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짧아서 포인트는 당연하게 걸지 않았습니다
유리구두 한 번 신어볼랍니까?
w. 랑데부
여기 추억은 여기에 두어야지. 내가 뭐라고.
7.
"..야"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공항에 도착했다. 혹시 몰라 모자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둘러매고 낑낑대며 게이트를 나온 몇 걸음은 누군가의 품에 멎어져야 했다. 윤도운
너 어떻게 왔어. 윤도운이었다. 감싸안고 어깨를 부르르 떠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너무 잘 알았다. 걱정 많이 했겠지. 혼날 각오 하고 왔어, 나.
"집 가요"
이 전개가 아닐텐데. 작가 양반, 혼낼 거면 미리 좀 혼내주지?
윤도운은 크게 언성을 높이기는 커녕 내 캐리어를 끌고 먼저 등을 돌렸다. 그냥 혼나는게 마음 편할 거 같은데. 지금 윤도운 아주 크게 빡쳐있는 거 같은데. 우선 뒤따랐다. 괜히 이래저래 타국에서 있었던 일까지 보고하면 아마 매니저를 때려 치우고 나갈 수도 있었으니.
"오피스텔 지금 기자들 깔려서 못 들어가요. 새 오피스텔 얻긴 했는데 누나 말은 들어봐야 할 거 같아서 올 때까지 그냥 있었어요"
"..."
"어떻게 할까요"
거긴 안전해? 그 사람이 나를 찾을 수 없을까. 묻고 싶었다. 그것보다 또 다시 감금 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스위스에서의 기억까지 내려두고 귀국한 거였지만 그래도 두려웠다. 그래서 있잖아, 도운아.
"며칠만 신세 좀 지면 안돼?"
"네?"
신세 좀 질게. 도운아.
*
"잠깐만 기다려요. 야야 윤고타!"
어깨가 들썩일정도로 놀라 얼굴까지 새빨갛게 올랐던 도운은 급하게 대문을 열자마자 ㅇㅇ의 품으로 뛰어 들어간 사모에드를 끌어 냈다. 야가 덩치는 남산만 해도 아직 삼개월 밖에 안 된 얼라라. 너 강아지 키웠어? 네. 딱 윤도운과 닮은 개였다. 마치 윤도운2 이런 느낌에 가까웠다. 도운은 입고 있던 롱패딩을 벗어 ㅇㅇ의 어깨에 덮어준 뒤 집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편한 자취 라이프였으니 집 안은 거의 초토화 상태였다. 망했는데 이거.
"너 이름은 고타야? 윤고타? 누나느은,"
"누나. 이제 들어와도 될 거 같아요"
넌 들어오지 말고. 도운이 고타를 간신히 떼어내고 문을 닫았다. 고타 귀여운데 왜. 윤도운을 따라 올라간 복층엔 매트리스와 폭신한 솜이불이 깔려 있었다. 아까부터 붉어진 얼굴은 언제쯤 돌아올 건지. 너 귀에서 피 날 거 같아. 옷은 여기에 두고 누나 필요한 건 제가 내일 가서 가져올게요. 적어주세요. 갑작스레 들이닥친 입장에서 도운은 ㅇㅇ가 불편하지 않게 세심하게 챙겼다.
"피곤할텐데 자요. 내일 얘기해요 누나"
"어? 어 그래"
"잘자요. 누나"
"저기 도운아"
뒷목을 긁적이며 내려가던 도운을 불러세운 ㅇㅇ는 잠시 머뭇대다 이내 입을 열었다.
"고마워"
"..예?...ㅇ, 아이에요"
"정말이야. 잘자 도운아"
부산스러웠던 집 안의 불이 꺼졌다. 정말 피곤한 모양이었는지 금새 ㅇㅇ의 새근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안방 문을 슬며시 닫은 도운은 문에 기대어 쏟아져 내렸다. 심장이 금방 뛰쳐 나올 것만 같았다. 붉게 열이 오른 것이 선연하게 느껴져왔다.
미치겠다 진짜.
8.
"안 비켜?"
