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스트
5년 사귄 전 애인 갑을로 재회하는 썰
w. 랑데부
1.
"갈게"
"어? 어어 잠깐만 금방 끝나"
"괜찮아. 해도 돼, 다음에 보자"
영현은 노트북과 닫힌 문을 번갈아 보다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금이 아니면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최대한 ㅇㅇ와 만나는 날은 일찍 끝내고 ㅇㅇ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 영감은 불쑥 불쑥 찾아오고 놓쳐버리면 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영현은 다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두시가 훌쩍 넘어 떨어진 커피에 영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러모로 방해를 받아내고 있었다. 겨우 두 세장. 어째 머리가 텅텅 비어 도는 것 같았다.영현은 갑갑한 마음에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영현은 급하게 겉옷을 집어 들고 방을 뛰쳐나갔다. 차키, 차키 아. 항상 올려두던 자리에 없는 물건이 영현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영현은 아일랜드 식탁을 빠르게 훑다 결국 신발을 우겨 신었다. 빗방울이 꽤나 굵었다. 왜 비가 오는 줄도 몰랐을까. 왜 오늘 날씨를 기억하지 못했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속이 역류할 것 같았다. 영현은 ㅇㅇ의 집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다 떨어졌다. 새벽 두 시 반, 대책없이 뛰어왔다. 영현은 혹여나 ㅇㅇ가 깰까 아주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리릭, 잠금이 풀리는 소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야단이라도 치고 싶었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ㅇㅇ는 옷을 반쯤 벗어두고 소파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다. 아직 옷자락이 마르지 않아 군데 군데 짙은 색을 띄었다.
"자기야"
왜 여기서 잠들었어. 영현은 조심스럽게 ㅇㅇ를 안아 들었다. 습관적으로 ㅇㅇ는 따뜻한 온기를 찾아 파고 들었다. 침대에 마주 눕히려 했지만 ㅇㅇ는 영현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옷을 갈아 입혔다간 잠에서 깰 것 같았다. 영현은 한 손으로 이불을 끌어와 덮어 주었다. 여전히 빗방울이 거세게 창을 때리고 있었다.
*
"맞는 거 같은데?"
"맞아? 싸인 받아도 되나?"
"가기전에 잡자. 사진 찍어도 되려나? 가자가자"
영현은 스타 작가였다. 작년 판매 부수 1위에 올랐고 최근엔 방송에 몇 번 출연하기도 했다. 영현은 정중히 팬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오랜만에 만난 데이트였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을 피해 조금 일찍 영화관으로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ㅇㅇ는 꼬물꼬물 영현의 손을 쥐었다. 영현의 표정이 녹아내렸다는 말이 가장 적합할 듯 했다. 깍지로 바꾸어 쥔 영현은 빠르게 ㅇㅇ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풍기문란 죄야 이거"
"이것도?"
영현이 꼭 쥔 손을 들어 보였다. 입 벌려봐. ㅇㅇ의 말에 영현은 착실히 입을 벌렸다. 아, 야 ㅇㅇㅇ. 영현은 입 안으로 불쑥 들어온 빨대에 기가 찼다.
"콜라나 마시세요"
"영화 보고 집에 갈 거야?"
"그럼 어디가. 늦었, 에헤이"
"에헤이"
ㅇㅇ를 따라 하는 영현의 표정이 너무나 순진무구 해 어이가 없었다. 공공장소에서 너무 잘하는 짓이다 강영현. ㅇㅇ는 고개를 절레 절레 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조용히 하고 앞에 봐. 영현은 ㅇㅇ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앞을 바라 보았다.
"더워?"
"아니"
"땀 나네"
목 뒤로 흐른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그제야 아무렇지 않게 영현은 영화에 집중했다.
가끔 아무생각 없이 달콤하고 싶었다. 영화 속 주인공 두 사람은 무턱대고 서로를 사랑했다. 내일이, 일주일이 어찌 되건 사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야살스럽기 짝이없는 베드신이 은근슬쩍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미 더 거리를 좁힐 여지도 없이 들러 붙어 있는 커플들이 대부분이었다. 근데 강영현, 너 땀난다?
