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쏟아지는 오후라지만 나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때로는 안개처럼 에워싸 내 모든 숨을 틀어 막았고 때로는 바다처럼 밀려와 발끝까지 나를 잠식했다.
그렇게 어둠과 하룻밤을 보내면 내게는 정적만이 남았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진공의 상태. 그리고 그 안에 누워있는 나.
폐부에 깊숙하게 파고드는 고요함을 뱉어내려 목에 핏대를 세워도 그것은 혈관에 스며들고 온 몸을 배회하며 목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나는 그렇게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몸뚱아리를 지탱하며.
약에 취한 것처럼 한참을 누워있다 보면 또 다시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밤이 찾아왔다.
밤은 너무나 깊었고 그 끝에는 어둠이 있었다.
끊어질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였다.
[오백] 수취인불명 01
W. 리플(Riffle)
-B
'불완전함'. 내 신발의 뒷축에 달라붙은 구질구질한 껌딱지. 꼬리표처럼 끊임없이 붙어다니는 그것은 내 손으로 잘라낼 수 없는 치명적인 흠이었다.
'흠'이라고 표현한다면 내 자신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지만. 아무리 비참하다고 해도 현실에서 맞닥뜨린 눈 앞의 광경처럼 비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불완전함으로 메꿔진 사람이었다. 빈틈을 메우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온종일 방안의 벽을 더듬거려야 했고 내 곁에 사람들을 손으로 느껴야 했다. 따뜻한 온기를, 뜨거운 숨을, 터질 것 같은 마음들을.
손으로 느낀다는 것. 모든 것을 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에게 있어 눈은 그저 볼품없는 장신구와도 같았기에, 내 눈은 손이 되었고 입이 되었고 안에 잠식해있는 모든 감각이 되었다. 세포들이 하나씩 숨을 쉬는 걸 알아차리고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할 때, '불완전함'을 혐오하는 내 자신을 마주한다.
공허한 두 눈으로 멍청하게 시선을 늘어뜨린 나를.
"백현씨 일어나세요"
먹먹해진 귓가를 파고드는 낯선 목소리에 나는 간헐적으로 손을 떨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아침이었다.
계절이 두 어번은 지나야 세뇌가 되어 무덤덤하게 눈을 뜰 수 있었기에 나는 치밀어오르는 불편함을 물과 함께 삼켰다.
깨울 때는 침대를 흔들지 말 것, 잠이 올 정도로 나른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것, 절대 언성을 높이지 말 것, 이름을 부를 때는 성을 붙이지 말 것, 스스로 일어나도록 옆에서 지켜봐줄 것… 갓난아기를 낳은 어머니들도 모성의 힘을 빌려 쉽게 할 수 없는 것들. 그렇게 온갖 제재를 받으면서도 나의 곁에 남는 사람들은 분명 둘 중 한 사람이었다.
변백현에게 동정심을 가졌거나 당장 하루 먹고 살 돈이 필요하거나.
불행하게도 오늘은, 계절이 한번도 채 지나지 않은 완연한 봄이었다.
새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안기려는 바람들이 얽히고 설켜 작게 부딪히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부유해진 공기에 나는 깊숙한 숨을 뱉어냈다.
유난히 길었던 밤이었다. 저 아래에서 부터 끌어올린 케케 묵은 날숨이 공기와 섞어들였다. 나의 숨이 끝없이 부서져 내렸다.
옷의 소매를 두번 접어올리고. 손을 완전히 뻗은 채 4초 동안 앞으로 천천히 밀면 창가의 틀이 있다. 창틀을 잡고 몸을 일으켜 바닥을 향해 발을 내딛이면 차가운 대리석에 깔린 부드러운 발덮개가 있고. 준비된 슬리퍼에 발을 끼워넣으면 내 옷을 정리해주는 손길이 느껴진다. 2층에 위치한 내 방으로 한달음에 와준 고마운 이의 손을 잡으면 아침식사가 준비되어있는 식탁에 도착하고. 그렇게 2층은 어둠이 짙게 깔릴 때까지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공간으로 남는다.