"내일 스케줄 있어가 참,"
윤도운의 고개가 역동적으로 돌아갔다. 야 너 비켜, 나 괜찮으니까. 마음이 발치로 떨어졌다 올라오는 것도 모르는지 윤도운은 앞에서 좀처럼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큰 등에서 아무리 움직여보아도 틈을 내어주지 않다 다시 한 번 돌아가는 뺨에 결국 성질을 참아내지 못했다. 아니, 안 참은 거지.
"..너 또 다시 이런 일 만들면 아무리 너랑 오랫동안 봐 왔어도 소송 못 피해. 지금 네가 끼친 손해가 얼만지 알아?"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다시 부딪히면 나도 여기 않있어. 내가 여기에 덥썩 붙어 있는 거 아닌 거 알면서 내 매니저를 때려요? 당장 사장님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이 일 사과해요"
"뭐? ㅇ프로"
"때린 거 사과하라고"
"누나 가요. 실장님 가보겠습니다"
야 안 놔? 놔, 놓으라고. 도운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간 ㅇㅇ는 벤에 결국에 등 떠밀려 올라탔다. 내가 이런 일 겪고 가만히 있어야 돼? 너 우선 얼굴 좀 보자.
"..또 말려봐. 너 먼저 죽어"
"알아요"
"네가 왜 맞니? 내가 사고 친 걸"
한층 찡그린 표정으로 도운의 얼굴을 매만지는 ㅇㅇ에 도운은 작게 웃었다. 누나 맞을 곳이 어디있어요. 흘러내린 머리칼을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귀에 꽂아주는 윤도운을 빤히 보다 손을 쥐니 화들짝 놀라 또 얼굴에 불을 지폈다. 너 진짜 수전증이야?
"수전증이 심해지는데, 병원 안 갈래?"
"ㄱ,괜찮아요. 누나 집 가요 바로"
"응"
심해지면 꼭 병원 가. 네. 대답만 기어 들어가게 하지 말고 꼭 가.
*
메이크업 받는 게 어색하긴 또 처음이었다. 눈을 찡그리지 않게 연습을 해야 했고 몇 번이나 샵을 왔다갔다하며 워킹을 체크 받은 뒤에야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웬만한 스케줄은 거의 뺐는데 연말 패션 워크는 빼기가 힘들어서. 괜찮아, 나 잘못한 거 없잖아.
"차 대고 바로 연락 드릴게요"
"응"
차 문을 열자마자 눈 앞을 플래쉬로 잔뜩 새하얗게 터뜨리는 일에 긴장 됐던 마음과 상반 되게 익숙했다. 익숙하게 카펫 위를 걸었고 좌우측면으로 손을 올리고 플래쉬를 받아냈다.
"태도 논란에 대해 아직 공식 입장이 나오지 않았는데 한 말씀만 해주시겠습니까?"
"ㅇㅇㅇ다. 찍어 찍어"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끝내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 질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간신히 계단을 밟고 올라온 ㅇㅇ는 문이 닫히자마자 벽에 기대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괜찮아 잘했어 이정도면. 하지만 곧바로 이동해야 한다는 익숙한 안내에 따라 다시 한 번 가면을 썼다. 능숙하게 입가에 미소를 만들고 차분한 시선을 유지하며 셀럽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자리 중 한가운데 로 질러가 앉았다.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친한 사람도 없었다. 오랫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며 얻은 것이라곤 외로움이 전부였으니까. 근데 잠시만, 저 남자. 괜시리 무료함에 쇼가 시작 되기 전 이리저리 구경을 하던 찰나였다.
"집에 티비 없어요?"
"네"
"회사에도?"
"제 사무실엔 없습니다"
"뉴스는 봐요?"
"질문의 요점이 뭡니까"
"..강영, 헙"
"연예인이에요?"
"내가요? 설마, ...그렇게 보여요?"
좆됐다.
9.
"..ㅇㅇㅇ 아냐? 야, 진짜 예쁘긴 하다"
"지금 찍어도 되겠지?"
"진짜 배우긴 하네. 팀장님 저기 ㅇㅇㅇ 보셨어요? 예쁘죠"
그 여자 아닌가?
어깨가 오픈된 하얀 미니 드레스를 입고 어깨까지 자연스레 흘러 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긴 진주 귀걸이를 건 상대편 앞자리의 여자가 익숙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달랐다.
