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의 취미로는 부동산 투자, 포커, 주식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괴상한 취미 중 하나가 ‘클래식 음악 감상’이시다. 김민석은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예술 지향적인 인간인데, 문제는 그가 지향하는 그 예술이라는 범위가 지극히도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김민석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만 집착했다.
단지 내 생각일 뿐이지만 아마 그의 성장 배경이 그의 선호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재수 없지만 김민석은 날 때부터 금수저를 앙! 물고 태어난 케이스다. 김민석의 부모님은 큰 회사를 운영하고 계셨고, 그 회사는 장남인 김민석의 형이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넉넉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난 김민석은 아무런 걱정 없이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지금은 미국 유학 도중 박사 학위를 취득해 범죄 수사 계열에 몸을 담고 있지만 말이다. 향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현재 그의 직업인 프로 파일러는 그저 김민석의 취미 생활에 불과하다고 카더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으니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실제 장본인인 김민석의 말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각종 오페라나 음악회를 두루 섭렵하고 다녔더랬다. 물론, 그 자신도 악기 연주를 배웠던 전적이 있고.
문제는 김민석이 자신의 음악 취향을 우리에게도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김민석은 저가 여자 친구와 싸웠을 때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베토벤이 귀가 들리지 않는 시기 작곡한 곡으로, 베토벤의 절망과 두려움을 엿볼 수 있는 곡)를, 여자 친구와 화해했을 때는 비발디의 ‘사계 中 봄’을 주구장창 틀어 놓고는 했다.
덕분에 업무 상 하루 종일 그와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우리 팀원들은 업무 내내 클래식 음악을 강제 청취해야만 했다. 생각해 봐라. 일주일, 아니 하루 24시간 내내 같은 음악만 들어야 한다.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미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잠을 자지 못해 퀭한 상태의 루한이 오디오를 집어던짐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취향 참...”
일명 ‘오디오 사건’ 이후로 숙소에서는 더 이상의 음악 고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아직까지도 김민석의 개인 공간에서만큼은 클래식 음악이 무한 재생되고 있다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학교까지 바래다주겠노라며 나를 차에 태운 김민석은 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클래식 음악을 재생시켰다. 혀를 끌끌 차고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리자 조용히 운전에 집중하던 김민석은 입을 연다.
“내 취향이 뭐가 어떤데?”
“몰라서 물어요?”
“전혀 모르겠는데.”
역시 정상이 아니야.
“막, 어렸을 때도 클래식 좋아했어요?”
“응. 초등학생 때는 모차르트 음악 즐겨 들었어.”
초등학생이 모차르트라니..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초등학생이었길래 모차르트 음악을 즐겨 들어? 원래 그 나이에는 동요 듣지 않나? 멋쟁이 토마토라던가 산토끼라던가. 그 시기에는 동요 내지는 인기 있는 가요를 듣는 게 정상인데. 잠시 김민석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으나, 나는 곧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가요는 안 듣고?”
“내 취향 아니야.”
클래식도 제 취향 아닌데요.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투덜거림을 애써 꾹꾹 억누른 나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김민석에게 물었다.
“다른 노래는 없어요?”
“다른 거 들을래?”
“네.”
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김민석은 버튼을 꾹 눌러 다음 곡을 재생시켰다. 설마 다음 곡도 클래식이겠어? 반신반의하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고, 나는 곧 절망했다. 망할 스피커에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 재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김민석이 업무 중에 즐겨 들었던 곡이었다. 웬만해선 짜증을 내지 않는 김종대를 엄청난 성격 파탄자로 만들어 버린 동시에 루한을 불면증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침부터 선곡 한 번 죽여준다. 나는 괴로움에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 말이 딱 지금 내 꼴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곡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김민석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좋지?”
“아, 예... 참 좋네요.”
평소 클래식을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편인지라 김민석을 만나기 전에는 나도 만만치 않게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었다. MP3에 따로 폴더까지 만들어 둘 정도였달까. 아무리 클래식이 좋다고 한들, 한 노래만 수백 번을 듣는 것은 고문이 아닐 수가 없다. 김민석과 팀을 이룬 이후로 내 구형 MP3에서 클래식 폴더를 영영 찾아볼 수 없게 된 이유도 그와 같다.
김민석의 물음에 대충 대답한 내가 다시 창문에 머리를 쾅쾅 박자, 창문으로 비친 김민석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사실 김민석은 클래식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고문하는 것을 즐기는 것일지도..? 순간적으로 의심쩍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에이, 설마..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데.
* * *
이윽고 김민석은 학교 근처 외진 곳에 차를 멈춰 세웠다. ‘걷기 귀찮은데, 학교까지 안 가요?’ 내 물음에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내던 김민석은 답했다.
“괜히 눈에 띄면 안 좋으니까.”
