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일상
오늘따라 특히 더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팀장과 몇몇 사원들이 함께 외근을 나갔기 때문이였다. 진득한 손길에, 끈적거리는 눈빛은 물론이고 점심 취향을 강요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오히려 업무량은 평소보다 많았는데도 그랬다. 점심은 각자 따로 먹는 분위기 같으니까 간만에 남우현이랑 단둘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겠다. 출근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다.
" 우현씨. 오늘 점심 나랑 같이 먹을래요?"
" 네?"
" 아니, 이번에 괜찮은 한정식집을 봤는데 혼자 먹으러가긴 민망하구, 그래서."
제법 발랄한 목소리를 내며 남우현에게 접근하는 입사동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그냥 가만히 자리에 앉혀두고 내가 복사해올걸. 남우현이 사내 인기남이란 걸 잠시 잊고있었다. 제길. 이건 뭐 비밀연애니 임자있다고 말도 못하고. 혼자 새까맣게 속만 태우는데,
" 아, 이대리님이랑 선약이 있어서요. 최과장님도 한정식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같이 하시죠?"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남우현이 대꾸하자 입사동기는 진땀을 흘렸다. 최과장은 안그래도 동기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고 여기서 좋다고 하면 가시방석일 자리고, 싫다고 하면 눈도장 찍히는 게 십상이니. 그 짧은 시간에 계산적으로 생각을 마치고 대꾸를 하다니. 역시 남우현 잔머리. 그 사이에 그 쪽을 곁눈질하고 있던 과장에게 찡긋 윙크를 해주었다. 점수도 따고. 역시 유연해서 미운털은 안박히겠다, 싶었다.
의기양양하게 자리쪽으로 걸어오는 남우현을 보고 슬쩍 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에겐 안보이게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어서 남우현도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연애의 묘미란 이런건가. 신경 쓰이던 남우현도 이젠 가만히 제 자리에 앉아 업무에 몰두하고, 나도 겨우 집중을 할 수 있었다. 팀장만 없다뿐이지, 업무량은 평소보다 살짝 더 많은 축이였기에 바삐 손을 놀리지 않으면 추가근무는 뻔할 뻔자였다. 그렇게 몇시간이 훌쩍 지났나, 시야에 노란색이 아른거렸다.
정신없이 엑셀을 정리하느라 정체가 무언지 인식도 못하고 있다가 그제야 남우현 쪽 자리에서 무언가 넘어왔단 걸 인지하고 노란 물체로 시선을 옮겼다.
[ 힘들지, 여보? 점심은 뭐 먹을래?]
노란 포스트잇이였다. 귀여운 그림까지 그려놓고. 우릴 주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괜히 제발 저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보가 뭐야. 여보가. 혼자 얼굴이 새빨개져선 내 책상에 붙어 있던 그 노란 포스트잇을 떼고 새로운 포스트잇을 꺼내 답을 썼다.
[ 남우현 씨. 여기 회사입니다. 언행 조심해주세요.]
남우현 책상에 붙여주자 혀를 살짝 내밀고 만다. 허, 기가 찬 웃음을 짓는것도 잠시. 포스트잇을 쓰레기통에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가만히 녀석의 글씨만 바라보고 있는건데도 뭔가 기분이 몽실몽실 해졌다. 명치아래가 간질거리고. 통통, 테이블을 손톱으로 가볍게 두드리다 핸드백에 손을 뻗었다.
