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2) [그들의 9년]
*
눈발이 굵어졌다. 거리를 거닐때마다 나는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좋았다. 수능성적표를 받아든 두 사람은 모두 흡족한 표정이다. 수학 공부를 빡세게 하던 준면은 등급이 훌쩍 올라서 지망했던 대학보다 좀 더 높은 대학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고 경수도 평소 나오던 성적보다 더 오른 성적을 받았다. 교복마이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경수네 아파트 앞 따뜻한 까페안으로 들어갔다.
“난 아메리카노. 경수 넌 라떼맞지? 휘핑크림이랑 초콜릿 시럽 얹어서.”
“응응.”
준면은 주문을 하러가고 경수는 준면이 선물했던 목도리를 돌돌 풀어 옆자리에 놓았다. 이제 교복 입을 날도 얼마 안 남았네. 턱을 괴고 창밖을 구경했다. 거리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다. 이 빨간 목도리도 작년에 준면이 줬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문득 되돌아보니 항상 준면에게서 받기만 한 것 같다. 목도리도, 그리고 애정담긴 말들과 사소한 행동과 배려들까지도. 흠. 이번에는 내가 무언갈 해주고 싶은데. 경수는 고민에 잠겼다. 준면이 무얼 필요로 할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진동벨을 내려놓으며 경수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그냥. 창밖 구경하고 있었어. 대답하며 준면을 천천히 살폈다. 흠, 운동화는 산 지 얼마 안 됐다했었고... 저 장갑은 경수가 며칠전 4주년 선물로 준 거 였고...뭘 주면 좋을까. 그냥 직접 물어봐야겠다.
“김준면, 너 크리스마스에 뭐 받고 싶어? ”
“그 생각하고 있었어?”
왠지 내가 항상 받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게 중얼거리며 꽁꽁 언 손을 주머니에 넣고 꼬물꼬물거렸다. 자존심빼면 시체인 경수는 사랑하는 사이에 주고받는 행위에 대해 자존심을 세우긴 싫었지만, 약간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준면은 경수가 지나가는 말로 먹고 싶다고 한 것들은 까먹지않고 사줬고 가고 싶다고 말한 곳은 시간이 조금 걸려도 데려가곤 했다. 하지만 이모집에 좋게 말해서 같이 사는, 나쁘게 말하면 얹혀사는 경수는 재정상황이 그리 좋지않았다. 엄마는 출판사 원고 교정을 하며 적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용돈 달라는 말은 스스로도 너무 철이 없다는 생각에 주말마다 몰래 알바를 뛰기도 했다.
“난 니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 그런 생각 안 해도 돼.”
으휴, 재미없는놈. 누구 애인인지 말 한번 멋드러지게 하네. 한창 따분한 이야기들을 하다가 대학 진학 이야기로 넘어갔다.
“경수, 너 진짜 디자인 쪽으로 갈거야?”
“응.”
경수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준면의 표정은 조금 애매했다. 경수의 미적 감각은 친구들과 학교에서도 알아줬고 몇몇 대회에서는 꽤 높은 상을 받았다. 다만, 비싼 재료값과 학원값. 그리고 대학 진학 후에도 이어질 재료비 등등...경수는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는 했지만 그걸로 미대의 비싼 등록금과 재료비,교재비는 분명 다 충당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경수 성적이면 국립대에 가고도 남을 성적인데, 굳이 미대를 가야할까. 준면은 여러번 좋은 말로 경수의 감정이 상하지않게 말했으나 경수의 뜻은 단호했다. 원하지도 않는 과에 가서 시간썩히고 싶지않다고.
“준면아. 무슨 생각하는 지는 잘 알겠는데 내 인생, 니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으니까 내 힘으로 알아서 잘 해보고 싶어. 항상 신경써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준면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더 이상 말을 않기로 했다. 사랑하는 경수 결정이니까. 그리고 사랑하니까. 진동벨을 톡톡 건드리는 경수의 손을 빤히 보던 준면이 얼른 가방을 뒤적거려 핸드크림을 꺼냈다.
“손.”
경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두 손을 내밀었다. 핸드크림을 습관처럼 바르는 준면은 손이 항상 촉촉했지만 경수는 항상 손이 건조했다. 손등에 조금씩 핸드크림을 짜서 부드럽게 경수의 손에 발라주기 시작했다.
“으- 끈적거려.”
