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데. 쫌 있음 갈 거에요, 누나 배 고프시죠? 아니, 안 배고파. 배고플리가 있겠니. ㅇㅇ는 도운의 배려로
고가도로를 달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답했다.
"누나 좀 더 돌까요"
"응"
가능하면 최대한 늦게까지. 그럼 가겠지. ㅇㅇ는 옆좌석에 쌓인 대본들을 들추다 이내 그만 두었다. 또 이렇게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내 탓이 아니어도 내 탓이 되는 일은 살아오며 수두룩 했으니 괜찮을 거라 믿었지만 그건 전부 가설의 일종일 뿐이었다. 이럴거면 아주 짓밟지. 잔인해 죽겠네.
"누나"
"응"
"누나 잘못 없는 거 알죠?"
"알아"
너무 잘 아는데 이젠 이게 내 잘못 같아진다 점점 도운아.
ㅇㅇ는 꽉 막힌 서울의 갑갑한 도로와 플래쉬 같은 가로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지자
"실장님 아직 이 사람 안 넘겼어?"
"누구, 아 스토커 새끼? ...아직 안 넘어갔대요? 와, 또 연락 왔어요?"
빨간불에 걸리고 차를 정차 시키자마자 도운은 ㅇㅇ의 휴대폰을 받아 확인했다. 아 단단히 미친 새끼, 도운은 거칠게 앞머리를 헤집으며 문자 화면을 캡쳐했다. 미안해요, 누나. 네가 미안할 게 뭐있어. 정말 네가 미안할게 뭐 있는데, 그냥 이거 전부 내 탓인 걸로 할까. 누군가의 입에 오르 내리고 쑥덕이는 것도 나의 모든 찰나를 징그럽게 따라 붙는 것도 익숙한 공포였다. ㅇㅇ는 복잡한 머리칼을 괴롭히던 일을 관두고 얼굴을 쓸어 내렸다.
-"ㅇㅇ야 지금 어디니?"
"몰라요"
-"빨리 도운이 바꿔. 집으로 갈 생각 하지마, 무조건 오피스텔로 가. 알겠지? 응?"
"실장님"
-"응. 이야기해"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내가.
*
"누나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많이 늦었다. 퇴근해. 오늘 미안했어"
"아이에요. 누나 먹고 싶은 거 있음 카톡 주세요, 내일 바로 사가지고 가져다 드릴게요"
"응"
도운은 끝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 지겹고 갑갑한 오피스텔에서 ㅇㅇ가 무언가를 입에 댈 일은 없을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운은 ㅇㅇ가 평소 자주 찾는 음식을들을 메모해둔 메모지를 확인하며 시동을 걸었다. ㅇㅇ의 곁에 붙어 단독 행동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라 했으나 도운은 그렇게까지 모질 게 대할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누가 누나야한테 잘못 없다고 쫌 한 마디만 해줬음 좋겠다. 고타야"
언제부터 스폰 거절하면 사람 하나 반 직이삣나. 내는 진짜 이해가 안 간다.
도운은 제 앞에 배를 깔고 누운 사모에드의 배를 만져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ㅇㅇ 만큼 퍽 상한 얼굴로 사모에드를 매만지다 그 털뭉치 곁으로 벌렁 몸을 눕혔다. 고타야 누나야 불쌍하제. 아니, 불쌍하면 안 돼는데. 아아, 안쓰럽제. 내도 무진장 안쓰러버 보인다. 누나야 분명히 배 안 고프다 할 낀데 낼은 뭐 사다주까 고타야. 아니 니 말고, 아 절로 가라.
*
"누나 실장님 오셨,"
"ㅇㅇ야 너 왜 전화 안 받니? 또 어디 나갔다 온 거 아니지? 걱정 되게 자꾸 너까지 이럴래?"
누가 언제부터 나를 걱정했는데. 당신이 나 한 번이라도 걱정했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거야? 밤새 울리며 보내오는 연락 때문에 한 숨 자지 못한 ㅇㅇ는 휴대폰을 멀찍히 밀어두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 연락이 왔었나.
"다행히 광고주들은 계약 해지 안 하겠대.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조금 잠잠해지면... 이사님께 가자. 가서 죄송하다고 한 번만 더 생각해보겠다
대충 둘러대자 응?"
-커튼 열고 있어. 자기 얼굴 보고 싶어 11:21
"이사님 이해해 주실 거야. 사과 드리고 나서 천천히 밀렸던 작품 검토하면 또 없던 일처럼 도와주실테니까.."
