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도 컨셉은,
금욕적인 준면,
안달난 경수.
면도ㄹㅂ♡
- ep.3 대화가 필요해-
*
ep.3 -대화가 필요해-
디오꾸띄르와 멀지않은 서울 중심가에 35평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제일 먼저 신발장이 보인다. 구두, 운동화, 슬리퍼, 스니커즈. 모두 비슷한 무채색깔에 비슷한 디자인이다. 복도를 지나 거실. 별 거 없다. 두꺼운 암막커튼으로 가려진 거실 유리창. 침대같은 검은색 가죽쇼파. 그리고 커다란 TV와 음질좋은 스피커. 화분 몇 개. 투명한 테이블위에 놓인 빈 맥주캔 다섯개. 어제 경수가 자기전에 들이마신 소듕한 흔적들이다. 주방은 처음 아파트 시공할때 디자인해놨던 그 모습 그대로다. 좀 더 지나 옷방이 있고 가장 큰 방으로 들어오면, 경수가 잠들어있는 침실이 있다. 벽 한 쪽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어서 햇빛 들어오기도 좋고 마치 커다란 액자를 보는 것처럼 한강이 보이고 밤엔 야경이 펼쳐지지만 경수는 잠자는데 방해된다며 이마저도 두꺼운 암막커튼으로 모두 가려버렸다. 그래서 경수는 해가 중천에 떠도 낮인지 밤인지 구별 못하고 처잔다. 침대 원목은 검은색, 시트는 하얀색, 이불도 하얀색, 베게도 하얀색. 그리고 누워있는 경수도 하얀색.
- 띵동~♬
“……”
- 띵동~♬
계속된 초인종 소리에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덮었다. 택배면 죄송한 일이지만 택배원 아저씨가 알아서 경비실에 맡겼을때고 밀린 세금도 없으니 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자기합리화를 시킨 경수는 작은 몸으로 이불을 돌돌 말아 아직 남아있는 잠기를 즐겼다. 잘때 무언갈 걸치고 자는 성격이 아니라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드로즈 팬티에 반팔티차림으로 잠을 잔다. 맨살로 느껴지는 부들부들한 이불감촉이 끝내주게 좋다. 그나저나 지금 몇 시지...베게 맡에 쑤셔박아넣어놨던 핸드폰을 찾아꺼냈다.
“…아, 배터리…”
충전하는 걸 깜빡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비몽사몽중에 배터리를 갈고 전원을 켰다. 오후 2시. 하루가 지났다. 오래도 잤네. 핸드폰을 켜기무섭게 많은 문자메시지와 부재중 전화 알림이 울렸다. 모두 디오꾸띄루 관련 문자와 전화지만 경수가 안받으면 다들 알아서 찬열에게 전화를 넘긴다. 참 모자라지만 고마운 친구다. 그때 찬열에게서 방금 보낸듯한 따끈따끈한 카톡이 전송되어 왔다.
[z존멋찬열z] : 죽여버릴거야
일어나자마자 받은게 살인예고라니. 눈을 부릅뜨고 뒤늦게 밀린 카톡들을 읽기시작했다.
[z존멋찬열z] : 도경수 대표님
[z존멋찬열z] : 대표님
[z존멋찬열z] : 님아
[z존멋찬열z] : 야
[z존멋찬열z] : 어디로 토꼈냐. 뒈지기싫으면 말해. 입술터진 나한테 미팅 떠넘겨놓고 !!!(분노)(분노)(분노)(분노)(분노)(분노)~!!!
[z존멋찬열z] : 미팅끝남. 넌 진짜 뒤졌음.
[z존멋찬열z] : 죽여버릴거야
…별 내용 아니네! 알아서 잘했겠지! 다시 핸드폰을 베게 밑에 넣고 잠 잘 채비를 했다. 하루쯤은 이렇게 늘어져도 괜찮아. 일주일이 빡빡하니까. 오늘같이 수면 삘이 온 날에는 자줘야해...아, 근데 입에서 맥주쉰내나네. 결국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기둥에 걸쳐져있는 바지를 뒤집어입고 어기적어기적 주방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대충 속을 깨우고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끔벅거리며 또 한번 멍을 때렸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싫다. 밥먹는것도 귀찮고 씻는것도 귀찮고. 소파에 좀 더 몸을 눕히는데 문득 테이블 밑 수납공간에 처박힌 웨딩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잡지에서 봤어. 인터뷰한거랑 니 사진보고 알았어. ’
공원 벤치에서 준면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마 저 웨딩잡지 인터뷰를 말하는 것 같던데.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둘러 잡지를 뒤적거렸다. 휙 훑어보던 경수의 표정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잡지를 던지듯 내려놓은 뒤 서둘러 기자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 기자님, 지금 잡지보는데 인터뷰 전에 약속했던 내용이랑 다르잖아요. 제 얼굴 나온 사진 뭐에요, 구석에? 그리고 말이 구석이지 겁나 대따 크게 나왔네요? 예? 공인이요? 지금 공인이라 그러셨어요? 아니 제가 왜 공인이에요?”