"아, 오늘 밥 맛있네요"
달그락거리는 밥그릇을 붙들어 뜨겁게 올라오는 열의 위치를 파악해 입가에 수저를 갖다대면 금방 지은 밥 냄새가 코 끝에 어른거린다.
조심스럽게 수저를 입 안으로 들이밀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입천장부터 녹진하게 밥알을 녹이는 작은 혀까지. 내 안의 모든 세포가 움직이며 낯선 이를 받아들인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몸으로 변한 탓인지 까다롭게 변한 입맛에 짜증을 낼 법도 했지만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아주머니는 그저, 맛있게 먹어 아들. 내 등을 두드릴 뿐이었다.
음식은 절대 맵지 않게, 적당히 식은 밥을 준비하고,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은 반찬을 숟가락 위에 얹어주는.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아침.
나의 불완전한 아침.
-K
무슨 봉사와 비슷한 류의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이름도, 나이도, 출신도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 하지만 그 대상자들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몸이 불편하거나 우리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정도. 같은 과 동기가 무작정 종이 쪼가리를 들이밀며 내 손에 펜을 쥐어주길래 장학금 신청인가 그런 건 줄 알았지. 그 종이를 좋다고 받아든 저도 감당할 수 없는 등록금에 미쳐 반쯤 정신을 놓은 참이었지만.
소설의 한 페이지를 베껴내야하나. 불퉁하게 올라온 기분에서 어떠한 미사여구도 끄집어낼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위로도 아닌, 뜬구름같은 공감의 한마디도 아닌. 저의 이야기를 풀어내라니. 어처구니 없는 사회자의 말에 헛한 웃음만 연신 튀어나왔다. 내 앞가림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름도 모를 누군가를 위해 편지를 쓴다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차라리 나 같은 불쌍한 사회 초년생을 위해서 위로나 해주지.
볼펜의 끝만 질겅질겅 씹어 물었다. 말랑말랑한 고무가 이에 짓이겨져 볼썽사나운 모양새가 되어도 그저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한다는 게 고작, 글 좀 쓴다는 후배들을 불러 모으는 것 뿐이었다.
아, 선배님…. 부름에 응하여 달려온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끙끙댔다. 발을 까닥거리며 팔베게를 하고 누워있는 나를 흘끔대며. 속으로 씹어댈 게 분명했지만 술 한잔이면 퉁칠 수 있을 터였다.
모서리가 잔뜩 구겨진 분홍색 편지지를 내게 조심스럽게 내밀며 저가 다시 불러세울까 뛰어가는 머릿통을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차댔다. 저래서 언제 선배 노릇을 하누.
입구를 봉한 편지봉투를 접수처에 밀어넣으며 나는 아무렇게나 글씨를 휘갈겨썼다. 자취방의 주소를 기입해넣으며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에 대한 일말의 괴리감도 맛볼 수 있었다. 참, 좋은 프로그램이구만. 나는 괜시리 민망해져 내려놓았던 가방을 둘러멨다. 워낙 글 잘 쓰는 놈들로 불렀으니까 내용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반토막난 내 봉사시간을 어림잡으며 손가락을 천천히 접었다. 이거 하는 것도 봉사로 쳐준다고 한 것 같은데. 잔뜩 좁혀진 미간을 타고 짜증스러움이 흘러내렸다.
오래된 강의실이라 신발이 달라붙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쩍쩍거리는 소리가 건물 전체로 메아리쳤다. 저 혼자가 만들어내는 소음이 여러개가 모인 것보다 더한 듯 싶었다.
손에 찐득한 왁스를 묻혀가며 애써 세워놓았던 머리의 꽁지를 쓰다듬으며 구관건물을 나섰다. 돈도 많은 우리 학생회가 얼른 이 건물을 싹 뜯어 고쳐야 할텐데.
건물의 입구서부터 내리쬐는 따가운 햇빛. 그 위로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여우비.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것들을 지켜보고 나는 슬쩍 콧등을 매만졌다.
낭만을 타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너나 할 것 없이 다 한다는 연애사업도 없으니…
아까 불렀던 놈들 모아서 술이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