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금 걷고 숨 쉬는 사람들은 모두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가진 시간이 다르기도 하다.
또 그 시간을 거머쥔 사람들은 날 이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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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비 오는 날 먼지가 날 정도로 얻어 맞던 날. 처음으로 이 모든 현실에서 내 존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며 나 자신을 부정했다. 그렇게 쉴새없이 내 자신에게 사라지라 명하던 와중에 나에게 내리꽂히던 무차별적인 발길질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멈춰진 부모님, 그리고 멈춰진 세상이었다.
내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타임 스토머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부터 내 인생은 순탄해졌다. 학창 시절 만점을 받는 일은 수두룩했으며 세상은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은 깨져버렸다.
“왜 헤어지자는건데?”
아무리 시간을 멈추어 제 뜻대로 돌리려 해봐도 그녀와의 어긋남까진 멈출 수 없었다. 카페 안, 굳게 다문 입술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녀는 한참을 옴싹달싹 못하더니 이별의 선언을 내뱉었다. 최근들어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서 이미 난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아냐. 헤어지자. 나도 힘들었어.”
그렇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다급히 시간을 멈췄다. 소란스럽던 카페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리고돌아선 그녀를 보고 나 혼자만이 서 있을 뿐이다.시간과 함께 멈춰진 그녀는 내게 말을 걸지도, 내 손을 쓰다듬지도, 품에 안아주지도 못한 채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멈춤을 풀어도, 그녀는 계속 그러하리라.
1-홍정호(25,타임 스토머)
그렇게 난 그녀를 말끔히 떠나보냈다. 그녀에게서의 내 존재는 어떠하련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미 내 가슴에 새겨진 흔적들을 만든 주범들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궁상맞게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이나 먹다 옆에 앉은 취객과 시비가 붙어 주먹이 왔다 갔다하는 거친 싸움을 했었다. 애시당초 능력자인 저와 일반인의 싸움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거였다. 그 결과, 그 아저씨의 신고로 인해 저는 경찰서에 왔고. 이 와중에서도 시간을 멈춰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져야지 하며 생각했는데, 문제는 내 옆에 앉아 있던 형사였다.
2-형사 박지성(33,?)
“25살치곤 남들보다 오래 산 것 같군.”
“예?”
이름을 부르란 그의 말에 홍정호, 석자를 내뱉자 부르라는 나이에 스물 다섯살이요, 라 내뱉자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매서운 칼바람 새로 형사와 눈이 마주쳤다. 깊은 그 눈동자는 마치 날 탐색하는 듯 했다. 단순히 너 삭았어, 가 아닌 사뭇 진지하고 확신에 찬 듯한 그 말에 스스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멈추려던 손가락마저도. 그의 눈빛에서 새어 나오는 연륜과 위압감이 제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농담인데 뭘 그리 놀라나? 무안하게”
“아, 예….”
그 다음, 주소. 형사의 말에 몸을 굳히게 했던 긴장을 풀었다. 누가 농담을 저리 진지하게 하냐, 궁시렁대다 형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가 부르는 대로 타자를 치는 그의 손목을 내려다 보았다.…시계가 이상했다. 초침은 흘러가지만, 분침과 시침은 변함이 없었다.
고장난 시계인가? 하기엔 긁힌 자국도 없는, 아주 말끔한 새 시계였다. 형사씩이나 될 인물이 고장난 시계나 차고 다닐 인물도 못 될 것이었고.
불현듯 끼치는 소름에 시간을 멈추곤 문을 박차고 나오려 했다. 그런데.
“거, 어딜 도망가나?”
?!
…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은 멈춰져 있었다. 돌아가던 초침도, 형사가 뿌리는 종이조각들도.
있어서는 안 됐어야 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모든건 전과 다르지 않게 멈춰 있는데 나에게 농담을 던졌던 그 형사 하나만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는 거.
“나한텐 니 능력 안 통해.”
“…저기, 뭐예요?”
“너 타임 스토머지?”
그러곤 갑작스레 숨이 턱 막혔다. 형사는 날 벽에다가 밀어 목부근을 큰 악력으로 세게 짓누르고 있었다. 숨이 켁, 하고 막혀왔다. 막혀오는 숨에 흐릿한 시야 너머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려 파르르 손을 펼쳐봐도, 제가 멈춘 시간에 사람들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였다. 형사가 낮게 제 귀에 소근거린 것은.
“딱 보니 진작 죽었어야 할 놈인데.”
“…!”
“너구나, 사람들 죽여서 시간 훔친 놈.”
그의 눈동자가 매섭게 반짝였다. 오해를 한 것 같다 답을 하려는 제 목소리는 제 목을 짓누른 그의 손에 먹혀 잠식되어갈 뿐이었고, 정신은 혼미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