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23
w.규닝
23. 델리 스파이스
"…야."
긴 침묵 끝에 겨우 꺼낸 건 화를 억누르다 못해 뱉어낸 낮은 목소리였다.
우현이 제 손바닥 위로 올려진 물건에 한참동안이나 고정하던 시선을 성열에게로 옮겼다. 야, 입을 뗀 우현이 손바닥 위의 물건을 쥐려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생경하게도 손가락 끝으로 잡혀왔다. 반대편 빛이 스쳐 보일만큼 얇디 얇은 천은 우현의 손 위에서 다시 한 번 즈려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것을 꽈악 잡아 쥔 손은 우현이 아프도록 문 입술을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겨우 전해주겠다는 소식이 이렇게 좆같을 줄은 몰랐는데. 우현은 아까보다 한 층 더 당황스러운 눈을 하고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성열의 앞으로 제 손을 두어번 흔들었다. 이게 뭐냐고,
"물었다."
"……."
"이게 뭔지, 세 번 물었다고."
재차 묻는 목소리는 더욱 단호했다.
하얀색 리본.
언제인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적 흘리듯이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가까운 지인의 장례식장. 한참이나 고개를 꺾어서 올려다봤을때서야 보게 되었던 사람들 머리에 꽂혀있던 흰색 리본. 그 미미한 잔상을 떨쳐내려 지끈거려오는 머리에 인상을 찌푸린 우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그 때의 리본. 김성규와 관련된 소식을 전해준다면서 가져다 준 소식이 겨우 이것인지를 묻고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을 다문 우현이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는 성열을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오는 제 말에도 꿋꿋이 열리지 않는 입이, 그마저도 원망스러워 열이 오른다.
"기일."
"……."
"뭐 그런거라도 되나보지?"
"내가 저녁 즈음에 부르려고 했는데, 니가 대뜸 찾아 온거야."
점점 더 화가 오르는 우현의 말을 자른 성열이 매장 안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지금은 말 할 여건이 안 되잖아."
"지금 말 해."
"아르바이트 중이고."
"짧게 말 해. 그 대답만 들으면 아마,"
저녁 즈음이라도 널 볼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해오는 우현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성규의 소식을 죽음으로 받아들인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한 반응이기도 했고. 죽었어, 혹은 기일이야, 하는 천 마디 말보다 건네 받은 흰색 리본에서 더욱 큰 무언가를 느껴야 했던 사람 치고 냉담한 대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기일인 거냐고. 혹시 그렇다면 그렇다는 대답이라도 내 놓으라고, 그러면 아마 속으로라도 김성규 안녕을 …빌어주겠노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입은 방금 전까지도 단호한 대답을 내뱉던 때와는 다르게 단단히 굳어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성열의 눈과 지독히도 제 시선을 맞추고 있는 와중에도.
끝나고 연락할게,하는 성열의 대답이 무색하도록 먼저 그 자리를 빠져 나온 것은 우현이었다.
편의점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처음으로 성규와 눈을 맞추었던 세번째 칸 계단이었다. 무릎이 다 나가고, 어깨선마저 드러낼 정도로 허름한 옷을 걸친 주제에 카드로 참치 캔을 계산해 나왔던 성규가 앉았었던 곳은 꼭 저만큼이나 허름했던 계단의 세번째 칸. 놓아둔 참치캔에 머리를 박고 허겁지겁 식사를 해 대던 고양이의 머리통에 제 손을 얹고 있었던 그 날의 김성규는,
있지도 않은 세번째 칸 계단 위에서 선명하게도 되살아났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느린 고개는 천천히 들어올려져 우현과 제 눈을 맞추어오고 있었다.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전에 사라진 성규의 잔상 아래로는 누군가 버린 빈 캔이며 마른 안주 껍질이 보란듯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우현이 어느새 뜨거워진 눈을 돌려 그 자리를 내려왔다. 그러자 발에 채이는 건ㅡ정말이지 마주하기도 싫은, 김성규와 연결 된 물건들 하나하나. 우연히도 버려져 있었던 탓에 우현의 발에 채인 참치 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저 멀리까지 걷어차여져 굴러갔다.
"죽었는데."
이렇게 정말로 뒤져버렸다는데, 너는 왜 아직도 이 편의점 앞에 머물러 있는 거냐고. 우현이 세게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너무 오래, 세게 쥐고 있었던 탓에 보기좋게도 구겨진 흰색 리본이 다시금 드러났다.
이런 소식일거면 차라리 전해주지 말았어야지, 이성열.
굳이 이렇게까지 확연하게 말해주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모든 것을 깨트려오는 기분이었다. 확인 사살. 누가 생각해낸 것인지는 몰라도, 완벽하고도 완벽한 확인사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묻지 않고 있었잖아. 일부러 너에 관한 건…외면하려 들고 있었잖아. 볼품없이 구겨진 흰색 리본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꺼트린 우현이 편의점 귀퉁이를 돌고나서야 뜨거운 눈가를 삼켰다.