"알겠어요"
"그래. ㅇㅇ가 착해, 똑부러지고. 그래 그럼 여기서 좀만 쉬고 있어. 응?"
알았으니까 이제 가셔도 돼요. ㅇㅇ는 여전히 얼굴을 덮은 채 웅얼거렸다. 그냥 좀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한참을 떠벌거리던 실장이 나가고 도운은 ㅇㅇ와 조금 멀찍히 떨어져 앉았다. 밤새 온갖 성희롱과 협박 그리고 뭣도 아닌 위로 따위에 시달리다 지쳐 이젠 그 누구도 보고 싶지가 않았다.넌 안 가니? 누나야 얼굴 좀 보고 갈라고요. 내가 왜 또 얼굴을 보여줘야 하는데
"가. 가만히 있을테니까"
"누나 그래도 밥은 먹어야죠"
"잠잠해지면 다시 활동 시작할텐데 괜히 살찌기 싫어. 너 먹고 빨리 가"
도운은 아랑곳 하지 않고 금방 사온 돈까스와 메밀국수를 테이블에 꺼내기 시작했다. 쫌만 먹어요 누나. 도운은 ㅇㅇ의 앞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안 먹을 거에요?"
"누나 내 밥 혼자 먹으면 너무 외로버서 안 먹어갈 거 같은데"
"누나아"
여기서 더 빠지면 안 돼요. 도운은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ㅇㅇ의 머리칼을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배고프면 말해요. 머리칼을 하나하나 정리해주며 도운은 ㅇㅇ를 반복해 살폈다. 무슨 일 있었나? 통 얼굴을 들지 않는 ㅇㅇ에 도운은 조심히 ㅇㅇ의 손등을 눌렀다.
"왜, 왜요"
"하지마"
도운이 조심스레 누르자마자 마치 번개라도 맞은듯 튀어오른 ㅇㅇ는 도운을 바라보았다. 하지마 윤도운.
무언가 달라보였으나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마이 힘든가. 그렇게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잠들어 색색거리는 ㅇㅇ의 숨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저린 다리를 움켜 쥐고 조용히 오피스텔을 나갔다.
2.
"삼일이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지금 진위여부를 파악 중이라.. 가장 빠른 비행기는 네, 24일 9시 비행기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ㅇ, 아니에요. 그럴수도 있죠. 그럼 우선 그걸로 해주세요"
삼일이라니. 말도 안 통하고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곳에서 삼일이나 있어야 한다니,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니야? 나 혼자 비행기 처음 타봤어요. ㅇㅇ는 순간적으로 선글라스를 움켜 쥐었으나 이내 빠르게 손을 떼어냈다. 당장 나 어디서 자야 하는데, 이제 정말 리얼리티지 뭐야. 모든 방송은 전부 사기야 진심. 아 맞다 캐리어.
"저기 잠시만.. 캐리어가 바뀌었거든요. 그건, 그건 어떻게 해야 하죠?"
정말 일순간 거의 아무생각도 하지 않고 온 이 말도 안 돼는 여행을 후회했다. 그냥 처박혀 있을 껄, 아니 아니 그건 안 되는 일이지. ㅇㅇ는 공항 구석에 걸터 앉았다. 물론 즐겁자고 온 여행은 아니니까.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연락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이곳에 발이 묶여야 한다니, 숙소도 못 잡고.
근데 이 사람 언제 나타나는 거야 대체.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아니 지금 몇 시, 몇 시인 줄 알아요?"
-"죄송합니다. 바뀐 걸 지금 알아서, 20분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20분이요? 나 여기 여섯시간 있었는데? 아니 지금 이 사람이 장난하나. ㅇㅇ는 곧장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곧이어 끊긴 전화를 확인하고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오기만 해봐, 아주.
"죄송합니다. 늦어서"
"아니 어떻게 캐리어 바뀐 걸 이제 알 수 있어요? 지금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바로 회의가 있어서 방금 확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캐리어 이리 주시죠"
아, 회의. 회의면 그럴 수 있지.
ㅇㅇ는 그제서야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이고 끙끙대며 캐리어를 건넸다. 뭘 하길래 이렇게 무거워. 수트를 차려 입은 남자는 캐리어를 건네 받고 금방 돌아서 걸어 나갔다. 아저 싸가지. ㅇㅇ는 캐리어를 확인하고 앞서 걸어가는 남자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근데 내 지갑은? 죽을래 너?