"너 땀 나"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대번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괜히 손을 쥐었다 펴는 거 보니 빼박이네. 일루와. ㅇㅇ는 영현의 뺨을 쥐었다. 정말 지진이 난 줄 알았다. 평소엔 그렇게도 잘 하면서, 영현의 당황한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진짜 아니야?"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영화 사운드를 뚫고 들리는데 아니긴. 당황한 영현이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ㅇㅇ는 먼저 입술을 포갰다. 영현은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아내야했다. 제 뺨을 쥔 ㅇㅇ의 조그만 손에 제 손을 포갰다. 영현은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 더 깊게 들어왔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영화일까 아님 우리 둘이 영화 주인공이 된걸까. 더이상은 진정을 시키지 못할 것 같아 영현이 아쉽게 떨어졌다. 작게 숨을 몰아쉬는 ㅇㅇ의 입가를 소매로 닦아준 영현이 ㅇㅇ와 눈을 맞추었다.
"콜라 줄까?"
호오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한다 이거지. ㅇㅇ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왼쪽에 있,"
영현이 콜라를 집기 위해 허리를 비트기도 전에 ㅇㅇ는 다시끔 영현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아 ㅇㅇㅇ. 거의 영현의 좌석으로 상체는 기울어져 있었다. 영현은 ㅇㅇ의 허리를 꽉 끌어 안았다. 죽어도 ㅇㅇㅇ는 못 이긴다. 그건 과거에도 다시 만난 순간에도, 지금까지도 유효한 법칙 같은 것이었다. 이미 베드씬 따위는 지나가버린지 오래였지만 ㅇㅇ는 그리고 영현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 가서, 나머지는 집에 가서"
좀 더 이성적인 건 영현이었다. 또 숨을 할딱거리는 ㅇㅇ를 끌어안고 오른 열을 식혔다. 아니 식을리가. 꼬물꼬물 제 손가락을 쥐어오는 ㅇㅇ의 앞에서 뭔들 식을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꼭 쥐고 영화관을 빠져 나왔다. 영현의 눈동자에 잠겨 헤어 나올 수 없다해도 그냥 두 손 두 발 들고 싶었다. 몇 걸음 가지 못해양팔을 벌리는 ㅇㅇ를 영현이 안으려던 순간이었다.
"야 미친, 무음으로 찍으라고 했..,"
순간 울린 카메라 셔터 소리에 ㅇㅇ는 이마를 짚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이 잘못이었다. 그 셔터 소리 하나로 영화가 너무 급한 마무리를 지었다. 영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있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영현이 그들에게 다가섰다.
"죄송한데, 사진 지워 주시겠어요?"
"..그럼 저희랑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저 정말 작가님 팬이에요, 습작부터 하나하나 다 봤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사진 여기서 바로 지워주세요"
선명하게 ㅇㅇ의 얼굴이 나온 사진이 휴지통에서까지 지워지는 것을 확인한 영현은 예의상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영현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것은 너무나 어린 행동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감정이 튀어나왔다.
"근데 저 여잔 뭐야?"
딱 이 말을 듣기 전까진 참을만 했다. ㅇㅇ를 작아지게 만드는 말. 영현에게 내색하지 못했지만 가끔 땅바닥으로 패대기쳐지는 시선과 말들은 ㅇㅇ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영현의 잘못도 제 잘못도 아니었지만 ㅇㅇ는 의심했다. 내가 정말 저기 있는 강영현에게 어울리는 사람일까. 금방 돌아와 제 손을 깍지 껴 잡는 영현을 올려다 보았다.
"작품은 잘 되가?"
"우리 작품 이야기 할 거야?"
"아니 그냥"
영현을 불안하게 만들긴 싫었다. 아니 내가 더 불안해지고 싶지 않았다. ㅇㅇ는 내색치 안고 영현을 천천히 껴안았다.
