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 사장님
08
부제 : 처음처럼, 멀어지기.
"뭡니까."
"뭐가요."
어제 일요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세훈이 병원에 있다가 밤 늦게가 되서야 집에 들어가서는 오늘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을 했다.
어제 아침, 엄마의 연락에 마음이 급해서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오는 바람에 어제 하루 동안 도경수로부터 와있던 부재중 전화 16통도 오늘 카페에 도착해서야 확인했다.
뭘 이렇게나 많이 했는지, 또 한소리 듣겠네 싶으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댔던가. 나왔어요, 라는 평소 인사도 건너뛴 도경수는 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뭐냐고 물었다.
그래, 니 전화를 16통이나 씹은건 미안한데, 씹으려고 씹은건 아냐.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뭐가요, 했더니 도경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연락이 왜 이렇게 안돼요. 문자 한통 못합니까."
내 손에 들려진 내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면서 연락이 왜이렇게 안돼요, 도경수는 내가 본인 연락을 일부러 씹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사적으로 매일 연락하는 사이였는지는 몰라도 어제 도경수의 연락을 받았으면 또 피곤해졌을 일이 뻔했다. 번호를 바꾸던가 해야지.
"언제부터 저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죠?" 안그래도 세훈이때문에 예민한데다가 잠도 못잔 내가 나도 모르게 날이 선 질문을 뱉었다.
핸드폰에 두고 있던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도경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사적으로 연락 할 만큼 나눌 이야기가 있나요, 저희가."
계속 되는 내 말에 도경수의 표정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했다가 이내 화를 꾹꾹 누르고 있는 사람처럼 굳어졌다. 분위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이럴려고 그런게 아닌데. 이래저래 신경이 예민해지고 참아둔 짜증이 가득한 요즘, 도경수를 달래줄 여유도, 더이상 관계를 유지할 힘도 점점 바닥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죄송하지만 앞으로 하실 말씀은 지금처럼 카페에서...."
"아닙니다."
"....."
"그럴 일도 없겠네요, 앞으로는 무슨."
"....."
"지난번에도 그런 소리 하더니, 그 쪽은 아무래도 모든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이유가 필요한가 봅니다."
"....."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까 연락을 하지마라? 이거 선 긋는거 아닙니까."
"......아니, 저기."
"그 쪽은 처음부터 가까운 사이도 있나보네요, 전 연락을 하면서 가까워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
"애당초 가까워질 마음부터 없었다고 하면 편할 걸 서로 불편하게 됐네요. 갑니다."
"......아, 저."
되도록이면 사적인 대화는 이렇게 카페에서 하자고 말하려던 내 말이 보기좋게 끊겼다. 아닙니다, 단호하고도 침착해진 도경수의 목소리가 왠지모르게 떨렸다.
그럴일도 없겠네요. 앞으로는 무슨. 도경수의 헛웃음이 섞인 말이 들리던 이 때 부터였다, 초조해서 심장이 마구뛰기 시작하고, 불안해서 손톱을 안보이게 뜯기 시작한게.
그동안 도경수의 불만 가득한 표정, 짜증 섞인 표정,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표정 들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확실히 차갑고 무서워진 표정에 입술을 물었다.
내 말에 정이 있는대로 다 떨어진 듯한 도경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뱉어냈다. 도경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온 '그쪽' 이라는 말을 들을 때 부터 그의 감정을 알았다.
사적으로 연락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내 말이 그저 변명에 불과했음을 도경수의 논리로 이해했다. 그래, 연락을 하면서 친해지는거다, 원래.
곱씹을 수록 틀린 말이 하나 없는 그의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수습을 해야하는데, 어째 뭘 해도 소용이 없을 듯한 분위기에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떼면, 들을 생각이 없는 도경수가 정 없는 표정과 정 없는 말투로 정 없는 내용의 말을 뱉는 바람에 시도조차 못했다.
