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히비
제 불찰로 5~6화를 먼저 업로드해버렸습니다.부랴부랴 4화 업뎃합니다.
[04]
" ...너무 일찍 일어났나. "
어제 일요일,우현과 영화를 보고 두준을 만났던 다음날 월요일 아침이였다.눈을 뜨자마자 허리를 일으켜세워 본능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자 시곗바늘이 오전 5시를 가리키고있었다.평소보다 한시간은 일찍 일어나서 한시간정도의 여유는 있었다.오랜만에 여유롭게 준비하기 위해 옷이나 고르려고 들어간 누나방의 문을 닫은 성규가 방을 둘러보았다.고인이지만 딱히 짐을 치우지않아서인지 볼 게 많은 방이였다.
누나의 물건이 궁금해져 손을 뻗던 성규가 손을 꾹 쥐었다.이건 죽은 사람한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내 양심에도 찔렸다.생각을 떨치기 위해 서둘러 옷장을 열자 많은 옷이 보여왔다.분명히 제 방에도 한아름 가지고 옷장 맨 아랫칸에 쑤셔넣었는데도 불구하고 누나 옷장의 옷은 꽤나 많이 걸려있었다.
원피스를 꺼내서 누나 방 침대에 올려놓은 성규가 기지개를 켜다 무의식적으로 책장으로 걸어갔다.다른 앨범보다 훨씬 두꺼운 사진 앨범이 꽂혀져있었다.꺼내면 안될 거 같지만 너무나도 궁금한나머지 책장에서 앨범을 꺼낸 성규가 기침했다.
" 으,먼지 봐. "
오랜 시간동안 누군가의 손을 타보지않았다는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뿌연 먼지가 쌓여있었다.거실에서 휴지를 몇칸 뜯어와 앨범 표지 위를 미끄러지듯 닦아낸 성규가 바닥에 앉아 앨범을 펼쳤다.펼치자마자 보이는 누나의 애기 때 모습에 성규가 웃음을 지었다.
" 아,기억난다. "
누나랑 물놀이하는 사진,같이 공부하는 사진,놀이동산에 간 사진.수 없이도 찍힌 누나와 자신의 모습에 기분이 흐뭇하면서도 울적해진 성규가 코를 훌쩍였다.다음 장으로 한장 넘기자 앞에서 충분히 많이 보았던 웬 꼬맹이가 이젠 아예 한 페이지를 장악하고있었다.누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개구진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누구지.골똘히 생각하다 한장을 넘기자 더 이상 사진이 붙어있지않았다.남자 꼬맹이가 어딘가 모르게 거슬렸지만 이내 앨범을 푹 닫아버린 성규가 비어있는 공간에 조심스럽게 앨범을 꽂아넣었다.
*
" 블루 50장,피치 50장이요. "
" 밀크가 주문한거야? "
" 네.좀 있으면 품절될거같다고 재고 남겨달래요. "
" 그래,알았어. "
전화를 끝마치고 의자에 앉은 성규가 제 배를 쓰다듬었다.조금있으면 점심시간이다.오늘은 뭘 먹을지 고민하는 생각에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완벽하게 직장인이 되어버린 자신을 성규는 모르고있었다.울리는 전화에 자연스럽게 받자 우현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 성유야.
" 왜? "
- 두준이가 술먹자고 너 소개시켜달라는데 갈 수 있어?
" 두준? "
아,일요일의 그 사람이구나.직감으론 가선 안될 느낌이 와닿았다.하지만 호기심은 이성을 이기지 못하였다.누나와 어떤 사이였을지 궁금해서 기어코 고개를 끄덕이며 성규가 대답했다.응,나 갈게.고맙다는 우현의 음성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누나와 무슨 사이였길래 나한테 인사를 한걸까.쓰러지듯 늘어지며 눈을 감은 성규가 울리는 전화벨에 배고픈 배를 잡고 입을 열었다.네,모두의 도매입니다.
