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통이 통째로 타버렸는지 폭발은 쉬지 않고 계속 되었다. 사방으로 공명하는 굉음과 폭발의 여력으로 몰아치는 돌풍 때문인지 활주로를 향하고 있는 공항 전면의 유리는 중앙에서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대피안내방송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대기실 안에서 성규는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몸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거미줄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한 빗금은 쩌걱쩌걱 소리를 합세하며 금방이라도 얼굴 위로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모든 공포의 근원이라는 죽음이 눈앞에 닥친 지금, 성규의 머릿속에는 사랑하는 연인 우현의 얼굴이 아닌 호원의 얼굴이 가득했다. 깜빡 잊어버렸던, 노란 메모지에 휘갈겨 쓴 글씨. 얼음 같이 차가운 눈이 자신을 쏘아볼 때마다 느껴야만 했던 일반적인 두려움과는 다른, 설명하기 힘든 기분. 우현과의 약속이 있었으면서 오후 상담을 승낙했던 이유. 이미 통화로 나눴던 목소리가 낯설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파지직,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온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가 성규의 흰 운동화 앞으로 떨어졌다. 피할 수 있는 겨를조차 없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이 수직으로 갈라졌다. 툭, 투둑, 불길한 소리를 내며 유리조각 위로 떨어지던 핏방울이 어느새 줄기가 되어 흰 목을 타고 흘렀다.
“김성규!”
정신을 챙길 새도 없이 뒤이어 누군가의 불완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끝이구나. 질끈 감은 눈꺼풀 위로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를 느끼며 성규는 머리를 감싸 쥔 채로 힘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눈물 같은 것은 흐르지도 않았다. 못다 한 일들은 머릿속에 파고들 여지조차 없었다. 파들파들 땀이 배어난 두 손은 머리칼을 쥐고서 고통 없는 죽음을 기도할 뿐이었다. 막연히 두렵고, 벗어나고 싶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비극적인 마지막. 마침내 거대한 좌현 날개가 전면유리를 강타했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유리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순간,
“김성규!”
그리고 누군가의 애타는 외침.
-
황혼이 저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영원한 잠에 빠지는 것. 말로 구구절절 설명해보아야 우습고 유치하지만 홀로 앉아 죽음이라는 막연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면 성규는 아름다운 해안가에 앉아있는 자신과 우현을 생각했다. 요란하지도, 칙칙하지도 않은 깔끔하고 정숙한 옷차림을 하고서 나란히 누워 잠이 드는 영화 속 장면 같은 것을 말이다. 사실, 동반자살이 아니고서야 한날한시에 아무 탈도 없이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쯤, 똑똑하다 못해 재수 없을 정도인 성규도 잘 알고 있었다. 또 까칠한 제 성격상 우현에게 터놓고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술술 말해본 적도 없었다.
“…성규.”
그런데 이제 와서 후회가 되었다. 그 말이 대체 뭐가 어렵다고, 스쳐가듯 한번이나 말을 해볼 것을 싶었다. 이렇게 제 인생이 끝날 줄 알았다면 우현에게 까칠하게 굴지나 말 것을, 하루를 사랑한다는 말만 하며 보내도 분명 모자랐을 텐데.
“김성규!”
“….”
급한 숨을 들이키며 상체를 번쩍 세웠다.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들이쉰 숨을 다시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헉헉대는 기분 나쁜 소리가 흘러나왔다. 성규는 두 눈을 뒤집어 깐 채로 발작적인 떨림을 계속했다.
“성규야.”
헌데 뜨겁고, 투박한 손이 익숙한 동작으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성규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천국에 온 것이라고 믿었다. 밝은 조명이 불투명한 시야를 뒤덮었고 보이는 것이라곤 희미한 격자무늬들뿐이었다. 곧 그것이 조금 전 재앙이 벌어지던 대기실 내부의 벽면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알아차리고야 말았지만. 혹독한 겨울을 겪어 거칠거칠하게 튼 손등이 안쓰럽다는 듯 왼쪽 뺨의 상처를 훑어 내린다. 성규야. 부드럽게 이름을 속삭이는 목소리에 어느새 흐른 눈물이 무릎 위로 뚝뚝 떨어졌다. 바로 죽기 직전까지 전화로 들어야 했던 우현의 목소리였다.
“늦어서 미안해.”
푹 수그린 고개를 들자 딱딱한 무언가가 이마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아.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눈을 뜨고 방금 전의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순간, 성규는 또다시 두려움에 질려 몸을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이 별로 없어.”
조금 전 이마에 부딪혀 힘없이 떠밀려간 것은 유리파편이었다. 놀랍게도 공상과학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장면들이 성규의 눈앞에 버젓이 펼쳐져 있었다. 얼굴 위로 곧장 쏟아져 내리던 날카로운 유리파편들은 떨어지던 모양새 그대로 허공에 멈춰있었다. 바로 그 뒤에서 위협적인 쇳소리를 내던 거대한 반쪽짜리 비행기도 죽음의 회전을 멈춘 상태였다.대기실 내부 사람들은 허겁지겁 도망치던 자세 그대로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밀랍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이건 정말…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마치…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건…너…어떻게…이건….”
빛에 익숙해지자 주변의 사물들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거짓말처럼 몬트리올에 있어야할 우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의 계절과 맞지 않는 두터운 옷차림을 하고서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꿈이라기엔 모든 것이 생생하게만 느껴졌다. 그가 사라질까봐 얼른 붙잡은 손은 늘 그렇듯 한 여름의 태양처럼 뜨거웠다. 조심조심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도 여전히 다정한 우현이 확실했다.
“상당히 감동적이지만 저 괴물이 우릴 깔아뭉개기까지 정확히 31초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둬.”
“나가자. 우선, 나가야 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현이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미 힘이 풀려버린 성규의 다리는 제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성규는 우현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분명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다고 했던 우현이 어째서 이곳에 있으며,비행기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멈춰버리고 오직 우리만이 움직이고 있는 이 상황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건 진짜…미친 짓이야.”
덜렁, 들린 다리 한 짝에 순식간에 반쯤 들린 몸이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우현이 짐짓 화를 내는 것 같았지만 다른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성규는 느릿하게 두 눈을 떠보았다. 차가운 바닥에 쓸리는 뒷목이 피에 젖어 축축했다. 잠에서 깨어났던 순간처럼 다시 시야 주변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꿈이었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우현의 안쓰러운 표정이 성규를 내려다보았다. 우현아, 다 꿈이었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목이 메여왔다. 자꾸만 옅어지는 애틋한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잠이 드려는 눈을 힘겹게 떠보았다. 들리지가 않는데, 자꾸만 입을 벙긋거리는 바보 같은 그를 안심시키려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량이 적어서 죄송합니다. 계속 이런 저런 일들로 바쁘다 보니 스토리라인이 있어도 생각한 만큼의 분량이 나오질 않네요.
미흡한 글이나마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규가 호원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유,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통화를 하던 우현이 멈춰버린 사고현장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 답은 모두 제목에 있답니다.
이제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으리라 생각되네요. ^_^
1화부터 사용되었던 BGM은 모두 남아공 케이프타운 출신 인디밴드 Civil twilight의 노래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