"왜요. 더 가져갔어요? 아니 이런 도둑을 봤나"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빚! 비, 빚 갚아야죠"
닮은 사람인가.
"미쳤다고 생각해요. 분위기 상 너무 신나서 그러는 거니까"
저 여자라고?
"지금 뭐 인성이니 태도니 논란 되고 있긴 한데 뭐 금방 잠식 될 거 같긴 해요. 이번 시즌부터 프로젝트 계약 하려 준비중인 배우입니다. 워낙 예쁘기도하지만 연기력이 미쳐서,그걸로 떴죠. 특히 오열씬이, 아역때부터 유명했어요"
"배우라고?"
"네. 꽤 잘나.. 아 팀장님 안 보시죠. 최근에 천만 찍은 영화 그.. 뭐더라. 아 <일러스트>! 여주인공이었어요. 뭐 그것 말고도 많지만. 팀장님 보셨죠?"
영현은 어느새 턱을 괴고 시작된 쇼에 집중하는 ㅇㅇ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표정의 여러 변화는 없었으나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눈동자가 스위스에서 만났던 그 여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계속 진행할까요?"
"어. 우선 진행해봐"
저 여자 나한테 좀 이상하게 작용하는 거 같으니까.
*
"ㅇㅇㅇ씨!"
"아, 안녕하세요. 기자님"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 잠적설 진짜야? 통 전화도 안 받고.. 나 좀 토라질뻔했잖아"
왜 전화를 안 받겠어요. 아니 그것보다 빨리 좀 놔주세요, 저 이렇게 걸려서 좆 돼고 싶지 않아요. 이왕이면 당장 빠져 나가고 싶은데. 태연하게 웃으며 대충 둘러댔지만 이렇게지체하면 여러모로 피곤했다. 무엇보다 저 남자가 말이라도 건다면, 어후.
"ㅇㅇ씨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일진 논란 피해자까지 나온 상태인데 할 말 없으신가요?"
"아, 또 시작이야"
일순간 실수인척 거세게 부딪힌 뒤 아무렇지 않은 듯 사과를 하고 지나가는 이의 욕설을 들었다. ㅇㅇㅇ 때문에 매번 난장판이야. 저 년은 시끄러움 알아서 기어 들어가 있던가 꾸역꾸역 얼굴 비추고 싶을까. 참아 저렇게라도 살아 남고 싶나 보지. 매번 저랬잖아.
숨 쉬고 싶었다. 욕심이었지만 그랬다. 모자란 숨을 내쉬고 싶었다. 겨우 가드의 도움으로 빠져 나온 ㅇㅇ는 벤에 올라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다 왔어요"
"..어 나 올라가서 쉴게"
도운은 내일 스케줄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더 이야기를 않는 게 좋았다. 곁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견뎌내며 속을 앓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참한 지옥이었다. 당장 가서 안아줄수도 위로를 하는 것도 그게 도움이 될까. 도운은 힘없이 가방을 내려 놓고 매트리스 위로 엎어지는 ㅇㅇ를 올려다 보다 제 머리를 털고 이내 욕실로 들어섰다.
"도운아 밥 시킬, ㅇ,엄마!"
"..어, 누나?"
"...응"
진짜 뜬금없게, 미안 도운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던 찰나 다행히 품에 안착한 것에 속이 가라앉아 그런 거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갑작스레 안긴 품에서 막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게 무슨 추한 모습일까. 근데 눈물이 안 멈춰. 도운아.
"힘들었구나"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도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ㅇㅇ의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금방 씻고 나와 도운의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기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가만히 ㅇㅇ를 토닥였다. 할 수 있는 선에서, 곁에서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아니 그니까 끅, 울려고 한게 어흑, 아니고.."
나 뭐하는 거야. 미안해. ㅇㅇ는 눈물을 급하게 문질러 닦으며 도운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도운은 잠시 천장으로 고개를 올려 숨을 차분히 내뱉고 천천히 ㅇㅇ를 끌안았다. ㅇㅇ의 울음의 피치가 올랐다. 괜찮아요. 진짜, 다.
"누나 괜찮아"
뒤에서 ㅇㅇ를 끌어 안은 도운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 있을게요.
할 수 있는 선에서, 곁에서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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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돌아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