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청. "
" 아, 준다니까. 종인씨, 기다려요 좀. "
종인이 앞만 보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준면이 사람좋은 미소로 화답했다. 흰 피부에, 백색 가운. 실로 잘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준면은 목에 걸린 청진기를 빼내고, 아이스박스에 혈청을 꽉꽉 채웠다. 여기, 종인씨. 종인은 인형과도 같이 건조한 얼굴을 띄고 앉아 있다가 준면이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곤 나갈 채비를 했다. 종인씨, 그냥 가게요? 어. 종인의 성격과 같이 정말 깔끔하게 떨어지는 대답에 준면이 못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 그럼, 잘 가세요. "
" ..응. "
종인의 검은색 셔츠를 입은 등이 빠져나갈때까지 준면은 밝게 웃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얼굴은 누구든지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준면의 모니터에 밝은 불빛이 들어오면서 팝업창 하나가 떴다. 아, 준면이 작게 알겠다는 듯 동조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한 준면의 테이블 위로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내려앉았다.
RED
" 종인아. 왔어?"
백현이 안절부절 못하고 거실을 배회했다. 그런 백현을 힐끗 쳐다봐준 종인이 다시 무미건조한 시선을 돌렸다. 화, 났어..? 축 늘어진 백현의 뒤로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은 모습에 종인이 백현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니. 안 났는데. 종인의 화법은 화가 정말 났을 때의 그것이라서 백현은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무리 영생을 사는 뱀파이어라지만 이런 극도의 압박감이 드는 상황에서는 온몸의 세포가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오리지날-뱀파이어가 아닌가. 아직까지 그들이 화가 나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지 백현은 몰랐다.
" ..미안. "
" 혈청. "
종인은 단어를 선택해서 대화하기 시작했다. 백현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구어내려졌다. 정말 큰일이다. 백현이 시선을 손끝으로 떨구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조, 종인아. 나는.
" 자제력, "
" ... "
" 잃지마. "
종인은 그 말만 남기고는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겼다. 백현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무심코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칠 듯이 놀랐다. 크림슨의 붉은 빛깔을 띄는 눈동자가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백현은 허기가 졌다. 종인이 내려놓은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정제된 피가 팩에 나란히 담겨져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가위로 끄트머리를 사선으로 자른 백현이 한모금 입에 머금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다. 백현의 눈동자가 가늘게 찢어질듯 떠졌다. 음. 혀를 내밀어 팩을 한번 더 핥아준 백현이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찬열이, 보고 싶다.
*
" 박찬열. "
" 뭐. "
" 너 나랑 교대작업 하면 안되냐? 엉? "
" 안되는데. "
아 진짜 제발.. 그 뱀파이어 졸라 무서워.. 징징거리는 경수를 한번 쳐다봐준 찬열이 다시 앞을 쳐다봤다. 눈앞에 자꾸 백현의 모습이 아련거렸다. 그 까만 눈동자가 붉은 빛을 띄고, 저를 향해 시선이 향하고, 덜덜 떨면서 바닥에 엎드리면.. 찬열은 입술을 핥았다. 자꾸 이렇게 가다가는 저를 주체할수 없어질것만 같아서 찬열은 경수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며 최대한 무뚝뚝한 말투로 경수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도경수, 빨리 가자니까 진짜.
" 잘 되가? "
마스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찬열과 경수는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의 입가에는 소름끼치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 빌어먹을 뱀파이어 소탕작전, 잘 되고 있긴 하겠지? 경수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려고 하는 걸 찬열이 잘라먹으며 네, 마스터. 잘되고 있어요. 거의 넘어왔어요. 야, 박찬열.. 너 왜그래.. 경수가 울듯이 말하는걸 찬열은 무시했다. 마스터의 입가에 다시 소름끼치는 미소가 드리워졌다. 믿는거, 알지. 그럼요. 몇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린 찬열이 이제 가보겠습니다. 하면서 뒤를 돌았다. 불안한 경수의 발걸음이 그 뒤를 따르는데,
" 도경수. "
" ...네, 마스터. "
" 오리지널 뱀파이어는 다른 혼혈들이랑 달라. "
" ... "
" 그리고 솔직히 같이 사는 그 잡종은 죽여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녀석은 어떻게 해도 다시 살아날 수도 있어. "
" 네, 알고 있습니다 마스터. "
" 걔가 목표인거 알지? "
카이.. 마스터가 잇새로 중얼거렸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경수가 빌딩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겉으로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한 사무실로 보이는 이곳은 뱀파이어 헌터들이 거주하는 장소였다. 찬열과 자신이 마스터에게 훈련받은 장소이기도 하고. 가방에 있을 글록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워져서, 경수는 느릿느릿 그곳을 빠져나왔다.
