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두 한 번 신어볼랍니까?
w. 랑데부
4.
"나 못 탄다니까"
"알려줄게. 사이즈 몇이라고?"
"230"
근데 이런 데도 너랑 와야 해? 내가 뭐 어때서. 그래 솔로끼리 반갑게 타자, 반갑게.
캐나다에서 자주 타본 영현과 달리 ㅇㅇ는 제대로 타본 기억이 거의 없는 스케이팅이었다. 내가 해줄게, 줘봐. 영현은 ㅇㅇ의 앞에 무릎을 꿇어 앉아 스케이트를 신겨 주었다. 끈이 풀리지 않도록 꼭 메준 영현은 ㅇㅇ를 올려다 보았다 이내 몸을 일으켰다.
"춥다"
"야 너는,"
"나는 별로 안 추워"
두르고 있던 하얀 목도리를 꽁꽁 둘러준 영현은 웃으며 ㅇㅇ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까?
근데 이거 사람이 탈 수 어어어. 괜찮아, 잡았어 잡았어.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가 좀 더 잘 탈 것 같았다.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는 ㅇㅇ는 영현에게 미안했다. 앞에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타고 싶을텐데.
"나 쉬고 있을테니까 너 타고 와"
"아니야. 너 잘하고 있어, 금방 탈 거 같은데?"
너 눈이 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다시 한 번 보고 생각해봐. 이 걸음이? ㅇㅇ는 영현을 못 미더운 시선으로 올려다 보았지만 영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ㅇㅇ의 손을 쥐었다. 다행일까 영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삼십분을 낑낑대고 나니 그나마 조금 속도를 올릴 수 있게 된 ㅇㅇ의 얼굴엔 금방 함박미소가 피어났다. 근데 이거 멈추는건, 어어 엄마.
"..괜찮아?"
안긴 것도 안은 것도 아니었다. 엉겹결에 영현의 가슴팍에 퍽 들어간 ㅇㅇ는 차마 영현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 너한테 안긴 이 상황에 내가 설레서. 그러니까 내 가슴이 막 뛰는 거 같아서.
*
"ㅇㅇ야"
"어?"
"왜 그렇게 조용해"
내가?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조용했어. 영현과 스치는 손가락이 어색해서 크리스마스 이브라 쏟아져 나오는 커플들 사이에서 네가 자꾸 남자친구처럼 굴었으니까. ㅇㅇ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렸다. 그렇다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
저녁을 먹을 때도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말수가 적어진 ㅇㅇ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영현은 ㅇㅇ의 입가에 엄지를 꾹 눌렀다.
"상처나"
"..응?"
"깨물면 상처난다고"
어? 어어. ㅇㅇ는 영현의 손가락을 쥐어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감정은 나만 갖고 있는 걸까. 영현은 몰래 빼꼼 올려다 보았으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다. 근데 진짜 춥네,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손가락이 얼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그때 주머니 속으로 들어온 것은 따뜻한 손이었다. 차마 깍지를 낄 용기까진 없었던 영현의 손이었다.
"..저기 나 할 말 있는데"
"어? ㅇ, 어 해"
"저기 좀 앉아 있다 가자"
영현에게 붙잡힌 손에 정신이 팔려 아무렇게나 끄덕였다. 집 앞 벤치에 앉아 영현은 한참 입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토록 오랫동안 끌어내는 걸까.
"야 무슨 말 하려고 이렇게 끌어. 너 어디..,"
"너 좋아해"
"응?"
너 좋아한다고.
5.
아 일어나기 싫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일어나 참 기분이 거지 같았다. 아주 많이. 어젯밤 잠을 설쳐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박제형 이 새끼는 언제부터 약속을 철저히도 지켰다고 전화질이야. ㅇㅇ는 눈을 반쯤 뜬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 칫솔을 물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나, 쓰레기 버려야 하네. 거품을 뱉지도 못하고 ㅇㅇ는 대충 가디건을 걸쳐 입은 뒤 문을 열었다.
"..어"
동시에 열린 문을 생각치도 못하고 말이다. 영현 역시 쓰레기봉투를 든 채 문을 열었다 마주친 ㅇㅇ에 잠시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들어가서 마저 양치해"
..ㄴ,내가 버려도 되는데.
영현은 ㅇㅇ가 들고 있던 봉투를 가져가 계단으로 향했다. 고백을 거절하고 찾아온 이 어색한 관계를 어떻게 돌려 놓아야 하는지, ㅇㅇ는 알지 못했기에 입에서 튀어나오는대로 영현을 불렀다. 저기 강영현,
"응?"