지갑을 열어 주민등록증 뒤에 쪽지를 우겨넣다가 혼자 뜨끔해 합리화를 했다. 회사 쓰레기통에 버리면 누가 볼지도 모르잖아? 들키면 청년실업난에 크게 일조하는 거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절대 이런 말이 좋아서 그런게 아니라!! 혹시 모르니깐. 혼자 수긍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일련의 행동을 남우현이 보고있는지는 새까맣게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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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술파티. 외근을 다녀온 김팀장은 오랜만이라며 환영회란 되도않는 명분으로 다시 회식을 기획했다. 안본지 얼마나 됐다고 뭔 환영식이여. 어쨌든 그 중대한 사안으로 일개 대리인 나와 평사원 남우현은 꼼짝없이 붙잡히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딱히 특별한 컨셉이 없는 터라 자리는 자연스레 여사원들과 함께 배치가 됐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팀장을 보며 안도하다가, 역시 팀장 맞은편에 앉은 남우현에 울적해졌다가, 기분이 널을 뛰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쉬는 시간 마저도 남우현이 보고싶어서 출근만 손꼽아 기다리는데. 회사에 있어도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입 안쪽살을 깨물다가 저 끝에 앉아있는 팀장의 긴 연설 비스무리한게 끝나고 건배 신호에 맞춰 잔을 부딪혔다. 별 생각없이 술을 털어넣었다. 여사원끼리만 앉은 자리에선 대체로 술은 쉬엄쉬엄 마시는게 보통이였다. 선본 얘기,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얘기, 옆집의 사촌의 아들이 미혼부라더라, 하는 얘기를 안주삼아 설렁설렁 시간을 때우는 식.
" 이대리, 한 잔 받지."
두 잔 정도 마셨나.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듣는건지 조는건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대충 고개를 주억이던 내게 김팀장이 다가왔다. 술기운이 단번에 달아났다. 어휴, 기분이 앵간히 좋은지 간만에 원정까지 오셨네. 대충 억지미소를 지으며 술을 받고 몸을 틀어 단번에 잔을 비웠다. 얼른 마셔야 얼른 떨어져 나가지. 하필 또 못하는 소주를 따라줘서. 식도부터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에 오만상을 찌푸리는데 이게 웬걸. 김팀장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 이번에 프로젝트 맡느라 수고 많았네, 이대리. 내가 쓴소리 많이 해서…."
이미 팀장의 이미지메이킹식 말엔 안중에 없었다. 온 신경은 왼쪽 허벅지에 쏠렸다. 떡하니 올려진 팀장의 넓적한 손바닥이 내 허벅지를 떠날 줄 몰랐다. 큼지막한 구렁이가 허벅지위를 기어가는 듯한 기분이였다. 속이 미슥거리고 구역감이 목끝까지 차올랐는데, 이걸 정색하면서 떼어내지도 못하고, 잘못 대처 했다간 출세길 막히는 거 순식간이다. 처음에 이런 식의 성희롱을 당할때는 눈앞이 컴컴해져서 그 뒤로 몇번 시뮬레이션까지 하면서 연습했는데 막상 실전에 닥치면 도무지 행동이 되질 않았다. 아 어떡하지.
" 팀장님, 술 한잔 받으세요."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속삭여졌다. 구세주같은 음성의 주인공은 유연하게 내 허벅지에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있던 손을 떼어내 잔을 잡게 했다. 크흠. 팀장의 얼굴이 울긋불긋 해졌다. 헛기침을 끝으로 남우현이 따라준 술을 원샷하고 급히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떴다.
" 대리님도 한잔 받으세요."
그러면서 따라준 건 냉수였다. 괜히 못볼꼴을 보인 것 같고 민망해서 시선을 못 마주쳤다. 정작 내가 잘못 한건 하나 없는데 그랬다. 그동안 당해왔던 일이 좀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고 창피하고. 입술을 꾸물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워. 작게 속삭이듯 녀석에게 말을 건네었다. 남우현은 대꾸없이 자리를 떴다. 듣긴 한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후배한테 이런 창피를 당했는데 아무리 철판을 깔았다지만 팀장 새끼가 계속 찝쩍거리는 일은 없을테다. 되도않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우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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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히 가세요, 팀장님. 과장님도 안녕히가세요!"
우렁차게 인사를 하는 남우현을 뒤로 하고 나도 집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자꾸 서러워져서 눈물이 뚝뚝 새었다. 처음 팀장한테 불필요한 터치를 당했을 때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하소연할 사람도 없어서 간간히 친구들이나 만나서 안주거리 삼아 씹곤 했는데 정작 내가 의지를 하는 사람이 알아주니 더 눈물이 났다. 태연하게 뒷담거리로 삼았었는데도 그랬다. 남우현이 날 도와주자 마자 그제야 이게 한참 잘못되었고, 화를 내야 하는, 어떤 식으로도 반항을 했어야했단 일임을 알아챘다. 그동안 내가 몹쓸짓을 당하고, 억울하게 생각했어야 하는 일이였단걸.