"넌 키가 너무 커"
"미안해"
"굽혀줘"
영현은 ㅇㅇ의 목소리에 이유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영현이 허리를 굽히자 ㅇㅇ는 영현의 목을 끌어 안았다. 영현은 ㅇㅇ의 등을 토닥였다. ㅇㅇ의 모든 것은 제게 행복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행복을 넘어 축복이겠지. 세상에서 다시 죽을만큼 무모하게 사랑하자면 ㅇㅇ 하나뿐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데려다 줄게"
"응"
ㅇㅇ는 영현의 손을 꼭 쥐었다. 가끔 이렇게 밤에 영화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 그리구 다음엔 팝콘 사지말자, 나 핫도그 먹고 싶어. 아, 그래서 결말이 뭐였더라? ㅇㅇ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려다 보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네가 이토록 사랑스러운 걸 너는 알까.
"이리와"
결국 또 몇 걸음 가지 못했다. 영현은 ㅇㅇ를 끌어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이렇게 가는 하루가 아쉬웠다. 아마 난 내일의 너를 사랑하며 어제의 너를 사랑으로 보내겠지.
"사랑해"
"응, 나두"
ㅇㅇ는 영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작년에 선물해준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냥 이런 분위기와 감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나 여기 있어. 영현아.
ㅇㅇ가 기어이 삼킨 말이었다.
2.
"요즘 만나기만 하면 싸워"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네"
"우리가 언제"
정색할 것까진 없잖아. 원필을 남은 커피를 털어 마셨다. 너네가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너 되게 예민하게 군다. 옥상 바람은 자꾸 ㅇㅇ의 머리칼을 때렸다.
"그래서 이번엔 뭐 가지고 싸웠는데?"
글쎄 뭐였더라, 뭐였지?
누가 그 싸움의 원인만 싹둑 잘라 버린 것 같았다. 뭐로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단지 나도 강영현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서로를 할퀴고 물어 뜯어다는 거? 그게 내 기억의 전부였다. 원필은 시계를 들어 점심 시간을 확인했다.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요약해서 말해. 나 오늘 일 많단 말이야.
"길면 금요일에 얘기해. 간만에 강영현 얼굴 보겠네"
"너네 토요일에 술 마셨다며"
"예의상 한 말이야. 나 간다"
그리고 진짜 너네 싸우는게 하루 이틀이야? 웬만해선 화해해라 그렇다고 안 볼 것도 아니면서.
원필은 다 마신 커피잔을 구겨 쓰레기통 안으로 던지곤 먼저 옥상을 떠났다. 정말 하루 이틀 싸워댔으니 원필의 말이 아예 틀린 것 아니었다. 근데 마음이 좀, 그렇단말이야. 싸우고 화해해도 또 싸우고 화해하도 뭔가 마음에 주먹만한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었다. 강영현에 대한 사랑이 식었냐고?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면 더 사랑할 수 있는데, 왜 자꾸 불편한 감정을 동반하는 걸까.
*
-"정말 미안해. 빨리 끝내고 갈게 응?"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미안해. 대신 빨리 와 자기 없음 나 집에 못가"
-"알았어 자기야"
휴대폰 넘어 영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보고싶어. 나도. 김원필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줘. 영현의 목소리를 비집고 그를 찾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끊어. 너 찾잖아"
-"데리러 갈게"
"응"
영현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왜? 못 온데? 원필은 익어가는 삼겹살을 뒤집으며 물었다. 그런가봐. ㅇㅇ는 자연스레 소주를 까 잔에 따랐다. 오늘만 날인가 뭐, 다음에도 만나면 되는 거다.
병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늘어갔다. 회식 때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니 제대로 술잔을 입에 대지 못하거나 아주 맛탱이가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던 원필은 취한 건지 한참 ㅇㅇ를 바라 보았다. 어쭈 이제 턱까지 괴고? ㅇㅇ는 흐려진 시야를 털어내고 잔을 들이켰다.
"야"
"어"
"나 봐봐"
"보고 있잖아"
"내가 삼겹살이야?"
취했냐 김원필. 네가 좀 삼겹살이랑 닮긴, 개뿔. ㅇㅇ는 맥주잔에 소주잔을 퐁당 넣고 위로 휴지를 덮었다. 한 번에 적당히 흔들면 뽀르르 기포가 올라왔다. 원필은 식탁을 손가락을 톡톡 쳤다. 나 보라니까?
"너 진짜 취했어?
