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t, too much 06
말의 역할.
"너 나 좋아해?"
궁금하지만 외면하고 있던 질문. 굳이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었기에 삼가했던 말. 지금도 딱히 알고싶어 묻는 건 아니었지만, 태형이 그 아이의 말대로 내가 쓰레기라면 정말 나를 좋아해야 성립되는 말이니까. 나중에라도 작게나마 해명할 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건넨 질문이었다. 이기적이라고. 너무 그러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대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나를 위해서든 석진이를 위해서든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고민하게 될 테니.
"웬일로 그런 걸 물어봐."
"맞잖아,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상처받을 이유가 없는데."
"…."
"만약 그렇다면 태형이 말대로 관계를 바꿔야 할 테니까."
내 말을 가만히 듣고있던 석진이의 입에서 바람빠지는 소리가 났다. 본인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 둘 다 그런 게 중요한가, 라는 생각으로 4년을 함께 보냈으니까. 그 시간 속에는 악의가 있는 것도, 사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어쩌면 나는 여기서 석진이가 부정해주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태형이에게 직접적인 해명이 될 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에. 만약 네가 날 마음에 품고 있었다면, 서로의 애인이 생기고 헤어지길 반복할 때 진심으로 축하하고 위로해주지도 않았겠지. 다만 사람의 마음이란 건 무시할 게 못 되기 때문에,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정말 조금이라도 내가 놓친 게 있어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라면. 나는 널 위해 기꺼이 이 자리를 나오고자 할 것이다.
잠시 이어진 침묵 뒤로 석진이가 되물었다. 우리 신입생 때 이미 끝난 얘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 아이를 좀 화나게 한 모양이다. 이렇게 쓸데없는 걸 물어서 뭐 한다고. 괜히 머쓱해진 마음에 뺨을 긁적였다. 그치, 필요 없는 질문이긴 했지. 내가 너무 진지한 질문을 했나 봐. 그냥 나중에 태형이가 한번 더 물어보면, 정말 아니라고 대답해 주고 싶어서 네 동의를 구한 것뿐이야. 나는 어서 이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괜한 능청을 부렸다. 이불이나 깔자, 나 여기서 자게.
"관계가 바뀌길 원해서 묻는 거야?"
그렇다고 끊기지는 않았지만.
"뭐?"
"아니잖아."
우리가 왜 감정적인 부분을 건들지 않고 4년 가까이 같이 살아왔다고 생각해. 소파에 기댄 네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젖은 머리가 소파에 닿아 조금씩 젖어들어가는 게 보였다. 이전에 술을 마신 게 아직도 깨지 못한 건가. 묘하게 바뀐 분위기에 나는 적응하기가 어려워 헛기침을 했다. 결국 이 아이를 고민하게 만든 모양이다. 곧 천장에 박힌 눈동자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눈이 마주치자 허탈하게 웃는 모습. 어쩐지 입 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수수께끼만 풀어주면 되는 거지?"
눈을 계속 마주하고 있자니 속을 훤히 다 들킨 기분이다. 목에 둘러져 있던 수건이 빠져나갔다. 영화의 예고편을 보듯 중요한 대사는 나오지 않고 자꾸 이야기가 늘어지고 있었다. 그래, 그냥 대답 한 마디만 해 주면 끝나는 거야. 우리 둘 다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지. 그러니까 수수께끼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건데. 왜 대화는 끊기질 못할까. 장난이든 진심이든 아니라면 진작에 아니라고 대답했을 네가. 잠시 말을 않더니 곧 대답 대신 드라이기의 위치를 묻는다. 머리를 말려야겠다고. 4년 전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결국 그냥 또 넘어가는 거구나. 그럴 수 있지. 나는 드라이기가 방 안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몸을 일으킨 석진이 때문에 소파가 한 번 일렁였다. 아무래도 들을 수 없나 보다.
"아니라고 하자."
"…어?"
"내가 널 안 좋아한다고 하자고."
"듣고 싶었던 말이잖아."
낮게 깔린 목소리가 괜히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맞긴 맞는데, 말의 완성형이 이상하다.
"아니라고 하자…."