괜히 눈에 띄어 좋을 일 없다는 그 한 마디로 나를 수긍시킨 김민석은 내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하긴, 김민석이 하는 행동에는 항상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가 따랐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외제차에서 전학생이 등장한다. 전교생에게 그처럼 씹기 좋은 껌이자 매력적인 가십거리는 없을 것이며, 온갖 억측이 난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첫날부터 괜한 괴소문에 휩싸일 나를 위한 김민석의 작은 배려였던 것이다. 좁은 골목에 차를 세운 김민석은 곧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읊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되도록 눈에 띄지 말아라. 그 성격 머리는 좀 고치는 게 어떻겠느냐‥. 나는 거듭 당부하는 김민석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건네받은 가방 속을 들여다보았다.
“김종인.”
“그게 뭔데요?”
“타깃 이름.”
“아.. 그 고딩 이름이 김종인이구나.”
“김종인은 나긋나긋한 여자를 좋아한대.”
나 연하는 별로 관심 없는데. 내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김민석은 살풋 웃으며 말한다.
“김종인한테 최대한 맞춰달라는 거지.”
“왜요?”
“둘이 친하게 지내야 정보를 캐내올 거 아니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괜히 우리 팀 브레인이겠어요? 팀장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옳아요. 가방을 뒤지던 내가 선망의 눈빛으로 김민석을 바라보자, 김민석은 머쓱한지 즉흥 환상곡에 맞추어 핸들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조심해. 들키지 말고.”
“응.”
“요즘 고등학생들이 더 무섭다던데, 괜히 맞고 다니지 말고.”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거 같아요?”
“때리고 다니겠지, 김여주는.”
알면 됐고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차에서 내렸다. 항상 여유롭던 사람이 오늘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은지, 김민석의 표정이 좋지 않다. 창문을 내린 김민석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신 내게 당부한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끝나고 전화해. 태우러 올게. 제 신형 핸드폰을 흔들며 말하는 김민석에게 손을 세차게 흔들어 주며 말했다. ‘오빠 잘 가!’ 내 오빠 소리에 마침내 굳었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른다.
곧 김민석이 차를 출발시켰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 또한 초조한 발걸음을 학교로 옮겼다. 내가 다닐 고등학교가 실업계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등교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이 느릿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타이트하게 줄인 교복에 염색이며 파마며, 가방은 어디 던져뒀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단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의 모습에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머리를 매만졌다. 검게 물든 머리카락이 내 손가락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김종대가 선물한 염색 스프레이는 꽤나 유용하게 쓰였지만 그 사용이 귀찮기 그지없었다. 학교 분위기가 이 정도일 줄 알았더라면 오늘 아침 내내 스프레이를 붙잡고 낑낑대는 수고는 덜었을 텐데‥.
내일도 그 고생을 또 해야 하는 걸까. 아예 검은색으로 염색을 해버려? 미쳤어? 이게 어떤 머린데, 염색은 절대 안 돼! 네버! 머리색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심각한 고찰을 하며 교문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전~학~생~?“
웬 또라이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는 거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팔을 비틀어 꺾었고, 또라이는 비명을 지르며 팔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은 교복에 밝은 갈색의 바가지 머리, 축 늘어진 눈매까지 꼭 새끼 강아지를 연상케 했다. 눈이 마주치자 생글 생글 웃는 녀석을 지나치려 했으나, 이번에는 울상을 지으며 내 발목을 쥐어 잡는다.
“전학생 너 너무해. 나는 그냥 교무실 알려주려고 그랬는데에!”
“누가 알려달래? 그리고 나 전학생 아닌데?”
“내가 너 처음 보는데?”
“그래서?”
“나 전교 회장인데! 나는 우리 학교 애들 거의 다 아는데!”
“......”
“머리 염색 안 한 애들은 손에 꼽을 수 있는데 너는 내 리스트에 없단 말이지? 고로 너는 상큼한 전학생!”
“......”
“맞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자신의 논리를 늘어놓는 전교 회장이라는 놈을 한심하게 바라보자 녀석은 금방 꺾인 팔이 아프다며 낑낑거리며 오른팔을 매만진다. ....나는 네 왼팔 꺾었거든 병신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의 명찰으로 시선을 돌렸고, 제 눈꼬리만큼이나 말 꼬리도 축축 늘어뜨리는 녀석의 명찰에는 '변백현'이라는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손 떼.”
손 떼라는 내 말에 변백현은 볼을 빵빵히 부풀리며 내 발목을 놓아준다. 그와 동시에 망설임 없이 녀석을 등지고 돌아서서 걷자, 내 뒤로는 녀석의 처량한 외침이 울려 퍼진다.
“갈 거야?”
변백현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안 그래도 몇 없는 학생들의 이목이 나와 변백현에게로 집중된다.