" 성유야,이제 점심 먹을까? "
" 아,네네.그러면 지금 그걸로 주문하시는거죠? "
대강 고개를 끄덕인 성규가 수화기를 손에서 내려놓았다.의자에 앉아 시계를 흘긋 쳐다본 성규가 잠시 불안한 듯 다리를 살짝 흔들었다.티가 날까봐 아주 미세하게 흔드는 다리를 성규가 바라보았다.얼마나 불안하면 나도모르게 이럴지는 몰랐다.
" 왜 그래? "
" 아니,그냥 좀... "
" 빨리 먹자. "
나무젓가락을 꺼내 힘을 주어 갈랐다.평소같았으면 깔끔하게 떼어질텐데 오늘따라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게 뜯어졌다.불안한 기운은 더더욱 가시지않는다.밥을 한 젓가락,입에 넣으며 밖을 내다보자 익숙한 얼굴이 있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갑자기 왜 그러냐는 사장의 말에도 성규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고작 어깨까지밖에 오지않는 중간 길이의 머리카락이였지만 성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얼굴을 가렸다.
입에있는 밥을 씹은건지 삼킨건지 분간도 가지않을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가게쪽으로 들어오려는 모습을 보고선 주위에 있는 모자를 눌러쓴 성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성유야? "
" 사장님,저 잠시만 창고 들어가있을테니까 저 손님이 들어왔다가 밖으로 나가시면 그때 저 불러주세요. "
" 김성유,잠깐...! "
쾅,창고 문을 닫고 가쁜 숨을 내뱉은 성규가 미끄러지듯 문에 기대어 앉았다.문틈사이로 가게문을 열 때마다 들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숨이 멎은 듯 헉,소리를 낸 성규가 귀를 문에 바짝 가져다대었다.
" 사장님,아까 블루랑 피치 50장씩 주문한 밀크예요. "
" 아...그 쇼핑몰? "
" 네.주문이 좀 밀려서 빨리 받으려고 왔어요. "
" 기다려봐요,어서 갖다줄게요. "
발소리가 가까워졌다.서둘러 옆에있던 박스 옆에 달라붙어 몸을 웅크렸다.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자 성규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구석에 있던 봉지를 들어올린 사장을 보며 성규가 쥐 죽은 듯 그대로 굳었다.
밀크,이거 맞지? 물어보며 봉지를 들고 나간 사장을 바라본 성규가 무릎을 끌어안았다.다시금 문 앞으로 기어가 가만히 있자 나가는 종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몸에 힘이 쭉 빠져 성규가 숨을 내쉬었다.
" 성유야,그 사람 갔어.왜 그래? "
" 아...사장님,죄송해요. "
" 나는 괜찮은데 무슨 사이길래 그러는거야? "
" 음,그게...제 대학교 동창인데 별로 좋지않은 사이여서 얼굴 마주치면 껄끄러우니까..숨었어요. "
" 그런거였으면 말을하지! "
난 또 일하기 싫어서 창고로 기어들어간줄 알았잖아.농담을 하는 사장을 보며 억지로 웃어보인 성규가 땀이 흐르는 이마를 휴지로 닦아냈다.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면서 의자에 앉은 성규가 나무젓가락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4년전,누나가 23살의 대학생 막바지일 때.그리고 자신이 21살의 대학교 2학년이였을 때 처음으로 집에 놀러온 누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갑자기 집에 불쑥 놀러와서 과자를 먹으며 티비를 보던 성규를 깜짝 놀라게해 방으로 들어가게하고,누나와 같이 씻는다며 욕실용품을 챙겨 대중목욕탕에 간다고 했다면 말 다 한 것이였다.그만큼 누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심지어 누나의 장례식에도 왔었다.상복을 입고 쓰러질정도로 울어서 부은 눈을 가라앉히고있을 때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누나의 영정사진 앞에서 엎드려 한 없이 울고있던 여자였다.낯이 익다고 생각한 성규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집에 자주 놀러왔었던 누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걸 알아채자 그제서야 성규가 눈을 감았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만큼 친한 친구였기에 들키면 지금까지 노력했던게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당황하여 무작정 창고로 뛰어들어가긴했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도 충분히 위험했었다.