갑니다, 하며 쌩하니 가버린 도경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쿵- 하니 내려앉는다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도경수 사장님
벌써 일주일 째다. 도경수의 발 길이 끊기고, 그저 뜬 소문들로만 그의 소식을 확인한게 오늘로 일주일이 됐다. 전화를 걸어도 거는 족족 씹힐 뿐이었다.
처음엔 그렇게 가버린 도경수가 마음에 걸리면서도 연을 끝내 내심 시원한 기분도 없지않아 있었으나, 이젠 아니다. 시원하긴 개뿔, 찝찝해 죽겠다.
"너 그거 그리운거야, 찾아가든지 어쩌든지 해. 보고싶잖아. 왜 솔직하지 못해?" 언니의 단호한 조언에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기도 이젠 지쳤다.
내가 도경수를 보고싶어해? 그럴 이유는 없는 것 같지만 백번 천번 양보해서 일단은 그렇다고 치고, 찾아가긴 어딜 찾아가는가. 일개 알바생이 이 회사 사장실을.
아마 사전 허락이 없으면 도경수 얼굴은 무슨, 그 근처에 발도 못디딜게 뻔했다. 항상 보는 드라마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도경수씨. 전화 좀 받아주세요] [제가 죄송해요, 사과할게요.] 일방적인 내 문자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읽었는지 안읽었는지나 확인하게 카톡 친구 좀 해놓을걸.
이왕 킨 핸드폰으로 [도경수 애인 있네?] 어제 밤 늦게 날아온 은지의 카톡을 또 확인했다. 병신이, 보면 기분 안좋을거 뻔히 알면서 자꾸 보고있다.
안그래도 요즘 우리 카페 찾아오는 이 회사 사람들 하는 얘기 절반 이상이 도경수 애인 얘기라 스트레스 받아죽겠는데, 내 스스로 그 크기를 늘리고있다.
분한건지 어쩐건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카운터를 언니에게 잠시 맡기고 카페 창가 쪽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도경수가 항상 앉던 자리.
".....어?"
한참을 그러고 앉아서 얼마나 시간을 보낸건지. 창 밖을 구경하던 눈이 도경수 눈처럼 동그랗게 뜨이고, 입에서 멍청한 어? 소리가 또 나왔다.
방금 회사 입구 쪽으로 걸어간 사람.
"도경수씨!"
"....."
"도경수씨!! 잠깐만요!!!"
"......"
"경수씨!!!! 아, 좀!!!"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어느새 로비까지 들어와있는 도경수를 확인하고 얼른 뛰쳐나가 그를 쫓았다. 도경수씨, 우렁찬 내 부름에 도경수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우리가 이 곳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 처럼 그의 팔을 붙잡고, 헐떡이는 숨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를 다시 한번 불렀다.
"뭡니까." 평소의 물음과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입을 잠깐 다물었다가도 "얘기 좀 해요, 제발." 굳세어라, ΟΟΟ.
"따라와요." 여전히 내 눈은 마주치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앞장 서서 걷는 도경수의 뒤를 어정쩡하게 밟았다. 반가운 마음은 잠시, 완전히 딴 사람같아 무서웠다.
"시도때도 없이 연락 해대는 이유가 뭡니까."
"......"
"시작도 안했지만, 어쨌든 끝난거 아니였습니까. 사과 같은건 필요없는데."
비상구 쪽으로 들어와, 조용한 곳에서 울려퍼지는 도경수의 낮은 목소리가 오소소 소름을 돋게 했다. 연락을 해댔댄다, 내가. 끝났댄다, 우리가.
예민해진 감정에 실수로 기분 나쁜 말을 뱉어버린 건 물론 내 잘못이지만, 이렇게까지 멀어지고 틀어지고 싶어서 한 말은 절대 아니였다. 눈을 마주하기 힘들다.
"할 말 없어보이는데, 기다려줘야 하는 겁니까." 듣기에 거슬리는 말투와 표정으로 날 재촉해대는 도경수 때문에 도저히 무슨 말이 나오질 못했다.
내가 말 그렇게 한건 사과를 해야하고, 애인 있는 도경수가 나한테 찝쩍거린 행동에 대해선 사과를 받아야 했다.