“나 안 일으켜줘?”
됐어. 내가 무슨 상관이야. 아까 김민석 말대로 조용히 지내자. 분명 변백현이랑 엮이면 순탄한 학교생활은 물 건너갈 거야. 엮이지 말자, 김여주. 괜히 엮이면 너만 피곤하지.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한 걸음 더 내딛자, 갑자기 변백현이 꽥 소리를 지른다.
“너 진짜 가?!”
진짜 가지 그럼 가짜로 가?
“나 울 거야!!!”
이제는 우는 시늉을 한다. 큥이 울 거야! 으엉엉! 결국 나는 온갖 쌩난리를 피우는 변백현을 처단하기 위해 다시 녀석에게로 향해야만 했다. 속으로 욕을 씹으며 흙바닥에 앉아 있는 변백현의 앞으로 다가가자, 변백현은 나를 멀뚱 멀뚱히 올려다본다. 뭐! 어쩌라고! 이 썩을 놈의 고딩아! 내가 가만히 그 시선을 받아내자, 변백현은 씩 웃으며 말한다.
“뭐 해? 일으켜 줘.”
“너.. 정말 가지가지 한다.”
한숨을 푹 쉬며 녀석에게 손을 내밀자, 녀석은 만족스러운지 개구지게 웃어 보이며 내 손을 꽉 붙잡는다. 변백현은 읏챠!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고 내 손을 깍지 껴 잡은 채로 밝게 묻는다.
“여주야. 그래서 교무실이 어디냐면,”
여주야, 여주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이름을 불러제끼는 변백현을 보며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이 망할 고딩아, 너 그거 아니? 내가 너보다 몇 년은 더 살았어. 이런 내 속을 알리가 없는 변백현은 내 손을 잡고 학교 건물로 이끈다. 순탄한 학교생활은 이미 엎어진 것 같으니, 뭐 아무렴 어떤가. 될 대로 되라지.
* * *
고맙게도 변백현이 나를 교무실까지 바래다주었고, 덕분에 나는 무사히 교무실에 도착해 내 담임을 맡은 여선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앞서 김민석이 전학 수속을 모두 마쳐 놓은 덕분에 따로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학교에서도 나를 평범한 19살의 여학생으로 알고 있는지, 여선생은 나와 함께 반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연신 내게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치밀한 김민석이 미리 손을 써둔 덕분에 나는 순조롭게 김종인과 같은 반에 배정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 많은 학생들 중 누가 김종인이냐는 것이다. 루한이 학교 홈페이지를 해킹해 학생 명부를 뒤져 보았으나 대체 누가 먼저 손을 써둔 것인지 김종인의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얼굴을 모르니 직접 하나하나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여주야, 자기소개할래?”
교탁 앞에서 멍하게 반 아이들을 둘러보던 나는, 귓가에 꽂히는 하이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눈을 바삐 움직이며 말했다.
“안녕 나는 김여주야.”
“......”
“집안 사정으로 어정쩡한 시기에 전학을 오게 됐어. 사실 같은 반에서 지낼 시간도 얼마 안 남았지만, 그래도 앞으로 잘 지내자.”
격식을 차린 건조한 박수갈채가 내게로 쏟아졌고 여선생은 내게 창가에 위치한 맨 뒷자리에 가 앉으라고 지시했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여선생은 곧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김종인의 이름이 불리기만을, 아직 누군지 모를 김종인이 답하기를 기다렸다.
“김종인.”
드디어 여선생의 입에서 내가 바라던 이름이 호명되었다. 자, 이제 도대체 누가 김종인인지 보자. 촉각을 곤두세우고 반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괜히 증폭되는 불안감에 손톱을 세워 책상을 탁탁탁 내리치는데, 여선생은 내 쪽을 흘끗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연다.
“또 학교 안 나왔네.”
“......”
“종인이랑 연락 닿는 사람?”
“......”
“없어?”
침묵을 가장한 무언의 긍정에 여선생은 내게 부탁한다.
“여주야, 짝 학교 나오면 바로 선생님한테 오라고 전해줘.”
“아... 네.”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여선생은 이내 다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탁, 탁탁탁, 탁! 일정한 속도로 책상을 내리치던 손가락을 거두어 김종인의 책상을 쓸었다. 손가락에는 뿌연 먼지가 옅게 묻어 나왔다. 후ㅡ, 바람을 불자 먼지가 흩어진다.
찾았다 김종인.
* * *
재미도 없고, 김종인도 없고.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바는 아니었으나 학교생활은 생각보다 더 무료하고 따분하기만 하다. 휑하게 비어 있는 운동장을 응시하던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명색이 고3인데 가만히 앉아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건 옳지 않다고, 말이다. 즉각 가방 속에서 수학 문제집을 꺼내 든 나는 샤프를 잡아들었다.