그걸 알고나니 곧장 찾아온 건 그저 서러움이였다. 소리없이 울면서 시야가 흐려지는 채로 무작정 앞을 향해 걷는데, 꽤나 억센 악력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 이00. 어디 가."
남우현은 평소완 다른 날선 목소리였다. 남우현은 내 몸을 틀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온몸에 힘을 줘 거부하는 바람에 그냥 손목만 잡고 있었다.
" 나도 충분히 … 잘 못 한거 알았으니까 그냥 가."
손아귀힘이 풀어졌다. 그 틈을 타서 곧장 앞으로 걸음을 더했다. 훅 끼쳐오는 체향에 걸음이 멈춰지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뒤에서 나를 안은 자세가 된 남우현은 귓가에 대고 나지막히 말을 건넸다.
" 네가 뭘 잘 못 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달래는 투에 되려 더 눈물이 차올랐다.
" 너 혼자 힘들어 했는데 몰라줘서 미안해. 나 온 첫날에도 그랬었잖아.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넘겼었어. 눈치 못채서 미안. 아까도 너한테 좋은 소리 한마디라도 할 수 있었을텐데, 그 순간에 너무 화나서 조절을 못할 것 같아서 그랬어. 당장에라도 그 새끼 손목 잡아 비틀어서 다신 그 손 못 쓰게 해버릴 것 같아서. 미안해. 미안해. 응?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 그만 울자."
그렇게 잔머리 잘 돌아가고 유연하게 엿먹이는 남우현도 사람 달래는 일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였다. 우는 사람한테 울지 말라 그럼 원래 눈물이 더 나는 법인데. 눈물은 나는데 아직도 울지말라고 달래는 건지, 찡찡거리는 건지 모를 말들을 주절거리며 늘어놓는 남우현이 사랑스러웠다.
# 그들의 프로포즈
" 헐, 우현아 비행기 떴어, 떴어!!"
"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해."
점차 지면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이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방방 떠있는 나완 다르게 몇번 외국에 관광차 놀러가봤다는 남우현은 차분하게 나를 뜯어 말리는 중이였다. 그러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띄우곤. 남우현의 손짓에 창문에서 몸을 떼고 바로 앉았다. 지금 향하는 곳은 바로 옆 섬나라였다. 일본. 그러니까 우리가 왜 나란히 앉아 일본으로 가고 있냐면, 바로 우리의 신혼여ㅎ… 은 꿈이고. 출장 차 방문이였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출장을 위해서라니, 가련한 내 인생이여.
" 00아, 식당 가야지."
" 응?"
" 원래 이륙하면 얼른 식당으로 가서 줄서서 밥 받아와야 돼."
" … 기내식 주잖아."
" 그건 이코노미석 이상 얘기고. 드라마만 봐서 이런 거 또 모르지. 얼른 가서 먹어야 돼. 음식 동난다니깐?"
좌석에 앉은 사람들 모두 미동조차 없기에 반신반의하면서 엉덩이를 붙였다. 남우현 저건 얼마나 언변이 좋은지 별의별걸로 다 속여먹으려 든다니깐? 공항에서부터 이륙에 성공하면 기립박수를 쳐라, 비행기에 들어가면 승무원 언니한테 신발을 주고 나갈때 받는거다. 이러면서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사실감있게 하는 덕에 조금만 더 둔했으면 속아 넘어갈뻔 했다.
" 죽인다. 아무도 안 나가잖아."
" 왜 이렇게 귀엽냐, 진짜. 그걸 또 믿어."
숨이 넘어갈듯 쳐웃는 남우현의 볼을 콱 꼬집어버리고 싶었는데 더없이 즐거워보여서 그저 실소만 터졌다. 애도 아니고, 이런걸 좋아해.
" 아, 좋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신혼여행 가는 것 같지, 우현아?"
" 무… 무슨 신혼여행이야. 프로포즈도 없었는데."
" 하면 되지! 지금 얼른 해!"
" 아, 됐어."