"지갑은 왜 빼가시는데, 진짜 죽을래요?"
"뭐라고요?"
"지갑 내놓으라고요. 도벽있어요?"
내가 진짜 호구인 줄 아나. ㅇㅇ는 남자의 앞에 가로막고 서 당당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줘요, 내 지갑.
"지갑 잃어버렸어요?"
"네 그쪽이 잃어버리게 했구요. 내놔요, 어서"
"다른 건 더 없어요?"
"왜요. 더 가져갔어요? 아니 이런 도둑을 봤나"
"뭐 도둑?"
"그래! 도둑"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제 머리를 털었다. 지금까지 내 캐리어 가지고 있었잖아 당신. ㅇㅇ는 다시끔 펴보인 손바닥을 짚었다. 지금 꺼내면 용서해줄게요. 빨리 줘요. 그러나 남자는 퍽 다시 어이없다는듯 웃었다. 웃어, 지금? 와 미치고 환장하겠네.
"함부로 도둑이네 뭐네 넘겨 짚지 마요. 난 아니니까. 잃어버린 거 같은데 분실물 보관소 가서 확인하시고요"
"아 어딜가요. 지금?"
지갑 찾을 때까지 그쪽은 유력한 용의자에요. ㅇㅇ는 남자의 팔을 꼭 쥐고 당당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어이 없는 건 나거든? ㅇㅇ는 열이 올라 결국 선글라스를 재껴 벗었다. 키는 드럽게 커가지구. 여튼 따라와요 당장
"아니 훔쳤음 훔쳤다고 인정 하고 바로 주면 좀 좋아요?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나 아니라고 말했어요"
이 여자 뒷수습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거지? 남자는 넥타이를 끌러내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저기 가서 그렇게 말하시든가. ㅇㅇ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분실물 보관소를 찾아 헤멨다.
"이쪽이에요"
보다 못한 남자는 ㅇㅇ의 뒷목 언저리 옷자락을 잡아 오른쪽으로 돌려 세웠다. 고마, 아니 안 고마워요. ㅇㅇ는 남자를 퍽 올려다 보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갈색 브르쥬아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ㅇㅇㅇ가에요"
"네. 여기 있네요"
그게 왜 거기 있을까요.
"다른 분실물은 없으시죠?"
저를 분실해주시면 안 될까요.
ㅇㅇ는 양손으로 지갑을 받아들고 삐딱하게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나 이제 정말 어떡하지. 남자는 어디 한 번 변명을 해보라는듯 제스처를 취했다. 그나저나 이 남자 진짜 싸가지. ㅇㅇ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마땅히 둘러댈 핑계거리가 없었다. 뭘 어떡해, 빌어야지.
"정말 죄송해요. 아니 너무 흥분해서.."
"흥분해서?"
"..미안해요"
입이 문제야 입이. ㅇㅇ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남자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만해도 돼요. 볼 일 없으면 이만 가겠습니다"
"아, 네"
근데 나 어디로 가야해?
*
"..라면 먹을래요?"
"상관 없어요"
ㅇㅇ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캐리어에서 컵라면 두 개를 꺼냈다. 수트 자켓을 벗고 남자는 방을 둘러보더니 금방 커피포트를 찾아 개수대에서 물을 받았다. 아 나 진짜 어떡해. 이미 지갑을 찾은 뒤에는 열한 시였다. 당장 어딘가로 가기에 이미 시내로 향하는 버스는 끊겼고 혼자 돌아다녀봤자 숙소를 찾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
"받아요"
"뭔데요 이게"
"자꾸 보길래"
1993.12.9 강영현. 번호? 무슨 번호? ㅇㅇ는 곧장 대강 찢어 적은 종이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죄송한데 저, 제가 번호는"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드리는 거에요. 거기까지 앞서 착각하지 마시고"
외람 되는 말이지만 전 이제 저 창문으로 뛰어 내려도 되는 건가요. 당장 고개 박고 이불을 걷어차고 싶었다. 등신 ㅇㅇㅇ 등신 아, 제발. 영현은 금방 얼굴이 붉어지는 ㅇㅇ를 보고 약간의 웃음을 머금은 뒤 몸을 일으켰다.
"저, 제가 해도 되는데.."