"...영화 볼래?"
"아니"
하씨 어떻게 해야 돼. 이제.
*
"..야 강영현"
"어, 왜?"
"...크리스마스 이븐데, 뭐해?"
"별로 계획 없어"
영현은 아무렇지 않은 대답과 함께 ㅇㅇ의 앞머리에 붙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사소한 행동이 사소하지 않게 느껴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 시켜야 하는 지도 모르는데. 아 복잡해.
"나랑, 같이 있을래?"
"마음대로 해"
진짜 마음대로 해서 치킨 하나 시켜놓고 영현의 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불을 전부 꺼놓고 영화나 한 편 틀어두고 마시는 맥주가 이렇게 불편하다니. 아 나 진짜 모르겠다. ㅇㅇ는 습관적으로 영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댔다. 몰라, 모른다고. 영현은 잠시 이게 뭔가 고민했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야"
"..ㅁ,뭐"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
"내가"
ㅇㅇ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이런 말을 했는지 영현도 자신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게 팩트였다.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ㅇㅇ의 진심이 궁금했다고 하면 그게 비슷한 의도가 될까.
"먼저 간다"
강영현 등신.
6.
"너는 어떤데"
"응?"
"브라이언 말대로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거 아냐. 내가 뭘 알아. 아니 너
"브라이언 만나고 너 맨날 나한테 브라이언 얘기만 했어"
"내가 무슨,"
"난 그걸로 충분하다고 보는데"
눈 온다, 야. 지금이야말로 미안하다고 붙잡을 최적의 날 아니냐.
*
제형은 참 맞는 말만 골라 했다. 관계를 돌이킬 수 없어도, 제형의 말대로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정답인 거였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뉴스는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폭설을 아름답게 포장했다. 그게 포장이든 아니든, ㅇㅇ에겐 그저 아름다움이였다. 야 강영현! 너 집에 있지, 강영현!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영현의 집 문을 두들겼다. 무슨 말을 하며 널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 정리조차 되지 않은 채로.
"너 왜 뛰어,"
발 뒷꿈치를 한껏 올리고 목을 끌어 안으며 영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뒤로 중심이 밀리며, ㅇㅇ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휘둥그레졌던 두 눈이 이내 아득히 감겼다. 영현의 큰 손이 ㅇㅇ의 뒷통수를 감쌌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깊은 입맞춤 이후에 영현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원래 솔직하게 마음을 이야기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영현과 눈을 단 삼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ㅇㅇ에게 더 숙여 다가온 영현은 ㅇㅇ와 눈을 맞추기 위해 지나친 장난을 걸었다. 내 눈 봐봐. 아 싫어. 왜 싫어? 그냥 싫어. 영현은 ㅇㅇ의 이마에 이마를 맞추고 따뜻하게 웃었다.
"안 해도 돼"
"..."
"다 알아"
그 말을 끝으로 영현은 ㅇㅇ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동시에 상체를 숙여 현관문을 닫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으로 보낸 크리스마스였다.
7.
"야"
"야아..."
"눈 뜨자. 눈"
눈이고 뭐고, 너 진짜 주겨버릴거야.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ㅇㅇ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가 앞집에 위치한 영현의 집 문을 콩콩 두들겼다. 약 2분 정도 후 까치집을 열심히 지은 영현이 문을 열었다. 영현이 문을 열자마자 ㅇㅇ는 오들오들 떨며 부볐던 양 팔을 영현의 허리에 두르고 영현의 가슴팍에 제 고개를 쿵쿵 찧으며 아침부터 시위를 벌였다.
"잠 못 잤어?"
"너 주겨버릴거야.."
"우선 문부터 닫자"
감기 걸려. 안 걸려 이 몹쓸 놈아.
영현은 마구 얼굴을 부비며 시위하는 ㅇㅇ를 끌어 안아 들고 현관문을 닫았다. 눈도 못 뜨고 죽인대. 2인용 소파 위에 앉혀 담요까지 덮어준 영현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살살 흐트러진 ㅇㅇ의 앞머리를 넘겨 주고 웃었다.
"내가 애나벨 보지 말자고 해써 안 해써"
"어젠 볼 수 있다며"
"그건 어제 얘기고.."