"네가 자꾸 땅바닥만 보잖아. 언제부터 땅바닥이 나였냐고오 나"
내가 언제 땅바닥만 쳐다봤어. 너 내내 그랬거든? 결국 다툼 아닌 다툼이 일었다. ㅇㅇ는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차차 휴대폰과 지갑을 가방 안에 챙기기 시작했다. 자꾸머리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이씨 머리끈을 사든가 해야지.
"어디가. 강영현 안 왔잖아"
"취했어 난 그냥 갈래애"
"야야야! 야 ㅇㅇㅇ"
그래애 안녕 잘가아. ㅇㅇ는 원필에게 대강 손을 흔들고 문을 열었다. 행사장 풍선처럼 오르락 내리락 걸었다. 어차피 김원필 만날 거면 운동화 신고 나올껄. 지갑을 분명 챙긴 것 같은데 없었다. 가방 속에 손을 헤집고 뒤집어 봐도 좀처럼 지갑이 잡히지 않았다.
"미쳤어?!"
아주 찰나였다. 저를 끌어당기는 악력과 함께 길바닥을 굴렀다. 정신을 차릴 새 없이 잔돌멩이들과 구르던 ㅇㅇ는 그제야 차가 쌩쌩 다니는 차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원필은 손바닥을 털고 ㅇㅇ를 일으켰다.
"다친데 없어?"
"어어. 없어"
"칠칠아 여기 까졌잖아. 그러게 강영현 올 때까지 기다리라니까!"
"싫어"
"뭐?"
원필은 숨을 몰아쉬다 행동을 멈추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원필은 묻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로, 여러곳에서 터져나오는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엉망으로 엉겨 붙었다. 원필은 마른 세수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다시 말해봐"
"아무 말도 안했어"
ㅇㅇ는 흐릿해진 정신을 부여 잡고 차도에서 손을 흔들었다. 미쳤지 미쳤어. 내가 뱉어놓고 뭐라는 건지. ㅇㅇ의 앞으로 택시 한 대가 멈춰섰다. ㅇㅇ는 급하게 차문을 열었다. 아저씨 잠실역 8번 출구요.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없어"
"같이 가. 아저씨 출발해주세요"
원필은 막무가내로 ㅇㅇ를 밀어넣고 저 역시 뒷자석에 들어가 앉았다. 차에 타자마자 뭐든 따지고 들 줄 알았던 원필은 조용했다. 조용히 휴대폰을 두드리던 원필은 먼저 눈을 감았다. 창 밖으로 어지러운 야경들이 한데 뒤섞여 지나갔다. 언젠가 저 야경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ㅇㅇ는 창에 비춘 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감았다.
"어. 어 알았어, 너도 조심히 들어가라"
대강 영현과의 통화인 것 같았다. 하도 통화 소리를 줄여놔 영현의 목소리를 듣진 못했지만 원필은 저가 겪은 상황에 대한 일말의 이야기도 하지 않고 끊었다. 이번 방법은 묵언시위인가. 잠이 올리가 없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원필이 먼저 차에서 내려 손을 뻗었다. 둘다 제대로 걷진 못할 것 같으니까 이인 삼각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ㅇㅇ는 원필의 손을 쥐었다.
"네 집까지 오느라 나 대리비 탕진했어. 재워주는 걸로 퉁쳐"
"니 마으음대로 하세요"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건 갑갑한 화장을 지우는 일이었다. 원필 역시 깊게 파고드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 집 엉망진창인데, 또 잔소리 하겠네. ㅇㅇ는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다 제 고개를 박았다. 어떤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ㅇㅇ는 구두를 신발장에 던져 두고 소파에 엎어졌다.
"..왼쪽 방 쓰고 이불은 알아서 가져가"
아 쪼잔한 새끼. ㅇㅇ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원필은 거침없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씻는 건가? 이제 막 잠에 드려해도 좀처럼 방 불을 끄지 않는 원필에 결국 ㅇㅇ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잘 거면 방 불 끄고 자라고 했, ..."
"..."
