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엔
- 비와 당신의 이야기
written by 라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백현은 창문에 서린 습기를 살짝 닦아냈다. 찬열은 그런 백현의 손을 휴지로 살짝 닦아냈다. 거뭇거뭇한 먼지가 어린 물이 습기에 젖은 손에서 묻어나왔다. 찬열은 휴지를 바닥에 던지고 백현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만지면 안돼."
"왜."
"더러워지잖아."
이 지긋지긋한 배려심에 백현은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굳어버린 손가락은 더이상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 백현은 달달 떨리는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백현은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표정으로 찬열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시트가 덮여진 다리 또한 움직이지 않는다. 자꾸 물건을 놓아둔 곳을 잊어버린다거나, 작은 두통이 오는 것을 그저 피곤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두 다리로 너와 함께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것도, 좀더 많은 추억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백현은 찬열이 조금 더 자신의 인생을 보살폈으면 하는 느낌이었다.
곧 이 곳에서 사라질 나를 위해서 네 인생을 바치지 마. 백현이 찬열에게 가장 하고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찬열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백현에게 공존하고 있었다. 처절하고도 절망적인 이기심이었다. 백현은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백현아."
찬열이 손을 들어 백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에 닿는 따스한 손의 느낌. 하지만 조금 거칠다. 요 근래 백현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손이 많이 거칠어 진 것이 느껴졌다. 백현은 괜시리 화가 났다.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찬열의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자기도 모르게 응 하고 대답해버렸다.
"힘들지."
"아니."
오히려 힘든건 찬열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의 곁에 있었다. 학교는 휴학하고, 다니던 아르바이트는 내팽겨쳤다. 백현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찬열은 달랐다. 찬열이 자신을 위해 포기한 것 만큼 백현은 찬열을 포기해야만 했다.
"왜, 왜 이런 나랑 같이 있어 줘?"
"사랑해서. 사랑하니까. 좀 더 많이 보고싶으니까."
찬열이 배시시 웃었다. 빛이 난다. 백현은 이런 빛이 나는 사람에게 자신이 그림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찬열에게 백현은 빛의 근원이었다. 찬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백현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네가 있어서 내가 살아. 너를 위해서 내가 살아가고, 너로 인해 모든 게 굴러가. 내 영혼이, 내 모든게 너에게 향해있어.
"내가 너를 잊어도."
"응."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해도."
"응."
"내가, 내가 모든걸 잊어도."
"응."
"내가 죽어도, 날 사랑할거야?"
"응."
참아왔던 눈물이 이윽고 터져버렸다. 그리고 백현은 계속해서 찬열의 이름을 입으로 되뇌였다. 박찬열. 박찬열. 박찬열.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할 사람. 내가 누구보다 더 좋아했던, 나를 빛나게 해 준 사람. 모든걸 다 잊어도 너 만큼은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생각에 백현은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불렀다. 찬열은 백현을 끌어안고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그리고는 백현의 귓가에 나즈막히 속삭였다.
"있지, 백현아."
"……."
"다른 말은 다 해도 되는데, 나를 잊는것도 나는 상관이 없는데."
"응."
"죽는다는 말은 하지마."
너가 죽으면, 나도 죽어. 끝내는 찬열도 눈물이 터져버렸다. 찬열은 말했다. 비가 그치면, 정원에서 산책할래? 백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백현이 떠나간 날은, 무던히도 비가 많이 왔다. 찬열은 울지 않았다. 백현이 이 세상에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백현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백현이 어렸을 때, 가족이 모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나서, 찬열은 장례식의 모든 절차를 홀로 밟았다. 조문객도, 친척도 없다.
너는 죽어서까지 쓸쓸하구나.
찬열은 백현과 함께 자주 걸었던 거리로 향했다. 너와 추억이 있던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백현이 이 세상을 떠난것을 슬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찬열은 내리는 비를 전부 맞았다. 이내 찬열은 인도를 무작정 뛰었다. 벌써부터 네가 보고싶어. 나 어떡해. 어떡하지 백현아. 미친듯이 뛰어다니던 찬열은 한 장소에서 발을 멈췄다.
백현이 좋아하던 나무였다. 무슨 나무인지도 모른 채, 그저 이 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늘 말했었다. 찬열은 백현이 생각 나서 나무를 만지고 또 매만졌다. 그 때, 나무에 걸린 한 팻말이 보였다. 찬열은 팻말을 살짝 돌려서 팻말에 쓰인 글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찬열아. 찬열아. 많이많이 사랑해요.
이제는. 나를 잊어도 돼. 고마워요. 행복해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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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라임입니다... 갑자기 아련한게 급 땡겨서 1시간만에 뚝딱 썼어요....
읽어주시는 분들 많이만히 사랑해요!!!!!! 찬백행쇼지만 카디도 행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