단번에 정색을 하곤 팔을 빼서 나는 그저 당황하는 수 밖에 없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남우현을 가만 바라보고만 있자, 남우현은 민망한듯 콧잔등을 만지다가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눈을 붙이곤 잠을 청하는 남우현에게, 그것도 보는 눈 많은 기내에서 덜컥 서운함을 표할 수 없으니 일단 창문밖을 가만 바라보기만 하며 혼자 삭였다.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같은 비행기에 상사들도 타고 있고 하니까 조심하는 거겠지. 애써 생각을 바꿔먹고 나도 남우현처럼 눈을 붙였다. 창밖은 온통 흐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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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잡힌 빡센 일정에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우린 일개 말단 사원임에 경험차 간 것이지만 그랬다. 거래처와의 계약이 있으면 거래처 눈치보랴, 상사들이 시킨 것 수행하랴, 배가 차지도 않는 눈칫밥을 그득 얻어먹고 나서야 5박 6일의 일정이 얼추 끝이 났다. 정확히는 업무일은 완벽히 종료가 되었고, 다섯째 날은 자유 관광, 마지막 날은 오전 출발 예정이였다. 지난 밤 나 혼자 배정받은 독방에서 남우현과 칵테일 한잔을 하곤 피곤에 늘어져 줄곧 잠만 잤다.
그렇게 자유 관광 예정이던 다섯째날은 순식간에 오후로 접어들었다. 느즈막히 늦잠을 자버려, 애초 계획했던 코스는 대부분 무용지물이였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렸지만 남우현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며 좁은 싱글침대에서 날 품안에 가둬놓고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녁은 맛있는거 사줄게. 나보다도 적은 월급 받는 처지면서 부심은 대단하네. 계획이 틀어져서 언짢았던 마음도 사르르 녹았다. 대학 다닐 땐 경영학과 미친 년이라고 소문 자자하던 나였는데, 남우현은 사람을 이렇게 말랑말랑한 마시멜로처럼 녹여버린다.
따땃한 남우현의 품속에서 한숨 더 자버렸다. 일어나니 오후 세시였다. 들은 바로는 팀장님을 비롯한 일행들은 후지산을 구경하겠다고 새벽부터 출발했고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출발하는 거라고 했다. 저녁 늦게 올 것같다고 덧붙여서 안심하고 일본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내일 출발할거니 대강 짐을 정리해두고 각자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룸서비스는 어차피 저녁 먹을거니 물렸다. 일본 음식들을 다 정복하고 말리라, 거창한 각오를 세우고 위를 비웠다. 초가을에 접어드는 중이였지만 낮엔 아직 볕이 따가웠다. 남우현은 가디건이라도 하나 걸치라고 했지만 답답한건 죽기보다 싫으니 어차피 짐만 될게 뻔해서 결국 두고 왔다.
호텔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번화가였다. 나올때 쯤 되니 딱 저녁 피크시간대라 가게들은 저마다 휘황찬란한 간판들을 내걸고 손님들을 모으려 애썼다. 나또한 그 손님들 중에 하나였고.
" 저거 먹자, 우현아. 라멘!!"
" 저건 야끼소바고. 생긴것도 전혀 다른데 어떻게 헷갈려."
" 그럼 야끼소바 먹자. 맛있는 냄새나. 뭐 만드는 거지?"
반대편으로 득달같이 달려가 문어빵 만드는 걸 구경하던 내 어깨에 남우현이 손을 올렸다.
" 내가 레스토랑 예약해뒀는데 거기 가서 먹자. 응?"
" 어? 일본까지 왔는데 무슨 레스토랑이야. 싫어, 난 길거리 음식같은거 먹고 싶단 말이야. 헐, 저건 뭐지? 부침개 같이 생겼어!"
" 00아, 그러지말고 한번만 가자. 나 소원 들어준다치고."
" 내 소원은 너랑 같이 여기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음식먹고 그러는 거거든? 나 소원 들어준다치고 얼른 예약 취소해."