답은 구했는데,
정답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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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1:20
방학이라고 늘어지게 자는 게 일상이라 생각했었는데, 술을 마신 다음날은 썩 그렇지도 못하다는 걸 요즘은 매 순간 느끼며 살고 있는 듯 했다. 별로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일어나기가 이렇게 괴로운 걸 보면 말이다. 폭염 때문에 새벽에 깨고 나면 속이 울렁거리고, 겨우 냉수 한 컵을 들이킨 뒤에 도로 잠들면 그건 그거대로 아침에 일어나 내뱉는 게 습관이 됐다. 20대의 중반에 들어서서 그런가, 새내기 때는 제법 잘 마시고 숙취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거실에서 자서 몸이 적응을 못한 것일수도 있을 것 같다.
좀비마냥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소파에 걸터 앉으니 보이는 얼굴은 석진이의 동생이었다. 어쩐 이유에서인지 형은 안 보이고.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보리차를 친절하게 따라 건네주고 있었다. 아마도 제 형이 시킨 거겠지. 따뜻한지 김이 나는 잔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짜증이 난 듯 한 번 흔드는 태형이에 아 하며 얼른 받아들었다. 한참 정신이 멍했었는데. 더운 날씨지만 마시고 나니 그나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보니까 이 날씨에 나 빼고 형제 둘은 멀쩡히 일어나 아침까지 챙긴 것 같던데. 나만 이렇게 술에 약한건가 싶어 괜한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심지어 동생은 아직 집에 돌아가지도 않았네. 굉장히 불편하다.
"일어났으면 씻어. 형이 장 보고 오래."
"…무슨 장?"
"누나 해장할 거. 난 라면 해줬는데."
"…."
"짜증나."
무슨 일로 내 옆에 와서 앉나 했더니, 짜증은 난다면서 제 형이 시키는 건 착실하게 하고 전달까지 하는 게 영락없는 형제의 꼼꼼한 성격을 닮았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싫으면 그냥 골골대면서 앓게 두면 됐을 텐데. 보리차도 다시 따뜻하게 데워서 주고. 아직 온기가 남은 잔을 소파 옆 서랍에 올려놓고는 한 번 크게 기지개를 폈다. 그렇지. 형제 둘이서 라면 먹을 동안 나는 퍼질러 잤으니까, 지금이라도 나가서 먹을 걸 좀 사 와야겠지.
"태형이는 속 괜찮아?"
"누나보다는."
"그럼 사 와서 같이 점심 해 먹을까? 석진이는 어디 나갔어?"
"몰라, 잠깐 어디 다녀온대. 형이 돈 주고 갔는데. 뭐 먹고 싶어."
"글쎄, 나가봐야 알겠다. 같이 갈래?"
"더운데."
싫다는 거구나. 어제 오늘로 형제가 나를 무안하게 만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얘기가 덜 끝난 상태에서 마무리되는 바람에 한참을 잠 못자고 뒤척이다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는 동생이 내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이제보니 석진이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 남아서 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구나. 보나마나 억지로 깨우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겠지. 챙겨준 석진이나 말 잘 듣는 태형이나 고맙기는 한데, 이렇게 싫은 티를 낼 바에야 그냥 돈이랑 쪽지만 놓고 돌아가 주는 게 좀 더 고마웠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뭐, 늦게 일어나고, 폐를 끼친 건 어떻게 보면 내가 맞으니 나는 별 말 없이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어쩌면 이렇게 속이 불편한 건 집에 이상한 공기가 자꾸 돌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욕실에 들어와 몸에 찬물을 좀 맞고 나니 정신이 돌아오는 듯해 살 것 같았다. 계절이 그래도 여름임에 감사하는 순간이었다. 어제부터 태형이를 만난 이후로 자꾸 머리에 생각이 많아지는 바람에 영 편하게 있지를 못했으니까. 어제의 대화가 끝난 이후로 곧장 잠에 든 것도 아니었잖은가. 여러 번, 정말 몇 번이나 그 순간을 곱씹고 내가 다르게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다 잠에 들었다는 말이다. 차근차근 태형이가 날 미워하는 이유를 추측하고 정리해보며 말을 꺼내는 건 어땠을까. 결론만 급하게 얻지 않았음 어떻게 됐을까. 만약 그냥 힘들다면서 평소처럼 징징거리고 넘어갔으면 그래도 괜찮았을까. 어제 내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들이 썩 베스트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자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소파에서 일어난 석진이의 표정이 영 좋아보이질 못했으니까.