좋아한다고 간접적인 표현이란 표현은 온갖 다해놓고, 이제와서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참, 곱 씹을 수록 화가나는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잖아. 지가 먼저 불쑥 다가와놓고 여친이 있질않나. 여친도 있으면서 내 태도에 화를 내질 않나. 내가 씨발 무슨 니 손의 장난감이냐? 응?
"도경수씨부터 사과하세요."
"뭘 말입니까."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괜한 저한테 관심 있는 척, 여러가지로 신경 쓰이게 한 부분이요."
"....."
"제가 또 아무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마음부터 열었으면 어쩔 뻔 했나요?"
"......"
"그동안 그 쪽을 피하고, 이유없이 멀리하면서 미안하게 생각했던 저를 후회해요. 아세요?"
"....."
"봐요, 당신같은 사람 잘 피했잖아요."
"....."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어 뒷골이 당기는 상황에 내리깔았던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새끼야, 사장이면 다야?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 애써 참기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긴 손톱으로 손바닥이 아프게 파이는 고통에 입술을 또 앙 물었다.
"다시는 아는 척 하지말아요. 시도때도 없이 연락 해댈 일도 없어요."
도경수 사장님
"후..."
저번주 일요일, 아버지가 또 나 모르게 잡아두신 미팅에 나가기 전, 양심 고백이라도 하려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걸었던 전화들이 무참히 씹혔었다.
덕분에 미팅 자리에서도 정신 한번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내내 핸드폰만 붙잡고 있다가 상대 여자에게 보기좋게 까였다. 뭐, 잘되자고 나간 자리도 아니었지만.
어찌됐던, 아버지 얼굴에 먹칠 한 꼴이나 다름없는 그 상황에서도 난 그저 그녀와의 연락이 닿기에만 급급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핸드폰도 뺏기고.
그러면서 못본 그녀의 부재중이 많기도 했나보다. 가만히 책상에 엎드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울긴 왜 울어, 바보같이.
'대신 오빠한테 이거 줄게.'
'......'
'괜찮아, 나 심심할 때 마다 가비 데리고 여기 자주 올 수 있어!'
'......'
'....아, 덥다. 땀 나. 얼른 가야겠다.'
'....안가면 안돼?'
'응 안돼, 대신 내가 그거 주잖아. 거기에는 뽀뽀해도 괜찮아.'
그 때도 넌 울음을 참으려고 주먹을 꽉 쥐고, 입술도 앙 물고. 그러다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려하면 땀이라며 부채질을 했었다.
동네에서 무서울 것 하나 없고, 잘못된건 잘못 됐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던 넌 우는 모습 보이기를 그렇게나 싫어했다.
가비, 지금까지 살아있긴 무리려나. 갑순이라는 촌스러운 강아지 이름을 고집하는 엄마와 합의 본게 순이를 뺀 갑이였다고. 그러다가 가비로 부른다고 그랬었다.
니가 주고 간 니 사진에다가 진짜 뽀뽀도 하고 그랬는데, 기억 할리가 없는 너가, 예전의 너와 다른게 없어서 더 슬펐다. 그거 고작 몇 살 때 일이라고 까먹어.
"....."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말아요, 아까 그 말이 귓 속에 울렸다. 어떻게 안해요, 내 근처에 있다는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아는 척을 안해요. 이마를 완전히 책상에 댔다.
한숨을 푹 쉬며 눈을 감았다. '나 이제 진짜 갈게, 오빠 엄마한테 그만 혼나고. 잘지내, 알았지?' 그 때 너가 떠났을 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넌 모른다.
다신 만날 수 없을거라며 난생 처음 엄마한테 대들기까지 하면서 울어제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는 기적과도 같은 기회앞에서 우린 또 멀어졌다.
괜히 글썽이는 눈물에 콧물을 훌쩍이며 "씨발" 책상을 주먹으로 쾅하고 내리쳤다.
우리의 처음 인연 그 때 처럼, 오늘 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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