“그래도 발라야해. 손 텄잖아. 여기서 더 트면 쓰라려. 그리고 너, 내가 저번에 준 핸드크림 어쨌어? ”
“집에 잘 있어.”
“가지고 다니면서 바르라니까.”
그 놈의 잔소리. 엄마에게 듣는 잔소리보다 준면에게 듣는 잔소리가 훨씬 더 많다. 손톱뜯지마라, 다리떨지마라, 허리펴라, 뛰지마라, 조심해라, 손 꼭 씻어라, 물 자주 마셔라 등등....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들어온 말들이다. 경수의 체질을 잘 알고 있는 준면은 마치 전담 트레이너처럼 경수 몸 관리에 신경을 썼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에 하는 잔소리들이지만그 잔소리들이 귀찮을때가 더 많았다. 집에서도 듣는 잔소리, 밖에서도 들어야하나 싶어서. 하지만 모두 살이 되고 득이 되는 말들뿐이다.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핸드크림을 발라준 준면이 징징 울리는 진동벨을 들고 커피를 받아왔다. 따뜻한 라떼에 부드러운 휘핑크림! 달달한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경수가 조심히 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으으, 짱 좋아.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시럽없이 먹는 준면은 달콤함에 베시시 웃는 경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간질거리면서 달달해졌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까페 음악은 조용조용 차분하고, 그리고 앞엔 눈처럼 하얗고 사랑스러운 경수가 앉아있고. 참 행복한 오후다.
“얼른 머리 염색하고 싶다.”
경수는 늘 검은 머리색이 지겹다고 했다. 19년 가까이 같은 머리색으로만 사는게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 하지만 준면은 경수의 염색을 극구 반대했다. 경수에게 차분한 흑발 생머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뽀얗고 하얀 피부에 눈은 초롱초롱하고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촉촉하게 반짝거리고... 한 눈에 다 담기가 황송하고 벅찰 정도로 경수는 예쁜 아이였다.
“지금도 충분히 예뻐. 그리고 염색하면 머릿결이 얼마나 상하는데.”
“요즘엔 염색약 좋아져서 그렇게 많이 안 상한댔거든? 맨날 하지말라는거 투성이야. 너도 염색하면 잘 어울릴텐데.”
준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무 강박적으로만 사는 것 같다, 준면은...가끔씩은 일탈도 하며 자유롭게 살아야 재밌는건데.
“크리스마스에 뭐할까?”
“음...글쎄.”
화제는 크리스마스로 넘어갔다. 매년 하는 건 영화보고 밥먹고 같이 다니고. 딱히 생각이 안 나서 라떼만 홀짝거리고 있는데 경수의 손을 잡은 준면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해보였다.
“경수야.”
“…응?”
묘한 분위기에 손에 들고 있던 라떼잔을 내려놓고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무슨 얘기를 하려고 밥솥마냥 저렇게 뜸을 들6여?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던 준면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진짜 많이 사랑하는거 알지?”
당연히 알지. 모를리가 있나? 매일 준면이 자신을 보는 눈빛과 말투, 행동들에 애정이 듬뿍 담겨있는데 그 많은 사랑을 모른다면, 천하의 나쁜놈에 썅놈이지. 준면이 갑자기 외로움을 타나싶어서 경수는 잡아오는 손을 덩달아 꼭 감쌌다.
“나도 진짜 많이 사랑해.”
“…경수야, 우리…”
준면이 잠시 말을 멈춘 뒤 긴장한 듯, 잡은 손에 힘을 꼭 줬다.
“…결혼…할까?”
“응?”
결혼? 지금 결혼이라고 한거야? 경수의 표정이 벙쪘다. 며칠전 연예 뉴스에서 유명 영화감독과 남자배우가 동성결혼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많은 동성 부부가 혼인신고를 하며 자유롭게 남의 눈치안보고 결혼식을 올린다고는 하지만...
“물론 지금 당장하자는게 아니라… 졸업하면 혼인신고하고 싶어서, 너랑.”
김준면이 이렇게 다이렉트적인 남자였었나? 경수는 자세를 고쳐잡고 잠시 할말들을 정리했다. 물론 사랑하는 준면과 결혼, 좋다. 동성 커플은 주위의 시선과 고난만큼 더욱 단단하고 돈독하다는걸. 그래서 연애때부터 결혼을 염두해둔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혼인신고’라는 네 글자를 듣자 가슴이 쿵쾅쿵쾅거리며 뛰기시작했다. 아직 연인사이라는걸 아무에게도 밝히지않았고 게다가 그 전에 커밍아웃도 하지않은 상태인데...