* * * * *
3년 째 시작되고 있는 가을은 변함없이 지독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되었던 멍청한 만남. 말이라도 붙여 보겠다며 병신처럼 옷을 갖춰 입고 성규의 앞에 나타나기까지의 발걸음. 어쩌면 스토커일지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재료 봉지를 갑작스레 들이밀었던 성규의 발걸음이 만났던 곳, 편의점 앞 쓰레기통 옆 자리는 그 이후로 세 번째 맞는 가을에 낙엽만을 수북히 모아두고 있었다.
길거리는 변한 게 없다. 그럭저럭 살고 있는 자취방을 벗어나면 이어져 있는 완만한 언덕도, 자잘한 골목도. 밤만 되면 취객들이 비틀거리며 지나가다가 한 번 쯤은 들르게 되는 중간 지점 가로등도 낮에는 쓸쓸한 바람을 맞고 밤이면 늘 그랬듯이 불을 올렸다. 호원과 동우가 우현의 집에 찾아갈 때 즈음이면 항상 엎어진 쓰레기통이 발길에 채여 굴러다니고는 했었다.
옥탑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이미 우현의 발길이 끊긴 곳이었지만서도 알 수 있었던 건, 끊임없이 드나드는 호원과 동우, 성열의 귀띔 때문이었다. 호들갑스럽게도 옥탑방 벽화에 대해 떠들어대던 동우 때문에 듣고 싶지 않았어도 알게 되었던 사실은 조금 흥미롭기도 했었다. 무표정하게 담배를 물던 우현이 흔치 않게 귀를 기울였다. 성규형 집 가는 언덕 옆에 담벼락들 있잖아, 그저께부터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더니 오늘은 갑자기 딱! 하고 벽화가 생겼던데. 헤실거리며 잡다한 수다를 늘어놓던 동우가 오랜만에 들을만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 때 즈음이면 잠깐동안이지만 우현의 머릿속에 천사의 옥탑방이 새겨졌다 흐려졌다.
"너는 알았냐."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쌀쌀한 부슬비가 아침부터 내리고 있던 날의 오후였다.
우현을 따라서 담배를 꺼내 물던 호원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제대를 하고 나서는, 어떠한 말이라도 먼저 꺼내는 법이 없던 우현의 입이 열린 것은 정말이지 뜬금없는 타이밍이었으니까. 우산도 없는 주제에 편의점을 가겠다며 후드티 한 장을 뒤집어 쓰고 나온 우현과 나란히 걷던 호원이 어깨를 움찔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반문하는 호원에게 우현의 대답은 잠깐의 정적 후에서야 떨어지게 되었다. 그거. 김성규.
"내가 이성열한테, 흰색 리본 받았던 거. 너도 알잖아."
우현의 담배 끝이 잔비를 만나 시나브로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느즈막히 덧붙인 우현의 말에 묵묵한 시선을 앞에 두던 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와서 그런 건 왜 물어? 뭘 잘못 처먹었냐. 성규형 얘기 꺼내는 거 그렇게 싫어하는 새끼가. 너 때문에 우리 셋도 다 입 다물고 지내고 있구만."
"그냥 생각난거야. 알고 있었냐고."
"당연하지."
"니들은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냐.
아직 절반도 닳아지지 않은 담배를 바닥으로 뱉어낸 우현이 상가 골목으로 접어들고 나서야 씩 웃었다.
진짜 미친놈이. 우현의 웃는 표정을 마주한 호원의 얼굴이 뜨악하며 일그러졌다. 돌아버린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정말이지 느닷없는 대목에서 저렇게나 가식적으로 웃음을 짓고 있는 우현의 얼굴에 질색하는 표정을 하며 한 발자국 정도 뒤 떨어진 호원이 제 팔뚝을 쓱쓱 문질었다.
"나도 방법 좀 알려줘라."
담배를 떨궈낸 우현에게서 비에 섞인 매캐한 담배 연기가 섞여 나왔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 정도로 잊고 싶으니까."
지금 당장 죽지 않아도, 언젠가 그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같지도 않은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거. 죽으면 왜,하늘에서들 만난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아무렇지 않게 3년 전처럼 재회하고 싶으니까 하는 말이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죽고 싶은 마음을 참아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하늘에 내가 주고싶은 장미라도 사 들고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현의 말에 대답마저 생략하고 고개를 돌린 호원이 아까보다 잦아진 비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보고싶으면 보면 될 일을 가지고, 너는 뭐가 그렇게 어렵냐고 묻고 싶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당사자들의 일인 것은 분명하니까.
*
그리고나서 다시 찾은 편의점 앞은 불이 나간 가로등에 평소보다 어두운 공기를 갖고 있었다.