*
" 안녕! "
" ...뭐야. "
경수는 미친척하기로 했다. 사실 옆에 앉은 이 뱀파이어가 무서워서 돌아버릴 것 같지만, 경수는 덜덜 떨리는 몸을 애써 무시하면서 종인의 옆자리에 전공책을 내려놓았다. 고양이같이 눈을 치뜨고 저를 쳐다보는 뱀파이어는 동작 하나하나에 우아함과 강압적임이 서려 있었다. 우와 장난 아니야.. 경수는 눈을 몇번 깜빡이고는 애써 목소리를 밝게 하면서 종인에게 말을 붙였다. 종인은 그러는 사이에 반쯤 조는 거 같았지만.
" 너 이름이 김종인 맞지? "
" 어떻게 아는데. "
" 우리 과에서 너 유명해. 너도 이 교양과목 듣는 줄 몰랐는데. 우리 친하게 지내자! "
경수가 애써 밝게 웃었다. 입 안을 하도 씹어대서, 피가 배어 나올 지경이었다. 종인은 확실히 유명한 편이었다. 정외과 2학년 김종인. 준수하게 생긴 외모와 그 누가 말을 걸어도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 같은 포스와 섹시한 분위기에 과 내의 거의 모든 여자들은 종인에게 목을 매다시피 했다. 뱀파이어들의 특징 중 하나가 수려한 외모로 남들을 홀리는 거니까. 하면서 경수는 종인을 흘끗 쳐다보았다. 줄곧 앞만 보는 종인의 옆얼굴은 확실히 섹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 .. 그러던가. "
" 어? "
" ... "
종인이 다시 아무 말 없이 앞만 보았다. 김종인이 방금 그러던가, 라고 한거 맞지? 뒤에서 정말 평범한 정외과 3학년 도경수가 과 내 킹카에게 접근했다가 어떻게 신나게 털리는가에 대해서 내기를 하고 있던 여학우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경수를 부러움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수는 굉장히, 매우 얼떨떨한 상태였다. 김종인이 방금 그러던가라고 했어? 경수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이러다가 김종인을 제거하기 전에 제가 죽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
" 학교는, 재밌었어? "
" 그럭저럭. "
자켓을 걸어두고 온 종인이 백현에게 말했다. 너는 재밌었냐. 나 친구 많거든? 너랑 다르거든! 하면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백현을 보고 쿡 웃은 종인이 식탁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말린 건포도, 견과류에 식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큰 컵 가득히 따라진 새빨간 피였다. 백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종인에, 시선을 느낀건지 백현이 멋쩍게 웃었다. 미안, 오늘 과제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내일은 다른 요리 해 줄게. 그래. 고개를 살짝 끄덕인 종인이 보울에 견과류와 건포도를 붓고 그 위로 피를 들이부었다. 말없이, 조용하게 식사는 시작되었고, 백현은 맞은편에 앉아서 수혈용 팩을 쪽쪽 빨면서 종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 뭘 그렇게 보냐. "
" 어, 어...? 아니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싱겁기는, 종인이 다시 먹을 '것' 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용한 거실에 백현이 빨때를 꽂아 피를 마시는 소리와, 종인이 수저로 건포도, 견과류는 대부분 버리고 피만 떠 먹는 식기소리가 울렸다. 창밖이 어느새 어두워졌다.
*
레드 삼편 끝!!
아 진짜 구상이 완전 복잡해졌어여 으어어엉
재미 없으시죠.. ㅜㅜ 그러실거에요.. ㅜㅜ 그래도 재..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겟씁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