방문을 벌컥 열자 보인 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원필이었다. 옷장은 반쯤 열려 오늘도 한참 옷을 고민했던 흔적이 묻어 있었고 화장대는 더 엉망이었다. 원필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하나 골몰해 있었다. 그 골몰까지 분노로 뒤덮이기 전에 원필은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길을 잃을 뿐이었다.
"너네 사이에 아무것도 안 해줄테니까"
"이건 좀 설명하지?"
아침에 부어올랐던 손가락에 붓기가 빠지며 반지가 헐거워졌다. ㅇㅇ는 손을 쥐었다 펴며 원필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숨기고 어디까지 모른 척 해줄까 내가. 원필의 목소리는 처참했다. 원필에게 ㅇㅇ는 이젠 둘도 없는 가족이었다. 대강 눈동자만 굴려도 알았지만 그 누구든 지칠 땐 집으로 찾아와주길 바랐다.
"울지 말고"
너 울리려고 물은 거, 그거 아닌 거 알잖아. 콱 목이 메인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바쁜 출근에 떠밀려 옷장이, 화장대가 엉망이 아니었다. 더 괜찮은 거, 더 괜찮은 모습, 더 괜찮은 더더 괜찮은. 우는 모습조차 들키기 싫어 이를 악 물고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내 약점이 모두 까발려진 것 같은 느낌. 들켜서가 아니라 이런 내 모습이 더 쪽팔려서, 자꾸 남을 신경 쓰게 되고 나를 믿지 못하는 그 모습이 너무 쪽팔렸다.
불안하고 무서워. 나는 분명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는데 타인들은 아니라고 하니까 그게 정답이 아니어도 그게 정답 같아. 어느새 사랑을 하고 있는데도 외로웠다. 뜨거워 데일 것 같은 서그 온도 속에서 나는 외로웠다.
3.
"ㅇㅇ씨 강작가 왔는데?"
"네?"
"안녕하십니까"
야 넌 무슨 말도 없이 이렇게 와. 오늘 우리 인터뷰 있는 거 까먹었어?
영현의 속삭임에 놓았던 정신줄이 날아와 박혔다. 아 강영현 인터뷰가 오늘이었나? ㅇㅇ는 그제야 부랴부랴 노트북을 켜들었다. 망했, 망했다. 이틀 전 분명 저장을 해둔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분명 했던 것 같은데, 안내 자료는 그저 새하얀 백지였다.
"ㅇ대리 무슨 문제 있어?"
"네? 아니요, ..그게"
ㅇㅇ의 구구절절한 설명에 팀장의 표정은 한음씩 내려가는 피아노처럼 무거워져갔다. 어떻게 잡은 강작가 인터뷰인데 그걸 날려? 정신을 달고 오긴 하는 거야? ㅇ대리야 인터뷰 하나 올리면 끝이지만 이건 프로젝트야. 일정 밀리면 이번 호는 2팀이 해주겠니? 어? ㅇ대리 그렇게 안 봤는데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어? 출근해서 뭐했니, 중요 파일은 바로바로 백업해 놓으라고 했잖아 ㅇㅇ는 도장이라도 찍은 듯 입술을 꾸욱 다물고 있었다.
온전히 제 잘못이었다. 저에게 날아드는 윽박도 모두 제 것이 맞았다. 단지, 뒤에 영현이 서 있는게 그게 힘들었을 뿐이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가 더 불안해지기만 하니까.
"팀장님 다으,"
"죄송합니다"
ㅇㅇ는 빠르게 영현의 말을 가로 막고 허리를 굽혔다. 다신 이런 실수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ㅇㅇ를 냉혈안으로 바라보던 윤팀장은 숨을 크게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작가 미안해서 어쩌지? 다음에 인터뷰.. 하기 힘들겠지?"
"아닙니다. 이번 주 내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진짜 미안해. 우리 다음에 회식때 오라구, 정말 미안해"
"ㅇ대리! 정사원이랑 커피 좀"
ㅇㅇ는 팀장과 영현 두 사람에 허리를 굽혀 사과를 건넨 뒤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단체 톡방에 정리된 커피 메뉴를 확인하고 입으로 외웠다. 잔생각을 없애기 딱 좋은 일이었다.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던 ㅇㅇ는 훅 끼쳐오는 향수 냄새에 자연스레 행동이 멎어 버렸다. 아무 말도,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 강영현.