"뜨거워요"
영현은 라면을 ㅇㅇ의 앞에 내려주고 젓가락을 건넸다. 아 괜히 먹자 했어, 라면. ㅇㅇ는 영현의 눈치를 보며 종이를 주머니에 넣지도 또 다시 건네지도 못한 채 주춤댔다. 난 뭐 어떻게 해야 해. 번호는 못 주는데,, 아니 근데 이 남자 집에 티비 없나? 그냥 모른 척 해주는 건가. ㅇㅇ는 그제야 자신의 곤란한 처지가 생각나 영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알아요?"
"네?"
"제가 그쪽을 어떻게 압니까"
아 모르는 거였구나. 아니 근데 진짜 몰라?
ㅇㅇ는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 다시 영현을 커다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집에 티비 없어요?"
"네"
"회사에도?"
"제 사무실엔 없습니다"
"뉴스는 봐요?"
"질문의 요점이 뭡니까?"
영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어이가 없는 대화였다, 아니 질문. 초면부터 도둑이니 뭐니 발길을 묶다가 지금은 자신을 모르느냐고 재촉하니. 대체 뭘 하는 여자길래. 영현은 라면의 면을 뒤적이며 ㅇㅇ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 모르겠는데.
"..아니에요"
못 알아본 게 아주 조금, 손톱만큼 아니 손바닥만큼? 어이가 없었다. 혹시 세상과 단절된 뭐 그런 생활 하는 건가? 검은 수트에 구두까지 신고 영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영현을 ㅇㅇ는 다시 한 번 힐끔 바라보았다. 나 막 마피아 그런 거에 잡혀 있는 건 아니겠지? 내일 일어났는데 뭐 콩팥 하나가 없다던가.
ㅇㅇ의 세상은 곧 시나리오와 대본 뿐이었다. 혹은 나를 이용해 먹기 위한 고도의 수를 쓰는 현실이거나. ㅇㅇ는 재빠르게 머릿 속에 그려지는 느와르 영화의 한 프레임에 얼굴이 점점 굳어져 나갔다.
"..혹시 막 조직 그런 거에요?"
"네?"
"저 이제 내일이면 여기에 없고 어, 눈은 안대 같은 거 씌우고 그래 가지구.."
ㅇㅇ는 금방 머릿 속에 장황하게 떠오른 촬영 장면들을 생각하며 기어코 눈물이 차올랐다. 나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 타고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거야? 고작 잠수타고 그것도 경유지에서?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진짜에요? 그럼 저 나가도 되는 거에요..? 지금 도망가면, 아니 말 안 하고 나가야,"
"나갈 거면 라면 들고 나가요"
나 참 이 여자 대체 뭐야.
영현은 젓가락을 들자마자 한숨을 쉬며 벗어둔 자켓을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무슨 일 하는지까지 알 필요는 없었으니 꺼내지 않았으나 통 말도 안 돼는 일들로 몰고 가니. 영현은 명함을 꺼내 ㅇㅇ의 앞에 탁, 소리 나게 내려두곤 다시 젓가락을 쥐었다.
"펜으로 사람을 죽이진 않죠"
"..."
"구두로 머리를 내려 찍을 일도 없고"
ㅇㅇ는 영현이 내민 명험을 받아 읽고 당장 뛰쳐 나가고 싶었다. 그렇지 D.A에서 사람을 죽이진 않지. 모두가 생각하듯 디자인을 하고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고, 난 여기서 협찬을 세 번이나 받았고. 영현은 명함을 쥐고 퍽 말을 아끼는 ㅇㅇ를 무심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문 열어 줘요?"
"..미안해요"
"알면 됐고"
조용히 먹을게요. 그럼 좋고. ㅇㅇ는 명함과 종이를 가방 안에 고히 집어 넣고 그제야 면을 뒤적였다. 나 라면 정말 오랜만에 먹는데, 얼마만이지? 두세달 됐나. 사실 굉장히 맛있었다. 여기에 오기 직전까지 탄수화물을 끊었으니. 도운이 사다준 돈까스도 그대로 포장에 올려 놓고 왔으니. ㅇㅇ는 정신 없이 라면을 집었다.
"..더 줄까요?"
"네? 아, 아 네 안 드실거면.."
며칠 굶었나. 영현은 남긴 라면을 ㅇㅇ의 앞에 밀어주었다. 되게 잘먹네, 그는 셔츠를 걷고 시간을 확인했다. 삼일씩이 뭘 하고 지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출장이에요"
"..아,"
"그쪽은?"