아까부터 유독 안절부절못하고 남우현 답지않게 경직되어 보이더니, 예약시간에 늦을까 그랬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본까지 왔으면 일본음식을 먹어줘야지, 레스토랑 같은건 한국에도 널렸는데. 이번만큼은 나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식탐을 그렇게 부린 건 아니였지만 내리 굶은 터라 당장 뭐라도 좀 먹었으면 하는 것도 사실이였다. 그리고 레스토랑 가면 마주앉아서 먹어야할텐데, 난 그것보다 차라리 팔짱끼고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소박하게! 그런 데이트를 꿈꾼건데. 왜 평소엔 차리지도 않았던 격식을 이제와 차린담. 싸인도 어지간히 안 맞는다. 부침개 집을 기웃거리자 어느새 뒤따라온 남우현이 조금 큰소릴 냈다.
" 너 왜이렇게 고집이 세! 그거 한번을 못 들어줘?"
남우현이 큰소리를 내는건 굉장히 보기드문 일이라 나도 모르게 티나게 놀라 버렸다. 놀람 다음에 곧장 찾아온 감정은 억울함과 서러움이였다. 내가 그렇게 큰 거 바란 것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음식 같이 먹자는게 그렇게 잘못한거야? 아니 그거 말고도 이번 출장 일정 내내그랬다. 평소 남우현 답지않게 자꾸 틱틱거리고 끊임없이 트러블이 생겼다. 비행기에서 섭섭하게 말한것도 아직 응어리가 졌는데 부끄러움도 잊고 맞받아치며 큰 소리를 냈다.
" 너야말로 자꾸 왜그러는데! 일본 올때부터 자꾸!! 그럼 너랑 나랑 따로 가면 되겠네, 너 그렇게 좋아하는 레스토랑가서 스테이크나 썰든가!"
창피하게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놀란게 반, 서러운게 반이였다. 곧장 뒤를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일본 거리를 걸었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웬만한 길치에다, 일본어도 서투르니 길을 잃는다면 꼼짝없이 국제미아 신세인데,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남우현때문에 그런 현실적인 걱정은 들지도 않았다.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걸었더니 휘황찬란하던 밤거리는 어디로 가고 주택들이 즐비한 골목길이였다. 그제야 눈물이 맘놓고 비집고 나왔다.
솔직히 오늘 저녁메뉴 같은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본도 맘만 먹으면 남우현과 언제든 올 수 있었고 그렇게 죽고 못사는 레스토랑 한번 가주는 건 일도 아니였다. 내가 진짜 마음이 다친 건 따로 있었으니. 내심 결혼을 생각했었다. 연애 햇수로만 세도 꽤 되는 기간이였다. 그다지도 한참을 돌아오고 결국 도착한 목적지가 남우현이였는데, 남우현 아니면 누구랑 결혼을 하냔 말이다. 비밀연애도 하루이틀이지, 평생 속여먹을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 평생을 걸고 사랑할 남우현이니 결혼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남우현도 같은 생각을 할거라 믿었다.
그런데 근래 남우현은 자꾸만 불확실하게 굴었다. 돌려서 물어보려해도 바로 그 화두에서 벗어나기 일쑤였고, 일부러 외면한단 생각이 들정도로 무관심해보였다. 그런 태도에 답답했다. 오늘 이렇게 못참고 뛰쳐나온 이윤,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무턱대고 결혼을 해야한단 부담을 준건 아닌가, 싶어서. 결국 우린 이렇게 사소한 주제에도 악악대며 싸우는데, 산들바람에도 못참고 이리 휘청이는데 어떻게 결혼이란 굴레로 묶어둘 수 있을까. 처음으로 우리의 결혼생활에 의구심이 들었다. 애초에 우린 이다지도 다른 사람인데 언제건 사랑 하나 만으로 버틸 수 있을지, 사랑이 그걸 버텨내줄지. 그래서 난 대체 어떻게 해야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단 말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급한 발소리가 들리고 곧장 내 어깨에 얹어진 손은 홱 몸을 틀었다. 곧장 따뜻한 온기가 스며왔다.
" 우린 어떻게 쉽게 가는 법이 없냐. 사랑해, 이00. 나랑 결혼하자."
꿈인가.