살아가면서 누나의 친구를 많이 만날 것 이다.알아채는 사람이 분명 있을것이고,우현과의 억지 연애도 언젠가는 들통나버려 끝날 수 있다.
" ... "
최대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성규가 마저 밥을 먹기 시작했다.서늘한 바람이 바깥에 불고있었다.
" 자기야,여기! "
" 어... "
새삼스럽게 무슨 자기야.살짝 웃은 성규가 손을 흔드는 우현에게로 다가갔다.테이블 위를 살펴보자 벌써 술을 시킨건지 맥주컵이 두개 놓여있었다.자연스럽게 우현의 옆자리를 앉던 참에 두준이 성규를 바라보았다.
" 김성유,안녕. "
흠칫,약간 주춤거린 성규가 억지로 웃으며 따라 인사했다.
" 안녕... "
" 자기 맥주도 시키자.여기 맥주 500cc 하나요! "
" 자기가 뭐야,남우현.안 어울려. "
그래도,이거 가끔 해주면 좋아했잖아.몸을 베베꼬며 애교를 부리는 덕에 약간은 기분이 풀려 웃자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윽,두준과 눈이 마주친 성규가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돌리고서 제 앞으로 밀어진 맥주를 들이켰다.
불편한 대화가 오갔다.물론 성규에게만 해당이였다.평소의 친한 친구처럼 잘 웃고 떠드는 둘을 보며 딱히 끼어들만한 주제가 나오지않자 원피스 자락을 꽉 쥔 성규가 땅콩을 집어먹었다.이로 느껴지는 땅콩을 있는 힘껏 씹었다.여자친구 하나 사귀어 본 적 없었고 여자가 되어본적은 없었지만,왜때문에 여자들이 남자친구 군대 얘기를 싫어하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도 군대 다녀왔어.마음 같아선 외치고싶었지만 누나의 평소 이미지는 힘도 많이 없는 편이여서 여군은 절대 무리였다.입 밖으로 튀어나올뻔한 군생활 이야기를 간신히 참은 성규가 우현을 바라보았다.옆에서 보니까 확실히 못생기진 않았네.감상 아닌 감상을 하고 있을 때에,우현이 고개를 돌렸다.
" 내 얼굴 보고있는거야? "
" 어...어? "
" 왜,맥주도 안 마시고 나만보고있잖아. "
" 아니거든. "
괜히 씩씩대며 맥주를 한모금 들이마시는 성규를 흐뭇하게 쳐다보며 볼에 뽀뽀를 한 우현이 깜짝 놀란 성규를 보며 웃었다.
" 뭐하는거야! "
" 뽀뽀하고싶어서. "
" 못하는 말은 없어요. "
볼을 만지작거리며 귀 끝이 약간 뜨거워지는걸 느낀 성규가 귀를 매만졌다.그러던 참에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을 본 우현이 입을 열었다.
" 나 거래처에서 전화와서 받고올게.윤두준이랑 얘기하고있어. "
응.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가게밖으로 나가는 우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어색해진 기류에 아무말도 꺼내지못하고서 안주만 먹어댔다.우현이 나가서 긴장은 조금 풀렸지만 딴에 애인이랍시고 없으니까 불안해죽겠는지 성규가 맥주만 홀짝거렸다.
턱을 괸 두준이 성규를 빤히 바라다보며 맥주를 입에 가져다대다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어색한 듯 자꾸만 흘깃 쳐다보는 시선을 모르진않았다.그저 모른 척 해주는거였다.이번 기회에 확인 사살이나 할까,두준이 입을 열었다.
" 김성규. "
성규의 행동이 멈췄다.사고회로가 정지하는 순간이였다.그런 그를보며 역시 맞았네,중얼거린 두준이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기 바빴다.한편 성규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였다.어떻게 안 걸까,설마 날 알고있었을까?낮부터 불안한 느낌이 약간씩 가까워지고있었다.