저요? 아 저는, 어 그러니까. ㅇㅇ는 라면을 휘젓다 급하게 다음으로 이을 말을 고민했다. 여행? 여행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럼 어.. 친구가 여기 살아서? 아니 나 여기 삼일밖에 안 있을 건데.
"곤란하면 말 안 해도 됩니다"
"...그래도 돼요?"
"네"
수상하진 않으나 참 애매모호한 여자였다. 영현은 ㅇㅇ가 라면을 모두 먹을 때까지 턱을 괴고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흐린 날씨는 깊은 밤이 되며 구름을 감추었다.대신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보며 비엔나의 야경을 보던 차 커튼으로 끄트머리가 걸리자 그는 일어서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아니 저기, 커튼 열지마세요. 다시 닫아요, 당장"
별 다른 소동 없이 라면을 먹던 ㅇㅇ는 갑자기 달려가 거칠게 커튼을 닫았다. 아, 그러니까. ㅇㅇ는 영문도 모른 채 물러섰던 영현과 눈이 마주치고 제 눈가를 매만졌다.
"..., ....저 그러니까"
"그냥 습관 같은 거네요"
"네?"
"마저 먹어요. 전 그만 가볼게요"
내가 아무렇지 않아요?
머뭇거리며 자책을 하는 ㅇㅇ를 보며 영현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듯,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켓을 집어 들었다. 마치 정말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뭐라고 해야 하지, 또 실수했네. ㅇㅇ는 영현에게 애써 설명하려 했으나 그는 한 켠에 밀어 두었던 캐리어를 들고 문을 열었다.
"호텔값은 라면을 할게요. 여행, 잘해요"
영현은 끝내 ㅇㅇ의 태도에 의문을 갖지 않은듯한 모양이었다. 아 망했어. 첫날부터 왕창 실수에, 이 호텔. 온 기력을 다해 인사만큼은 아무렇지 않은 연기를 했지만 영현이 문을 닫자마자 ㅇㅇ는 몸을 침대로 던졌다. 아 끝났어, 내 이미지. 아 내 인생.
3.
-누나 정말 어디 있어요
모자랑 마스크 없이 걷는 게 얼마만이지? 셀 수 있을까. 우선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눈 아프게 플래쉬 터질 일도 없어서 진짜 좋네. ㅇㅇ는 하루종일 돌아 다녔다.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는 걸었고 혼자 앉아 밥을 먹었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메뉴를 바로. 돌아가면 실장님한테 얻어 터지겠네 나.
"와,"
다시 이런 데 올 수 있으려나? ㅇㅇ는 이브닝 드레스 자락을 올려 쥐고 슈테판 성당으로 달려갔다. 아마 스케줄에 꽁꽁 묶여서 못 오겠지. 밤 9시가 넘어야 ㅇㅇ는 성당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약간 걸리는 건 혼자 걷고 혼자 밥 먹는게 자유로우니까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엄청 외로운 거네. ㅇㅇ는 인파에 섞여 걸으며 괜시리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미안 도운아, 나중에 연락할게. 조금만 더 있다가.
"어?"
그 남자다.
오늘도 역시 수트를 차려 입었다. 맞은 편 펍에서 나오는 영현을 보자마자 ㅇㅇ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안 보이나? 반가운 마음에 ㅇㅇ는 불이 바뀌자마자 횡단보도를 달려 건너 영현의 앞을 가로 막고 섰다.
"안녕"
"..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또 만나네요"
"그렇네요"
사실 아무 말이나 붙이고 싶었다. 한나절도 안 돼서 사람이 고팠나. 저를 올려다 보고 베시시 웃는 ㅇㅇ를 영현은 감흥 없이 내려다 보았다. 뭐 어쩌려고, 이제 또.
"같이 걸을래요?"
"어딜요?"
"어디든!"
나랑 왜요? 그냥요.
아니 엄청 외로웠다구요. 두 번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걸음 안 돼요? 이 사람 엄청 빡빡하네. ㅇㅇ는 영현의 손목을 쥐고 달렸다. 아 숨 차 잠깐만. ㅇㅇ는 영현을 데리고 한참을 달리다 다리의 외각으로 와서야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춤 추는 거 좋아해요?"
"아뇨. 그닥"
"같이 출래요?"