" 이 말 할려고 그랬어. 출발 하기 전부터 몇날 며칠을 인터넷 뒤져가면서 프로포즈 연습했는데, 니가 자꾸 내 뜻대로 안 움직이고 답답해서 그랬어. 예약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넌 내맘도 모르고. 진짜 변한 거 하나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쩜 이렇게 내 맘을 몰라주세요, 이 죄많은 여자야. 괜히 또 사람 맘 약해지게 울고. 춥다고 분명히 그랬는데 또 얇은 거 입고 나오고, 말도 지지리도 안듣고, 내 맘은 쥐똥만큼도 몰라주고!"
남우현의 품에 안겨 있는데 자꾸만 눈물이 샜다. 확실한건 아까랑은 다른 이유란거.
" 나도."
" 어? 뭐라고?"
" 나도 사랑해."
그렇게 눈에도 선 골목길에서 한참을 껴안고 있었더랬다. 녀석의 코트에 폭 파묻혀서.
그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변하는 것도 아니고 어쩜 난 평생 남우현이랑 이렇게 삐걱이며 살테다. 오늘처럼 남우현 마음도 몰라주고 자꾸 어긋나면서 내 고집만 내세우겠지. 싸움이 잦아져도, 이혼이다 뭐다 말이 나와도. 그래도. 나랑 남우현이니까. 단단히 코가 꿰여서 이제 얘 아님 날 데려가줄 사람도 없다. 남우현 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고. 우린 우리 스스로 세운 가시들에 찔리며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테지만, 조금 돌아가고 조금 느리게 가겠지만 함께 걸어갈테다. 오늘처럼, 조금씩, 서로에게, 맞춰가며.
게다가 우린 둘도없는 원수처럼 헤어져봤던 전적이 있는터라. 서로 없으면 죽고 못사는 걸 아니깐. 결혼에 대한 환상보다, 의구심보다 몇백배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날 이렇게 애태우고, 섧게 하고, 녹이고, 울게 하는, 또 그보다 더 많이 웃게하는 이런 남우현에게 온전히 내 평생의 시간을 맡겨도 되겠다는 그런 확신.
자, 그럼 내내 행복하기를.
# 뜻밖의 선물
" 언제와, 현아."
- 지금 가고 있어. 딴 짓 안하고 푹 쉬었지?
" 어. 니가 일하지말라고 노트북 가져가서 다운받아놨던 영화도 못봤어."
- 월차까지 냈는데 푹 쉬어야지. 뭐 필요한거 있음 사갈까?
보시다시피 우리는 같은 집에서 출퇴근을 함께 하는 부부사이가 되었다. 결혼식도 해서 팀장이랑 동기년한테 돈도 왕창 뜯어먹고. 거실 한켠에 걸려있는 웨딩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뭐 먹지? 찜닭!! 찜닭 먹고 싶어. 올 때 사와. 아니 내가 시키는게 더 빠른가?"
- 내가 시킬게. 쉬고 있어. 또 필요한 건?
" 어… 귤. 귤 먹고 싶다.
- 귤 다 들어갔어. 벌써 봄인데 무슨.
" 지금 먹고 싶단 말야, 신거. 없으면 레몬이라도 사와."
예능 재방송이나 보며 눈을 반짝거리며 빛냈다. 요 며칠 좀 몸이 심상치 않더라니 꼼짝없이 감기에 걸려서 월차까지 내고 푹 쉬기로 했다. 결혼까지 밝힌 마당에 내 몫까지 눈치보랴, 업무 처리하랴 바빴을 남우현을 생각하면 좀 미안하기도 하고.
- 너 요새 좀 살 붙은 것 같아.
" 니가 보기에도 그래? 아 왜 자꾸 먹을게 땡기냐."
- 아, 아니. 난 보기 좋다구. 전에도 이뻤는데 요샌 잘 먹어서 더 이뻐.
" 드라마 작작 보라고 했다. 그런 대산 대체 어디서 따는거야?"
감기약도 받아왔는데 거의 온종일 잠에 취해 있느라 공복이였다. 밥 먹고 감기약 먹어야지, 생각하고 다시 티비로 눈을 돌리는데 따땃하니 살짝 졸음이 몰려왔다. 내 곤한 잠을 깨운건 요란스런 초인종소리였다. 아까 전화한지 30분쯤 됐을라나. 겨우 상황파악을 하고 현관쪽으로 나가려는데 그새를 못참고 쿵쿵댄다.