영현은 ㅇㅇ를 살짝 끌어 안았다. 그러나 그조차 아주 찰나였다. 반사적으로 ㅇㅇ는 몸을 내뺐다. 등신 ㅇㅇㅇ. ㅇㅇ는 온 마음으로 제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티 내지 좀 말라고 ㅇㅇㅇ.
"...밖이잖아"
"괜찮아?"
"응"
"나 좀 봐봐"
어디 아픈가? 영현의 표정에 걱정이 한아름 묻어났다. 영현은 자연스레 ㅇㅇ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뻗은 손은 ㅇㅇ의 손에 잡혀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기분이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자기야"
"..."
"ㅇㅇ야"
"ㅇ대리! 아 아 지금 가려고 하는구나. 나 카페라떼로 바꾼다구, 카톡을 안 봐서"
"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영현의 목소리를 싸늘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흩날려버렸다. ㅇㅇ는 활기찬 미소를 띄어 보였다.
"카페라떼 두 잔,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잔, 자바칩 프라푸치노 한 잔, 화이트 초콜릿 모카 프라푸치노 한 잔, 아이스 오트밀 라떼 두 잔 주세요. 계산은 잠시만요..,"
"이걸로 해주세요. 아,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도 한 잔 추가해주세요"
"야 카드 여기 있어"
"괜찮아.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영현은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으며 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 ㅇㅇ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커피가 나올 때까지 웬만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 어떤 행동도 우리 사이에 도움이 될 게 없어.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건지 전혀 ㅇㅇ의 눈동자엔 제가 없었다. 오늘 많이 힘든가. ㅇㅇ에게 날아오는 윽박을 견딜 수 없었던 건 ㅇㅇ뿐만이 아니었다. 잘못이란 걸 알지만 제 앞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움츠려 드는 것만큼 열이 오르는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나서는 저를 붙잡은 것은 약간 서운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 어쩌면 내가 나서는 건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니.
"근데 오늘 왜 이렇게 예뻐?"
"어?"
"그거, 화장이 바뀐건가?"
여튼 오늘 진짜 예쁘다. 물론 나는 네 맨 얼굴이 가장 좋아.
영현은 스스럼 없이 ㅇㅇ에게 진심을 건넸다. 고마워. 영현에게만 들릴 정도로 답했다. ㅇㅇ를 향해 짓는 미소는 한결같이 보드라웠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강작가님..이시죠? 실례가 안 된다면 저 정말 강작가님 제 스타일이셔서 그런데 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영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현이 거절을 하기도 전에 진동벨이 징징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ㅇㅇ는 영현에게 진동벨을 흔들어 보이며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거절을 하겠지만, 정말 단호한 태도겠지만 ㅇㅇ는 고개를 저었다.
유독 네시 반쯤 엘레베이터는 답답하게 오르락 내리락 거리길 반복했다. 양 손에 커피를 든 채 기다리던 ㅇㅇ에게 익숙한 향이 포개어졌다. 돌아갔을 줄 알았던 영현이었다. 어 왜? ㅇㅇ는 자연스럽게 돌아 물었다.
"화났어?"
"아니 무슨, 화 안 났어"
"얘기 좀 하자"
"미안한데 난 아직 근무중이야"
"ㅇㅇ야"
너 지금 화나 있잖아, 아까부터 계속. 이제야 묻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끼어든 건 띵, 엘레베이터 도착 안내음이었다. ㅇㅇ는 영현이 붙잡은 팔을 빼냈다. 급격하게 영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탈 거에요? ㅇㅇ는 영현과 엘레베이터를 번갈아 보다 결국 엘레베이터 올라 탔다. 다시 전화할게, 미안해. 뭐가 미안했냐고? 사실 그것도 모르겠다. 그냥 영현과 마주하기 어려워 꺼낸 아무 말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커피는 잘 갖고 왔었나 내가. ㅇㅇ는 이내 영현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도 한 잔 추가 해주세요"
ㅇㅇ가 잊은 커피는 주인을 기다리며 그렇게 테이블 위에서 녹아 내리고 있었다.