"아뇨"
거참 또 빡빡하게 구네. 어쩔 수 없고 그럼 난 출 거니까. ㅇㅇ는 영현을 세워두고 광장으로 달려갔다. 늦은 결혼식 피로연인지 웨딩 드레스를 입고 신부를 축하하는 무리 사이 서 가볍게 스탭을 밟으며 뛰어다니는 ㅇㅇ를 영현은 수트 자켓을 벗고 바라보았다.
"한 번 추지!"
"됐습니다"
진짜 재밌던데. 저기서 사탕도 줘요, 먹을래요? ㅇㅇ가 내민 영현은 감흥 없이 내려다 보았다. 정말, 뭐하는 여자지.
"아무거나 막 받아 먹는 거 안 합니다"
"축제잖아요"
"그게 뭐"
축제고 뭐고, 이렇게 뭐든 쉽게 쉽게 믿어버리는 ㅇㅇ가 신기했다. 딱 신기하기까지만. 영현은 그 외로도 음악이 나오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 다녀야 했다. 아 힘들어, 돌아가서 다시 헬스 끊던가 해야지. ㅇㅇ는 영현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꾸역꾸역 다리 위로 올라섰다.
"떨어져도 난 몰라요"
"누가 받아 달래요?"
차암 밥맛이야. ㅇㅇ는 강을 끼고 밤바람을 맞으며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이 남자는 이 절경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야경으로 둘러쌓인 도시가 아름답지도 않은 모양인지 종일 텁텁한 시선으로 따라 걷는 영현을 내려다 보던 ㅇㅇ는 중심을 잃고 앞뒤로 흔들렸다.
"이럴 줄 알았어"
"..난 몰랐거든요?"
"내려줘요?"
와 그대로 갈 뻔. 운동 신경 좋네 이 남자.
큰 사고로 이어질뻔 했던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낸 영현은 ㅇㅇ를 내려주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알고보면 스님일수도 있어 저 사람.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만 같은 모양새가 퍽도 신기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오니 점차 어두운 도시는 모두 귀가 중이었다. 상점의 불이 거의 꺼진 거리를 돌아오며 딱히 긴 대화가 오가진 않았으나 저도 모르게 편안한 분위기가 신기했다.
"아,"
마구 잡이로 집어 골라온 샌들이 결국 끊어지고야 말았다. 애초에 애정이 없었으니 그닥 아쉽진 않았지만, 나 어떻게 가 이제?
영현은 참 빠르게도 곁에 ㅇㅇ가 사라진 사실을 알아챘다. 한 블록을 전부 걸어가고 나서야 알아챈 영현은 급하게 ㅇㅇ에게로 돌아왔다.
"여기서 기다려요"
"어디가요. 여기 너무 깜, ..아니에요"
영현은 끊어진 샌들을 보고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 그냥 가도 되는데. 금방 움직임이 멎은 영현을 의구심으로 올려다 보았던 ㅇㅇ는 이내 몸이 붕 뜨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뭐하는,"
"이제 여기서 기다려요"
와 설명 좀. 사람을 막 안아 들었다 내려 줬으면 적어도 설명을 해줘야지. ㅇㅇ를 안아 보도를 가로 지른 뒤 셔터를 내리고 있는 상점 앞에 내려준 영현은 노파를 붙잡고 능숙한 타국어로 이야기를 했다. 물론 1도 못 알아들었지만. ㅇㅇ는 영현이 대화를 끝내기까지만을 기다려야 했다. 약간의 지루함을 가진 뒤 영현은 샌들 하나를 앞에 내려 놓고 능숙하게 ㅇㅇ의 신을 벗겼다.
"아마 맞을 거에요"
"이게 뭔데요?"
"샌들이요"
그걸 누가 몰라요. 이걸 왜 나한테, 아니 신겨주냐고요. 뭐가 문제냐는 표정의 영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엄청 차가웠으면서 또 뭐하는 거야. 이렇게 걷는 것도 어색했지만 방금 전 영현의 태도가 더 어색함을 돋구웠다.
"..고마웠어요"
"아, 네"
"저기 혹시"
물론 어이 없이 만났지만 이 애매모호한 감정의 끝은 봐야 하지 않을까. ㅇㅇ는 엘레베이터가 닫히기 전 영현을 붙잡았다. 그리고 얻은 것은
"내일 시간 돼요?"
"아뇨"
아. 이 남자 그냥 개 싸가지다. 라는 최종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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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현이의 정확한 직업은 구두 디자이너입니다.
미쳤다고 생각하고 아무생각 없이 썼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