내게 있어 단순한 킬링 타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문제집은 내 생각 보다 푸는 재미가 쏠쏠했다. 수험생 시절에는 꼴도 보기 싫던 문제들이 지금은 왜 이리 고맙게 느껴지는지, 나를 무기력함에서 구원해 준 문제들을 천천히 풀어 나갔고, 시간은 해결한 문제 수와 비례하여 빠르게 흘렀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 소리가 울렸다. 반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삼삼오오 교실을 빠져나갔고, 혼자 남은 나도 급식이나 먹으러 가볼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고프다. 반을 나가려는 찰나,
“여주야, 오빠 왔다!”
오빠는 무슨, 고딩 주제에... 우리 반은 또 어떻게 안 건지 변백현이 씩 웃으며 능글맞게 말한다.
“자리는 어디야?”
“맨 뒤 창가.”
“김종인 옆이네?”
김종인을 알아?
“친구야?”
“아니?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김종인이랑?”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하길래 난 또 김종인이랑 친한 줄 알았다. 변백현에 대한 흥미가 식어버림과 동시에 더 이상의 대화는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가 될 것임을 깨달은 나는 문을 가로막고 선 변백현을 밀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장렬하게 실패! 변백현도 꼴에 남자라고 밀리지도 않는다.
“비켜. 나 밥 먹으러 갈 거야.”
“응. 너랑 밥 먹으러 온 거야.”
밥 먹으러 갈 거라는 내 말에 길을 비켜 주지는 못할망정 다정하게 팔짱을 껴 온다. 갑작스럽게 팔짱을 껴오는 변백현에 당황한 나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너랑 왜?”
“나 아니면 누구랑 먹게?”
“혼자 먹는 게 편해.”
“밥맛 떨어져.”
“...밥맛 안 떨,”
“따라와. 오빠가 왕따 구제해준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고딩의 패긴가.
* * *
김종인은 학교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실업계 고등학교라 야자는 무슨, 보충도 없다. 어린 것들 사이에서 어린 행세하려니 정말 이러다가 기 빨려 죽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상태에서 김민석의 차에 올라 즉흥 환상곡을 듣는다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몰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끝나면 전화하라는 김민석의 분부를 무시하고 휴대폰을 종료 시켰다. 내가 혼자 가겠다는데, 휴대폰도 꺼버린 마당에 내가 어딨는 줄 알고 찾아오겠어. 빵빵ㅡ! 비록 교문을 나서 얼마 걷지 않아 거세게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의해 내 반항은 시도도 해보기 전에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전화를 하랬지 휴대폰을 끄라고 한 적은 없는데.”
누가 볼세라 냉큼 차에 올라탔고, 김민석은 내가 차에 탑승하자마자 나를 흘겨보며 입을 연다. 그런데 또 김민석의 말들이 하는 족족 다 맞는 말이라, 딱히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겠다. 김민석은 곧 차를 출발시켰고, 나는 김민석에게 물었다.
“오빠는 한가해요? 마중 나올 시간이 있어?”
“아니. 빡빡해 죽겠는데 너 때문에 시간 내서 나오는 거야.”
아, 그렇구나. 얼마 전 여자 친구랑 깨졌다더니 김민석은 어째 더 매너남이 되어 돌아온 것 같다. 헤어졌다는 그 여자 엄청 후회하겠네. 가만히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 잘근 씹고 있었는데, 신호가 바뀐 탓에 차가 멈추어 섰다.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별안간 김민석이 내 눈앞으로 제 손을 뻗어 휙휙 흔든다. 그리고 그 특유의 무신경한 어투로 말을 툭 내뱉는다.
“멍 때리지 마. 얼굴 커진다.”
“넵.”
“안전벨트 매고.”
“넵.”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안전벨트를 매자, 그런 나를 쳐다보던 김민석은 옅게 웃는다. 안전벨트 하니까 김종대 생각나네. 지금쯤 뭐하고 있으려나.
“김종대랑 루한은 지금 뭐 해요?”
“종대는 연습실 들어갔고 루한은 겨울잠.”
“오빠는 뭐 해요?”
“뭐하긴, 개 같은 팀원들 뒷바라지.”
말을 마친 뒤, 차 내부에 위치한 수납장을 열어 한참을 뒤적이던 김민석은 이내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었다. 건네받은 것은 명함이었다. 두껍게 코팅 된 흰색 종이에 회색 글씨가 깊게 파여 프린팅되어 있는 명함.
- International lawyer KimㅡMin Seok / 국제 변호사 김민석
신호가 다시 바뀌었고, 운전대에 손을 올려 까딱이던 김민석은 다시 차를 모는데 집중했다.
암~호~닉~
성장통 / 양자리 / 핑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