화가 난 거였는지, 아니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할 말이 없었던 건지. 물어볼 수 있다면 아침에라도 일어나서 물어보고 싶었는데.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 마냥 집을 나간 석진이 대신 그의 동생을 보고 있자니 마음은 더 불편해져만 갔다.
무엇보다 저 아이와 단 둘이 한 공간에 계속 있어야 한다니. 지금은 석진이한테 언제 오냐고 따로 연락해보기도 좀 그런데.
그냥 전부 내 업보인 거겠지. 거울에 비친 얼굴이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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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12:02
"지금 나갔다 올 건데. 간식도 사 올까?"
샤워를 마치고 대충 가디건 하나를 걸쳤다. TV앞에 앉아서 멍하니 화면에 시선을 꽂고있던 아이는 그러든가, 하며 무심하게 대답해 주었다. 달달한 걸 좋아했던 거 같은데. 머리끈을 찾으며 거실의 서랍을 뒤지고 있자니 뒤에서 태형이가 물었다. 뭐 찾아.
"머리끈, 더워서 묶고 나가려고 하는데."
"아까 어디서 봤는데. 방에 협탁."
"아, 고마워."
웬일로 친절하게 대답을 다 해주지. 정말 아침에 형한테 한 소리 듣기라도 한 건가. 짧게 감사인사를 하며 태형이를 돌아보는데, 언제 갈아입었는지 더운 날씨를 못 견디고 제 형의 반팔을 챙겨 입은 게 보였다. 맞다, 더위를 많이 타는 타입이었지. 어렸을 때도 고등학교 때 교복을 안 입고 체육복만 입고 다니며 등하교를 했던 게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에어컨 켜도 되는데, 남의 집이라 선뜻 건들지 못한 모양이다. 더 더워하기 전에 틀어주는 게 좋겠지. 거실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콘을 들고 에어컨을 켜준 뒤 태형이 손에 쥐어주었다. 편하게 있어. 나는 편하게 못 있지만. 받아드는 손이 이미 땀 범벅인 게 좀 더 빨리 나올 걸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보이는 손목의 작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타투했어?"
"아, 어. 그냥."
"우와, 되게 예쁘네. 글씨 적은 거야? 무슨 뜻이야?"
"그냥 거기 있는 거 보고 한 건데."
샘플도 있구나. 뜻밖의 근황을 알게 된 것 같다. 제 형과는 다르게 역시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은 걸까. 과하지도 않고 작게 새긴 문장이 눈에 들어와 나도 모르게 한참을 보고 있었다. 머리끈 찾으러 안 가냐는 질문이 들리고 나서야 놓아준 손목이 괜히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최근에 타투에 관심이 생겨서 그런가, 저렇게 작은 글씨라면 나도 하나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뾰족한 건 글쎄 무서워서 질색을 하는 게 난데. 아니나 다를까 타투같은 걸 싫어하는 줄 알았다는 태형이 말이 들리자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맞아. 잘 몰랐을 때는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 누가 하고 있는 걸 보니까 되게 예쁘고 섹시하더라고. 내 말에 좀 놀랐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태형이 제 손목을 한 번 훑어보며 대답했다. 칭찬인 걸 알았는지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유명한 사람한테 받은 거야. 아는 형 지인이래서."
"아 그래? 그, 뭐더라. 활동명 같은 거 유명한 사람이야?"
"엉, 말해도 누나는 모를 걸요."
"나도 좀 알거든. SNS에서 유명한 사람들 있잖아."
"꽤 많이 알아봤나보네. 친구 따라 갔어요?"
"…어떻게 알았어."
"누나 몸에는 타투 없는 것 같으니까. 있어, 실력 좋은 타투이스트."
간만에 이렇게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가는 것 같다. 이 아이랑 장난을 주고받은 지도 꽤 지난 것 같아 아쉽고 속상했었는데. 이런 작은 걸로도 다시 대화가 되는구나. 신나서 말을 잇는 태형이를 보고 있으니 아까까지의 불편한 공기가 좀 사라지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예전엔 자주 이러면서 놀고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앞으로 타투를 좀 더 알아볼 이유가 생긴 것 같다.
"그래서 누군데, 내가 알 수도 있잖아. 그 사람."
"모를 텐데."
"누군데?"
"고집은, 슈가라고 알아요?"
Tat, too much 06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