“경수 너가 부담스러워할까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수능마치고 우리 둘 미래 생각하면서 확신이 섰어.”
수능 마치고 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준면은 둘 사이의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경수는 미안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졸업하고 나서, 준면과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사랑할까? 언젠가 사랑이 식지는 않을까? 서로가 너무 익숙해져서 질려버리진않을까?
“우리가 미래에 헤어져있는 모습, 생각 못 하겠어, 난. 미래에도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경수야.”
“…준면아.”
“니 생각이 나랑 같지않아도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줘.”
으으, 머리야. 자세를 편하게 바꾼 경수는 등받이에 푹 기대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장은 눈 앞에 있는 준면이 좋아죽겠지만 한치앞도 못 내다보는게 미래라고 하던데. 경수가 생각에 잠기자 준면이 씁쓸하게 웃었다.
“너 또 신경쓰겠네. 미안. 내가 너무 급했지. 신경쓰지마.”
“뭐?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너가 고민고민하다가 한 말일텐데……일단 나도 생각 좀 해볼께. 우리 미래에 대해서.”
두 사람은 마주잡은 손을 한참이나 놓지않았다.
* * * *
아파트 입구에 멈춘 택시에서 엄마는 교정 작업할 출판사 원고를 한가득 들고 내렸다. 빽빽한 원고를 교정하느라 눈이 침침해지고 잠도 못 자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직 이렇게 일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경수 대학도 보내려면, 한참은 더 벌어야한다. 빙판길에 넘어질까 조심조심 걷던 엄마는 까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두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
깍지껴 마주잡은 두 손과 행복해보이는 표정... 딱 봐도 사랑이 담긴 눈빛...그리고 주변 사람이 볼까싶어 짧게 닿았다가 얼른 떨어지는 서로의 입술.
“빠앙 - !!”
쩌렁쩌렁울리는 자동차 클락션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파트 입구 한복판에 서있던 경수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손에 있는 원고를 놓칠까 꼭 끌어안고 서둘러 인도로 몸을 피했다. 혹시나 경수가 자신을 보게 될까봐 뒤도 안 돌아보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다리에 힘이 쫙 풀려 간신히 난간을 부여잡고 몸을 지탱했다. 의심하지않으려했는데 그냥 친한 친구사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거라 생각하려 애썼는데.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니 이상하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의 아들이 다른 남자, 그것도 친한 친구라던 준면과 나누는 입맞춤을 목격하다니.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 * * *
스탠드만 켜놓은 은은한 방안.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하얀 스케치북에 의미없는 선들만 쭉쭉 그었다. 꼬불거리는 곡선을 여러차례 그었다가 직선으로 그었다가 동글동글한 방울들을 그리는 의미없는 행동들이 약 2시간동안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경수의 정신 상태 또한 마찬가지였다. 준면과 집앞에서 헤어지고 방안에 들어와 교복도 벗지않은채 내내 스케치북에 낙서만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머리가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인간의 두뇌는 꼬불꼬불하게 생겼다는데 준면 덕분에 짜글짜글 더 쪼그라들게 생겼다.
“…하아 - ”
스케치북을 바닥으로 툭 던지고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준면과 결혼이라... 일단 구청에 가야겠지? 혼인신고서를 발급받고 각자의 이름을 적고, 주민번호와 가족관계...가족관계...가족...하아... 여기서 탁 막힌다. 엄마, 그리고 이모... 사실 준면과의 결혼생활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밤에 잠을 자다 뒤척이면 손에 준면이 닿고, 아침에 눈을 뜨면 준면이 있고, 같이 먹고, 자고... 하지만 엄마와 이모는 아직 준면과 자신의 관계를 새까맣게 모른다. 그저 돈독한 친구 사이인줄만 알겠지. 덜컥 혼인신고라니! 도무지 사이를 밝힐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버지없이 키운 외동이 동성애자인걸 알면 엄마가 얼마나 큰 실망과 좌절에 빠질까. 아무리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완만해졌다고 해도 엄마에겐 머나먼 남의 얘기일텐데.
으으,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근데 얜 왜 연락이 없지? 경수는 침대 구석에 박혀있던 핸드폰을 집어들고 엎드려누운채로 준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 번을 지나지않고 목소리가 들린다.
[어, 경수야.]
“야, 김준면.”