*
까무룩 들었던 잠에서 설핏 깨어보니 온기는 식어 있었다. 구겨진 자리, ㅇㅇ는 눈가를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아줘"
"응? 잠깐만, 잠깐만 이것만 마저 쓰고 ㅇㅇ야"
"지금"
"오분만. 오분이면 돼, 응?"
영현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오분이면 돼. 잠에서 괜시리 깨어난 것이 영현의 탓도 아닌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잠든 내 옆에 네가 없어서. 너 대신 차가운 온도만 잔뜩 내려 앉아 있었잖아. ㅇㅇ는 팔짱을 끼고 영현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ㅇㅇ야"
"지금!"
"하,"
깊은 한숨과 함께 영현은 안경을 벗었다. 뻐근한 눈가를 매만지며 ㅇㅇ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화낼 일 아니잖아 자기야. ㅇㅇ는 잔뜩 입을 내밀고 돌아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짜증나 강영현, 왜 지금 안 안아줘. ㅇㅇ는 안방 문을 잠그고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못 본 영화나 보러 갈 껄. 아니 오랜만에 혼자 집에서 땅콩이랑 맥주나 한 캔 마실껄. 똑똑, 노크가 들려 왔다. ㅇㅇ는 아랑곳하지 않고 티셔츠에 팔을 끼워 입었다. 다시 한 번 신경질적인 노크가 들려왔다. 안 열 거야? ㅇㅇ야.
"갈게"
"ㅇㅇㅇ"
글 열심히 써.
당분간은 얼굴을 보지 않는게 좋겠다. 자꾸 영현을 보면 별 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굴었다. 또 얼굴 위로 겹겹히 올린 화장이 답답했다. 식사량을 꽤 줄여 자꾸 배도 고팠다.내 예민함을 자꾸 영현에게 덮어 씌었다.
"요즘 진짜 왜 그래. 만날 때마다 이러잖아"
"미안, 내가 예민했어"
"그런 말 아니잖아"
"그럼 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아, 이건 먼저 던진 돌멩이였다. 영현의 깊은 한숨에 빠져 죽어버릴 것 같았다. 더이상 나긋한 목소리를 찾기 어려웠다. 오랜 침묵을 끌었다. 모든 전선을 끊어 버린듯 두 사람의 공간은 도저히 빛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네가 우선일 순 없어. ㅇㅇ야"
나도 일이라는게 있잖아. 내가 좋아하고 내가 책임있게 해야할 일. 그 부분에서 이해를 바라는게 잘못된 일이야?
영현의 말은 단 한개도 틀린 게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ㅇㅇ는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 없이 현관문을 열고 영현의 집에서 떠났다. 아직 달빛이 선연한 새벽녘에 다닐 버스는 없었다. 은근한 고요에 잠긴 도심에서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 높은 굽에 종아리가 아려왔다. 자주 신지 않아 버릇하니 알이 베긴 건지 딛을 때마다 입술을 잘근거렸다. ㅇㅇ는 점점 저에게 달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ㅇㅇㅇ"
"영현아"
"..응"
"내가 너와 더 큰 산을 넘을 수 있을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나고, 나를 외롭게 만드는 것도 나야.
"우리가 더 큰 산을 마주했을때 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아니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가는데 나는 몸만 부풀어 오른 애 같아.
"ㅇㅇㅇ"
자신이 없어.
영현은 제가 들은 말을 의심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만큼 누군가 묵직한 무언가로 뒷통수를 크게 내려친 것 같은 얼얼함이 수반 되었다. 왜, 이런 말이 나와야 했던 걸까. 영현이 한 발짝 걸음을 떼자 ㅇㅇ는 한 발짝 멀어졌다.
"그동안 우리가 넘은 산은 기억 안나? 같이 잘 넘겼잖아, ㅇㅇ야"
"지금을 말하는 거야. 그때가 아니라"
"아니 지금은 그때를 기억할 이유가 충분히 있어. 제발, ㅇㅇ야"
"그때를 기억해서 뭐할 건데. 그때 넘은 산이 나에게 대체 뭔데!"