호원과 동우가 실컷 떠들다가 돌아간 늦은 오후에 하릴없이 채널만을 돌려대던 우현이 저도 모르게 슬리퍼를 챙겨 신은 탓이었다. 오후 내내 내리던 부슬비가 언제쯤 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은 아까보다 더욱 상쾌한 공기로 우현을 맞았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누워 있느라 뻗친 머리가 거슬리면서도 두어번 매만지고 자취방을 나선 우현이 밑창마저 떨어져나가려 하는 슬리퍼를 챙겨 신으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편의점에 가려던 길이고 하니까, 들린다면 이성열에게 맛있는 거나 사다줄 겸 슬리퍼도 새로 하나 사야겠다고.
편의점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건 김성규. 허름한 천사. 천사라기보다는 잔혹하고, 악마라기보다는 달콤했던 김성규. 옥탑방 천사. 우현이 저만치서부터 계속해서 걷어 차며 오던 돌멩이를 마지막에는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에 멀찍이 굴러간 돌멩이가 반쯤 빈 쓰레기통에 부딪혀 깡,하는 소리가 고요한 편의점 앞을 울렸다.
우현의 고개가 성열이 졸면서 일을 하고 있을 편의점 카운터 부근으로 돌려졌다.
환한 형광등 빛을 쏟아내고 있는 편의점 덕에, 그 앞에 선 가로등이 몇 달째 고장으로 불이 꺼져 있음에도 하나도 어색할 것 없는 거리였다. 방금 전까지도 땅을 적시고 있었던 비 탓에 진한 색으로 물 든 콘크리트가 눈에 들어왔다. 우현이 집에서부터 물고 나온 막대사탕을 입 안에서 굴려대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 앞에 다다라서야 눈에 들어온 것은 좁은 계단이었다.
계단 위 세번째 칸 만큼은 동그랗게 밝은 회색으로 남아 있었다. 우현이 도르륵,사탕을 굴리며 걸음을 떼다가 그 자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마 비가 오는 내내 그 위에 무언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이 분명한 노릇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김성규가 참치 캔을 적선하고 있었던 그 날 오전처럼 좁다란 자리 하나가 눈에 밟혀서.
습관처럼 계단 앞 쪽에 걸음을 멈춘 우현은 밝게 남아 있는 계단 위로 시선을 던졌다.
고양이도 없고, 돌봐줄 사람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계단 같은 게 뭐라고 이렇게 멈춰 선 것인지는 모르겠다. 우현은 편의점 문을 등지고 앉아 비가 스미지 않은 계단 맡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무릎을 굽히고 계단에 앉고 나서야 드는 건 물밀듯이 밀려오는 후회였다. 뭐 좋자고 이 곳에 걸음을 멈춘 건지. 우현은 그 때의 그 고양이가 금방이라도 캔을 뜯으러 골목 안쪽에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시덥잖고도 우스운 생각을 하다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뭐, 진짜로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놈들한테 줄 캔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지만서도.
그렇게 편의점에 도착하고나서도 한참동안이나 계단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던 우현이 지금까지 보고 있던 계단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려 부러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보고 있어봐야 좋은 추억이 찾아드는 것도 아니고. 이 쯤 해야 좋을 것 같아서. 야간 알바 주제에 맨날 졸기 바쁜 이성열이 오늘은 열심히 카운터나 보고 있을지 궁금해진 우현이 계단에서는 그 쯤 하고, 눈을 돌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고양이 갔는데."
소리나게 무릎을 털고 일어나 몸을 돌린 우현의 코 앞에 닿은 것이.
"일찍 오지. 그러면,"
한 발자국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마주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봤을텐데."
언젠가,
ㅡ읽었던 책에서처럼, 천사는 아무도 모르게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 대목을 읊어주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게끔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완벽하게 신비롭던 앞머리가 그 때와 달리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우현의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우현은 크게 떠진 제 눈 앞에 드리워진 새까만 앞머리가 비가 일고 간 잔바람에 흐드러지게 흔들리는 것을 느린 화면으로 훑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도, 우스울만큼 여전히도 묘한 눈이 제 턱 언저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꿈쩍 않고 서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에는 굳어버린 눈동자를 아래로 내릴 수도 없을 만큼 그 자리에 못이 박혔다.
재회라는 순간은, 뱉는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였다. 비가 걷히고 난 기운이 눅눅하게도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우현의 눈이 일정한 간격으로 똑 똑 떨어져내리는 편의점 슬레이트 아래의 물방울을 억지로 마주하다가 눈동자를 내렸다.
천사가 들고 있던 우산에서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이 우현의 바짓자락을 천천히 적셔오고 있었다.
물에 빠진다면, 모서리부터 천천히 젖어오는 수채화처럼ㅡ 천사의 눈에 제 눈을 맞춘 우현의 사고회로가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