연락이 오길 기다린듯한 목소리다. 아마 먼저 전화하는건 대답을 재촉하는 것 같아보일까봐 꾹꾹 참고 참으며 핸드폰만 들었다놨다 했을게 뻔하다. 안 봐도 비디오지.
“너어… 진짜 나랑 결혼하고 싶어?”
[알면서 왜 물어.]
“아니까 물어보지. 진짠가 해서.”
[……]
“……”
둘 다 아무말이 없다. 서로 숨소리만 주고받고 있을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경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준면.”
[응, 듣고 있어.]
“넌 결혼이 왜 하고 싶어? 날 사랑해서라는 이유 말고.”
사랑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으니까.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나중에 사랑이 식을 수도 있고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물론 김준면이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냥...폄범하지않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평범한 결혼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봤어.]
“응. 그리고 또.”
[난 연애따로 결혼따로 할 생각없어. 우리 만난지 4년이고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어른이고 진지하게 만날때도 됐고.]
“……”
[너랑 같이 있으면 행복해. 걱정도 잊게되고 단지 너 하나만 보게 되고. ]
준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아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살아가면서 얘처럼 날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싶다.
“너 나 까탈스러운거알지.”
[…알지.]
“그리고 변덕도 심하고. 덜렁거리고. 건망증도 있고.”
[가끔 애같기도 하잖아.]
“조용히해. 내가 말할거야, 듣기만해.”
[알았어.]
“나 나중에 나이들어서도 그러면 진짜 보기흉할텐데. 그래도 너 나 사랑할 수 있어?”
[상관없어. 니 옆에서 나도 같이 나이들어갈꺼니까.]
김준면 이거, 예상질문과 답변 미리 만들어놓은거아냐? 말문이 막힐정도로 완벽한 대답을 내놓는 탓에 경수는 점점 더 할말이 없어졌다.
“어쩔 수 없지. 너가 나 데리고 살아라. 평생.”
[경수야.]
“근데 그 전에,”
기쁜 목소리를 내려던 준면을 잠시 막았다.
“떳떳하게 하고 싶어. 너도 허락맡고 나도 허락맡고. 몰래 하고서 들킬까봐 눈치보며 사는 거, 난 못해. 간 작아서.”
[사랑해.]
경수도 사랑해,하고 대답하려던 때에 노크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조심히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이 엄마인걸 확인한 경수는 조금 이따 전화하겠다며 폰을 다시 베게 밑에 넣었다. 아들 뭐해? 엄마는 교정 작업을 하던 중이었는지 도수 높은 안경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냥. 생각이 조금 많아져서 스케치 연습하고 있었어. 바닥에 떨어져있는 스케치북과 펜을 얼른 다시 집어들었다. 경수의 옆 자리에 앉은 엄마가 조그만 손을 잡았다.
“걱정이네.”
“뭐가?”
“너 대학가서 기죽을까봐.”
미대는 돈많은 애들 투성일텐데. 엄마는 경수의 미대 진학을 반대하진않았지만 내심 걱정을 했다. 학비와 여러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매년 내야하는 등록금과 집과 떨어져 지내려면 자취방 월세나 기숙사 비용을 내줘야하는데, 그걸 다 감당할 수 있을까싶어서..
“걱정하지말라니까.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 받으면 되고 기숙사는 열심히해서 장학으로 받으면 되고 학자금 대출은 나중에 일하면서 천천히 갚아나가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나 자신있어 엄마.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진짜로. ”
처음 엄마가 먼저 잡았던 손은 어느새 경수가 더 잡아 힘을 주고 있었다. 그래. 엄마가 아들 열심히 공부하는데 허튼 소리했네. 검은 잉크가 묻은 손으로 조심히 경수의 손가락을 매만지던 엄마가 숨을 고르게 내쉬고 내내 생각하던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경수야.”
“응.”
아들은 여자친구 없어? 나긋나긋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살짝 목소리가 흔들렸다. 갑자기 물어오는 여자친구얘기에 잠시 멈칫했다. 평소에도 흔히 물어보는 질문이긴했지만 오늘은 뭔가 그냥 이상했다.
“저번에 말했잖아. 여자친구 생기면 바로 말해준다니깐.”
“……그럼 여자친구말고 사귀는 사람은 …있니?”
펜을 잡고 있던 손이 멈췄다. 여자친구말고 사귀는 사람...?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엄마의 얼굴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두려움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물어보기가 어렵고 숨이 막히는지 엄마는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 준면이, 사랑하니? 경수는 대답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가락을 감추려 펜을 꾹 잡았다. 거짓말을 하기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마지막 확인차원에서 물어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좋아, 김준면아. 나 지금 뭐라고 말해야해?