마음같아선 다 거둬들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다한들 준면이 이미 잡지를 봤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미없는 화풀이일 뿐이다. 더군다나 이런 유명잡지사에서 신인 디자이너의 버릇없는 요청을 들어줄리도 만무했고. 신경질적을 전화를 끊은 경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지었다.
“아으, 짜증나잉…”
아마 준면은 또 다시 샵에 찾아올 인간이다. 그땐 어떻게 해야하지.. 영국에서 6년동안 디자인 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3년 내내 브랜드 론칭과 디오꾸띄르 작업에만 몰두하며 겨우 준면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결국 흐릿하게만 잊고 있었나보다. 에휴. 얼른 씻고 샵에 가봐야지. 하품을 하며 소파에서 일어나자마자 벨이 울린다. 010-25xx-xxxx... 모르는 번호인데..
“여보세요?”
대출전화이거나 장난전화인 경우가 대다수라서 모르는 번호는 원래 잘 안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쎄한 느낌에 통화버튼을 눌렀고 건너편에선 아무말도 들려오지않았다.
“누구…세요?”
[…아, 맞구나.]
작게 들려오는 준면의 목소리에 바로 후회했다. 아, 그냥 받지말걸. 왜 나댔지, 으휴 병신.
“…김준면?”
[어,큼, 나야.]
준면은 긴장한듯한 목소리였다. 그건 경수도 마찬가지였고.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샵에서 직원한테 부탁해서 명함얻었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
“……”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나쁠 건덕지도 없다. 준면이 자신에게 전화하면 안될 적당한 이유가 없었음으로. 그저 전 남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왜 전화했어?”
[시간 괜찮아?]
시간이야 널렸고 없으면 만들면 된다만, 내가 널 마주할 용기가 있을까? 엄지 손톱을 깨작깨작 깨물며 잠시 사색에 잠겼다. 사실 자신도 궁금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왜 김준면을 자신을 만나려고 할까. 무슨 말을 하려고? 우리 관계는 9년전 쫑났고 서로 서른을 앞두고 있는 상황인데 다시 시작하자는 그런 신파같은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그리고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걸까.. 하긴. 다시 만난 김준면은 나이를 어디로 먹은건지 여전히 젊어보이고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고 또...
[경수야. 듣고 있어?]
“…어어.”
저 '경수야'하면서 불러주는 목소리는 9년전과 똑같고. 그래, 만나자. 아무 사이 아닌데 이렇게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 더이상 김준면 마주칠때마다 이렇게 신경쓰이기도 싫고 만나서 쿨하게 담판을 지어야지. 난 지금 오랜친구를 간만에 만나러가는거야! 스스로 다독인 경수가 준면과 저녁 시간으로 약속을 잡고 채비를 시작했다. 오늘 날씨나 좋았으면 좋겠네. 중얼거리며 거실 커튼을 휙 열어재꼈다.
“…fuck...”
부슬부슬 비가 온다. 하늘은 어두컴컴하고 공기도 무겁고...비오는 날이 운치있다고 좋아는 했지만, 그래도 전남친 만나러가는데 비라니. 한숨을 쉬며 커튼으로 다시 창문을 가렸다. 그나저나 뭐 입지? 파닥파닥거리며 옷방으로 들어간 경수는 모든 옷장 문을 열어놓고 고민에 잠겼다. 음, 이 바지는 불편하고. 이 옷은 너무 멋부린 것 같잖아! 이 셔츠는 쭈글쭈글하고... 저 맨투맨은 비오는 날 입기에 조금... 수많은 옷을 한참이나 바꿔가며 몸에 대보다가 멈칫했다. 자신은 분명 커다란 전신거울앞에 서서 설레여하고 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아아, 이게 아니지. 일단 씻자!”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헝클인 경수는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 * * *
경수와 꽤 수월하게 약속을 잡은 준면은 벌써부터 비실비실 웃음이 나온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돌아와 모니터 앞에 밀린 서류들을 봐도 그저 웃음만 나온다. 그나저나 옷을 갈아입고 가야하나? 아니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려면 빠듯하다. 무슨 말을 해야하며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될까. 9년전? 아니, 9년후의 지금? 우리 사이를 어떻게 해야할까. 한참 생각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김희연]
액정에 뜬 이름에 인상을 쓴 준면은 일말의 고민없이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 후 몇 번 더 전화가 걸려왔지만 준면은 모두 수신을 거절했다.