잠에서 깬 게 아니었는지 횡설수설이었다. 어젠 볼 수 있다던 공포영화를 새벽에 보고 통 잠을 자지 못했는지 유효 사정거리를 확인하지도 않고 팔을 휘둘렀다. 꿈에 그 인형이 쫓아와 세번이나 잡혔다는 게 꿈의 내용이었다. 영현은 ㅇㅇ의 잠투정에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이며 눈꼽을 떼주고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오른팔 왼팔 번갈이 끼워 주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오늘은?"
"네 집에서 잘 거야"
나 이제부터 잘 꺼니까 깨우면 아주 다 죽는 거야. 알겠지? 영현은 끝내 웃음이 터졌다. 이 길고 긴 잠투정의 결론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 말로 끝을 맺고 옆으로 풀쑥 누우려던 몸을 받쳐 안은 영현은 침실로 향했다.
"소파에서 자면 허리 아파"
"아 내려줘, 내려줘어.. 나 잘 꺼야"
"안 깨울게. 침대에서 자"
"누나 얼른 내려 놓는다아, 실시"
이럴때만 누나지? 응 누나야. 영현은 푹신한 침대 위에 ㅇㅇ를 내려주고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영현의 방향으로 반사적이게 몸을 틀어 영현을 끌어 안은 ㅇㅇ를 내려다 보곤 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푹 자"
"..아침 먹자고 깨우면 숟가락으로 때린다"
"알았다니까. 애야 아주"
누가 누구보고 애래. 너보고 애라고 했어, 왜.
ㅇㅇ의 등을 토닥이며 한참이나 대화의 핑퐁이 오가던 무렵 문득 ㅇㅇ의 대답이 끊어졌다. 그리곤 도롱거리는 숨소리와 완전히 영현에게 묻어버린 얼굴에 영현은 더 ㅇㅇ를 꼭 끌어 안았다.
*
"내가 스케치북이야?"
"가만히 좀 있어봐"
영현의 날개뼈 사이를 슥슥 지나는 펜은 금방 깔끔한 발레 슈즈형 구두를 그려 나갔다. 이미 상의를 탈의한 영현의 상반신에는 여러 도안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ㅇㅇ는 영현에게 두 번의 입맞춤을 주고 등짝을 얻어냈다. 연습이 중요하단 말이야 연습이. 타투 이스트가 꿈이었던 ㅇㅇ였기에 영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현이 좋아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채워진 몸을 훑어본 ㅇㅇ는 영현을 다시 뒤집었다.
"팔 줘봐"
"없어지면 리터칭하고 또 해야지. 맨날 해줘야지"
정성스러운 펜터치 끝엔 영현의 이니셜이 머물렀다. 오랫동안 고안해 그렸던 도안을 드디어 옮기자 ㅇㅇ는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영현을 마주하고 웃었다.
"안아줘"
"알았어"
영현은 ㅇㅇ를 두 팔 벌려 꽉 끌어 안았다. 전에도 그랬는데 너한테 좋은 향 나. 그래? 응. ㅇㅇ는 영현의 쇄골을 잘근 깨물고 베시시 웃었다. 그렇게 웃으면 봐줄 줄 알고 그런 거야?
"응"
"아니거든"
침대로 가자.
"..ㅇ, 아파 아파"
"아파? 미안해"
움직임을 멈추고 눈이 커다래진 영현이 귀여웠다. 너 평소엔 이런 얼굴 한 번 안 보여주다가 어? 그저 동갑내기 내지 오빠 같은 영현이 퍽 귀여워져 웃음을 터뜨리니 영현은 ㅇㅇ의 입술을 짧게 맞추며 입을 막았다. 움직여도 돼? 어? 어어.
"발 진짜 작다"
"아니거든?"
맞는 거 같은데. 영현은 ㅇㅇ의 발등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손바닥만해. 어떻게 내 발이 손바닥만 해? 과장도 정도껏 해. 알았어 알았어, 영현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던 이불을 끌어와 덮으며 ㅇㅇ를 이끌었다.
"...따뜻해"
"응"
"밖에 눈 와. 봐봐"
그렇네. 눈 내리네.
창 틀을 덮어가는 눈을 영현은 ㅇㅇ를 끌어 안고 바라보았다. 이 겨울이 영원했음 좋겠다. 너도 나에게서 영원했음 했다. 아니, 넌 영원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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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 어느 분이 영현이 취향 소나무라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영현이 취향 소나무.. (간파당함)
이제 차근차근 왜 이렇게도 따스했던 영현이에서 현재의 영현이가 되었는지 나올 때가 되었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