“…미안해”
결국 내뱉은 말은 가슴속에 맴도는 가장 초라한 말이었다. 뭐가 미안한 걸까? 말 안 하고 4년이나 숨긴 거? 아니면, 남자를 만난다는 거? 모든걸 인정한 듯한 경수의 '미안해'라는 말에 엄마는 얼굴을 감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경수는 엄마를 위로할수도 그렇다고 같이 울 수도 없었다. 눈물이 넘실넘실 넘어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굵은 눈물방울이 스케치북에 투둑 떨어졌다. 지금은 울면 안 된다.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아내고 흐느끼는 엄마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사랑해, 엄마.”
“……”
“엄마도 나 사랑하지?”
겨우 눈물을 추스른 엄마는 고개를 들고 경수를 마주봤다.
“이렇게 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나 준면이, 많이 좋아해.”
“…경수야.”
“엄마한테 계속 숨기려고 했던 건 아냐. 그냥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그때 말하려고 했었어, 진심이야.”
마음의 준비가 되면 모두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준비가 된 게 없는 지금 상황은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언제부터야.”
“…4년정도…”
“왜… 진작 말 안 했어, 왜?”
“엄마가… 흑, 엄마가, 날, 싫어하게 될까봐…”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엉엉 울면서 말할 줄이야. 경수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게 너무 무섭고 겁나서 말 못 했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런 걸 알면 엄마가 너무 실망하고 좌절할까봐. 엄마가 그랬지, 엄마는 나만 보고 산다고… 근데 어떻게 말해, 내가…”
4년동안 마음고생했을 경수를 생각하니 속이 다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여자친구있냐는 질문을 받을때마다 얼마나 가슴졸였을까. 준면과 함께 엄마앞에서 친구인 척 하는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 * * *
“ 치이이 - ”
불판 위에서 고기가 맛깔나는 소리와 윤기를 내며 익어갔다. 경수 엄마가 고기를 굽자 준면은 어쩔 줄 몰라했다.
“어머니. 제가 구울게요. 경수랑 먼저 드세요.”
“아냐. 너 먼저 경수랑 얼른 먹어. 더 구우면 질겨져.”
“그래도…”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가만보던 경수는 살짝 웃었다. 두 사람 모습이 꼭 사위랑 장모님같아서. 경수와 준면의 관계를 알게 된 엄마는 다음날 저녁, 둘을 고깃집으로 데려왔다. 경수 엄마를 만나기전 경수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준면은 바싹 긴장을 했는지 계속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댔다.
“준면이는 대학교 어디 생각하고 있어?”
“아. 저는 한국대 경영학과 생각 중입니다.”
“한국대? 거기 명문대 아니니?”
“엄마. 먹는데 대학얘기하게? 체하겠다.”
경수의 핀잔에 엄마가 아차차 싶어 하던 말을 멈추고 익은 고기를 서둘러 두 사람에게 건넸다. 준면은 먼저 먹는게 계속 신경이 쓰여 섣불리 먹질 못하는 반면에 경수는 배가 고팠던 상태라 이것저것 입에 쑤셔넣고 있다. 너 왜 안 먹어? 영 시원찮게 먹는 준면이 걱정됐는지 고기를 집어 소금장을 톡톡 찍어 입가에 들이민다. 내,내가 먹을게. 당황하며 경수가 건넨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으려 하자 경수가 고개를 저었다.
“얼른 아- 해.”
“…어,어머니가 보고 계시잖아.”
작게 소근거린 준면이 겨우겨우 고기를 받아먹고 얼른 물을 들이켰다. 그게 뭐 어때서? 이미 다 안 마당에. 경수는 여의치않고 계속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준면의 입가에 음식을들이댔다. 지금 보니 참 훈훈한 모습이다. 한참 쌈을 싸먹던 경수가 목이 막히는지 켁켁거리자 준면은 얼른 사이다를 따라 경수에게 건네고 등을 두드려준다.
“괜찮아? 그러길래 천천히 먹지.”
“으으, 죽는 줄 알았네.”
가슴을 두드리며 고기를 겨우 넘긴 경수가 고기를 먹지 않고 자신과 준면만 빤히 보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만 왜 안 먹어?”
그냥.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다. 경수가 만나는 남자가 준면이라서, 다행이라 여겨도 괜찮은…거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