* * * *
‘ 가을 빗소리가 들려
조용히 내리는 이 빗소리
이런 날엔 네 목소리도 들려
다정히 날 부르던 목소리비 오는 창문 밖 가로수에 네가 서 있을 것 같아
문을 열고 기억 저편 널 만나러 뛰어 나갔죠 ’- 윤도현의 ‘빗소리’ 中...
* * * *
가을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오후 7시. 디오꾸띄르 건물 지하의 개인작업실에서 의미없는 스케치를 하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할 채비를 했다. 그래봤자 약속장소가 바로 옆 건물 까페였지만. 거울을 보고 옷에 묻은 실밥이나 천 조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깔끔한 베이지색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튀어보이지도 않고 딱이다. 문 옆에 세워둔 우산을 들고 작업실을 나섰다. 이제 막 스튜디오에서 샵으로 건너온 찬열이 지하에서 올라오던 경수와 마주쳤다. 경수가 또 어디론가 나갈 모습인 것 같자 두 팔을 벌린 찬열이 그 앞을 홱 막아선다.
“야, 도경수. 너 어디가냐.”
“중요한 약속있어. 비켜.”
귀찮은 말투로 비키라는 손짓까지 해보였는데 허우대 튼실한 놈이 더욱 막아선다. 이게 미쳤나 왜이래?
“비키랬다.”
“일 좀 하시죠, 대표님? 아무리 니가 천재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분명 비키라고 했다.”
“아무리 니가 대표 겸 총괄 디자이너에 이것저것 일이 많아도,”
“야.”
“이렇게 땡땡이를 까면 샵이 제대로 돌아,윽!”
우산 꼭지가 정확히 찬열의 중요부위를 강타했다. 콕 찌른것도 아니고 쿡 쑤시듯이... 중요부위를 감싼 찬열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계단에 주저앉는다. 그러던말던 찬열의 등을 무릎으로 찍으며 넘어가 우산을 펼쳤다. 투둑투둑. 꽤 굵은 빗줄기가 우산을 건드린다. 몇 걸음 안 되어 도착한 까페 앞에서 경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긴장 안 한 것처럼. 까페 유리창으로 머리를 정리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는 까페 안에서 창가 쪽에 앉아있는 준면을 한번에 발견했다. 경수를 보고 살짝 미소지으며 어색하게 손을 흔든다.
“비 오는데 내일 보자할걸 그랬나?”
“아냐. 나 비오는 거 좋아하잖아.”
“아아-... 그랬었지.”
이거 내거야? 경수는 자신 쪽에 놓인 라떼를 보며 물었다. 휘핑크림과 초콜릿 시럽이 맛깔나게 뿌려져있는 라떼는 자신의 취향을 잘 아는 준면의 주문이었다. 9년이 지났는데도 안 잊고 기억하네.
“…잘 지냈어?”
준면의 첫 질문이다. 잘 지냈냐고? 음. 뭐 딱히 별탈없이 잘 지낸 것 같다. 다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준면이 그립고 보고싶다는 생각에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는 게 조금 힘들었을뿐.
“응. 넌?”
“뭐, 그럭저럭.”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면은 썩 잘 지낸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 표정만 봐도 잘 알고 있는 경수였지만 굳이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라떼를 마시며 티안나게 준면을 천천히 살폈다. 여전히 세련되고 멋지고 행동 하나하나가 반듯하다. 그리고 경수는 자기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게 준면 때문이 아닌 가을비가 내리는 운치있는날, 잔잔한 노래가 나오는 까페에서 라떼를 마시고 있기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9년동안 어디있었어?”
“……”
준면이 커피를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마치 9년 동안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전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았다.
* * * *
잠시후, ep.4 [그들의 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