" 서방 왔어, 문 열어."
" 같잖다, 서방이라니."
시큰둥해하면서 문을 열어주자 불쑥 봉지를 들이민다. 뭐야? 묻자, 뭐긴 뭐야, 찜닭이지. 그러고 곧장 부엌으로 가서 레몬과 귤 같은걸 냉장고에 정리해 넣기 시작한다. 수저 가져와. 시켜놓고 찜닭 봉지를 열어재꼈다.
우웁.
요란하게 화장실로 뛰쳐나가 먹은 것도 없는데 구역질을 했다. 놀란 남우현이 곧장 화장실로 달려와 내 등을 가볍게 쳤다. 위액만 뱉어내는 내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남우현에 입가를 헹구며 안심하라는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곧,
" 헐."
그날 남우현은 근처 약국으로 한번 더 나갔다 와야 했다. 임신 테스트기를 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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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 아무리 눈을 비벼봐도 두 줄이 맞았다. 밖엔 남우현이 기다리며 연신 안절부절 못했고, 쉴틈없이 문을 두드려댔다. 어때? 문을 열고 와락 안긴게 벌써 두 달 전일이다.
어제는 남우현이랑 손 꼭붙잡고 산부인과를 갔었다. 네달이 조금 넘어갔는데, 이때 쯤이면 애기 성별을 구분할 수 있다고 들었다. 남우현은 딸 바보가 될 예정인지 그날 온종일 노래를 불러댔다. 딸이면 너 닮았으면 좋겠다. 눈을 잔뜩 휘어 웃음짓는 녀석에 나도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남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염원을 이뤘고 곧장 신생아용품 매장에 가서 보이는 걸 다 쓸어담기 시작했다.
" 야, 이 미친놈아. 애기가 얼마나 쑥쑥 크는데 이렇게 많이 사!"
" 쉿. 산모는 말 조심해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앙증맞은 구두나 옷가지들을 보며 웃음이 피어오르는 건 내 조절 영역밖이였다. 산모는 높은 거 신으면 안돼. 그래놓고 운동화 매장에 가선 앞으론 세 가족이 될 거니 커플 신발이 아니라 트리오 신발이라며 또 애기 신발을 샀다. 세 살은 되야 신는다잖아! 타박을 해도 헤- 하고 바보웃음을 짓는다. 그런 남우현을 보고 있자니 나도 자꾸 웃음이 새었다. 남우현은 백화점을 털 생각인지 몇시간을 쉬지도 않고 걸어다녔다. 나도 이제 한 몸이 아니라고 평소라면 거뜬했을 백화점 원정에 내가 먼저 지쳤다.
" 우현아, 좀 쉬었다 가…,"
" 아, 힘들어? 어떡해? 업어줄까?"
남우현은 등짝 한대를 얻어맞고 곧장 백화점 내의 카페로 향했다. 자기가 주문하겠다더니 가지고 온건 고구마라떼였다.
" 아, 나 아메리카노 먹을 거라고."
" 커피도 애기한테 안 좋아."
평소보다 갑절은 단호한듯한 남우현에 난 더이상 투정도 못하고 잔을 입에 댔다. 으, 달아. 달아 죽겠다. 남우현은 그게 라떼를 말하는 건지, 지금 녀석과 이런 일상을 보내는 건지도 구분 못하고 머핀을 내 앞에 놓아주며 실실거렸다.
" 우리… 애기 태명 말이야."
" 골랐어?"
" 응. 내 애기 낳으면 꼭 짓고 싶었는데. 아토."
" 그게 뭐야. 아톰도 아니고."
순우리말로 선물이란 뜻이야. 난 너랑 아토가 너무 과분한 선물같거든. 답지않게 수줍은 미소를 띄우는 녀석을 보자니 더이상 놀리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졌다. 저 눈은 진짜 200% 진심이니깐. 요새는 좀 출산을 늦게 하는 추세라길래 혹시 부담스러워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남우현은 그러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여나 하던 불안감도 사라졌다. 그래, 선물. 선물같은 존재였다. 남우현도, 내 뱃속에서 곤히 잠든 아토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슬보슬. 봄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