" 너 김성유 아니지,김성규지? "
콜록.순간적으로 사레가 들린 성규가 얼굴이 약간 빨개진 채 기침을 내뱉었다.머릿속이 온통 혼란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있었다.팔을 뻗어 성규의 등을 토닥여주는 두준의 손길을 뿌리치고선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 아닌데.여기서 내 동생 얘긴 갑자기 왜 꺼내. "
" 너가 그 동생이니까. "
" 무슨소리야,우리 성규 얘기 꺼내는 이유 모르겠다. "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깜빡 속아넘어갈뻔한 두준이 팔목을 조금은 세게 움켜쥐었다.으르렁거리는 얼굴이 협박적이여서 성규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 김성규. "
눈을 크게 뜬 성규가 당황하였다.두준이 아랑곳않고서 말을 이어갔다.
" 아닌 척 하지마라,성규야. "
팔목을 잡고있던 덕분인지 성규가 움찔거리는게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져왔다.결국 패한 성규가 울상을 짓다가 두준을 흘기며 말했다.
" 팔 놔. "
" 알았어. "
흔쾌히 팔을 놓은 두준이 턱을 괴고 생글생글 웃었다.한숨쉬는 소리가 귓가로 박혀들어왔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입을 연 성규가 다시한번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아무렇지도않다는 듯 두준은 그저 맥주도 간간히 입에 담아가며 웃었다.능구렁이보다 더한 놈이라고 생각이 들자 저절로 몸이 뒤로 빼졌다.의자에 완전히 기대어 그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 어떻게 알았어? "
" 넌 그냥 뭔가 다른 것 같아서. "
" 뭐? "
" 그리고, "
갑자기 일어나 몸을 앞으로 숙여 거리가 가까워진 두준에 성규가 주춤했다.손을 뻗어 성규의 목 뒤쪽의 조그만 점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두준이 말했다.
" 네 누나는 이 점이 없었어. "
" ... "
제 목을 매만지며 잠시 멍을 때리던 성규가 아직도 의심스러운 마음에 경계의 끈을 놓지않고 두준을 노려보았다.입이 바싹 탈수록 맥주의 양은 점점 줄어들고 미소는 점점 굳어가고있었다.낮에 느낀 불안한 기운이 자신을 정확히 관통했다.통화를 끝마치고 가게로 들어온 우현이 아무말도 없이 두준을 노려보는 성규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싸웠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기도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준이 손목시계를 보며 가보겠다고 말하였다.성규도 따라 우현의 옷자락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 우리도 내일 둘 다 출근해야되니까 이제 집 들어가자.늦었어. "
" 그래.데려다줄게. "
" 미안해... "
나 가볼게.먼저 가게를 나서는 두준을보며 성규가 우현을 올려다보았다.너는 왜 저런 놈이랑 친구야,씨벌탱아.속으로 잘근잘근 우현과 두준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시원한 바람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안자 기분이 조금은 묘했다.말 없이 길을 걸으며 간간히 고개를 들어 겨우 몇 개 떠있는 별을 바라보며 걸어다가 성규가 제 운동화를 보았다.
" 우현아,잠깐만.나 신발끈 좀. "
" 내가 묶어줄게.원피스 입었잖아. "
아무 돌계단 위에 발을 올려놓은 성규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굽혀 흰 끈을 잡아 단단히 묶는 우현의 얼굴이 제법 남자다웠다.고마워,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끈을 다 묶고서 고개를 들어 웃는 모습에 뒷목을 매만지며 따라 웃었다.
걷다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하자 성규가 우현의 손을 놓았다.잘 가.
" 응,잘 자. "
" 너도. "
인사를 끝으로 집에 들어와 조용히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가방을 침대 위에 던지고 안기듯 쓰러진 성규가 몸을 일으켜세워 옷을 벗어던졌다.잠옷을 집어들다가 두준이 생각난 성규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머리가 아파왔다.쓰린 속은 한번 요동 친 뒤로 다시 통 괜찮아지질않았고,나 또한 누나의 모습으로 괜찮지않았다.
암호명 - 남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