울려고 내지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울음이 함께 튀어나왔을 뿐이다. ㅇㅇ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우는게 쪽팔려서, 영현의 앞에서 너무나 작아진 제가 쪽팔렸다. 영현이 다시 다가가자 ㅇㅇ의 손을 뻗었다. 잠깐만. 찰나에 눈물이 전부 멎어 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정말, 그 무엇이든.
"ㅇㅇ야"
"응"
"그건 우리가 사랑한 시간이야"
뜨거운 사랑엔 단점이 있다.
불타오를정도로 뜨거워 온 태양을 감싸 안은 것처럼 눈부시고 찬란하다. 그만큼 크게 데인다는 것. 앞날이 없는 것처럼 사랑하다 문득 그 사랑이 불안해지는 순간 그건 뜨거운 불덩이 같은 존재로 순간 순간 드러난다.
*
"글쎄. 최근엔 본 적 없어"
"지난 주에 같이 있지 않았어?"
"뭐 우리는 같이 있다고 속까지 다 꺼내 늘어 놓는줄 아냐, 별 말 없었어. 안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줘. 내가 먹게"
영현은 그대로 소주를 털어 넣었다. 원필은 아는 줄 알았는데 원필조차 모른다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영현은 습관적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뱉어냈다. 방송 출연에, 잡지사 인터뷰. 나흘은 ㅇㅇ가 없는 흑백 나날이었다. 평소와 다를 수 밖에. 영현은 말 없이 잔만 채웠다. ㅇㅇ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우리가 다시 마주하고 넘을 수 있을지 미지수의 문제들만 영현을 괴롭혔다.
"그만 마시고 일어나자"
원필도 섣부르게 영현에게 모든 걸 이야기 할 수 없었다. ㅇㅇ가 왜 그렇게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지 실마리를 얻을 아무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단지 ㅇㅇ가 아주 지쳐, 아니 외로워 보였다. 대리 불러줄게 여기서 기다려. 됐어, 내가 부를게. 이 정신으론 도통 버티기가 두려워 영현은 세수라도 좀 하고 싶었다. 세수 좀. 어 갔다와. 원필은 대리 번호를 다이얼에 입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님! 실장니임- 집에 가셔야죠. 어어 택시! 택시 여기요, 이쪽!"
원필은 자동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분명 ㅇㅇㅇ 목소리인데. 원필은 실처럼 가는 눈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 맞은편 왁자지껄한 넥타이 무리 중에서 ㅇㅇ를 찾아냈다. 택시 문을 열고 작은 몸으로 낑낑대며 실장으로 보이는 작자를 태워 보낸 뒤 ㅇㅇ는 허리를 펴기도 전에 다른 택시 문을 열었다.
윤팀장님 이쪽에 타세요. 네에- 저두여 저도 감사드려요. 오분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애벌레처럼 구부려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팀장의 택시를 보낸 뒤 ㅇㅇ는 비틀거리며 대리 기사 번호를 눌렀다.
"네, 네 우측으로 꺾으시면 주상포차 앞에. 아 맞아요, 네네. 알겠습니다"
정신 없이 이미 꽐라가 된 직원들을 하나하나 택시를 타고 떠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ㅇㅇㅇ는 같이 데려가야겠지. 원필은 ㅇㅇ쪽을 향해 걸음을 틀었다.
"어? 어어어"
싱긋 싱긋 웃으며 택시 문을 닫았던 ㅇㅇ였다. 마지막 택시를 보내고 ㅇㅇ는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허공에서 아린 허리를 펼 새도 없이 휘청이던 발목이 한 바퀴를 그려 돌고 나서야 엉거주춤 중심을 잡아냈다. 아주 순간이었다. 월간지를 마친 뒤 반강제로 끌려온 회식인지라 ㅇㅇ 역시 술에 쩔어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하늘은 팽이처럼 돌아갔다. 드디어 미친건가, 나. ㅇㅇ는 희미한 시야를 깜박이다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야야야. 야 ㅇㅇㅇ! 네 구두는 무슨 무기냐? 계단이야 엘레베이터야 뭐야. 발목 나가 ㅇㅇㅇ!"
"아아 귀걸이 귀걸이 걸렸어. 야 김원필!"
횡당보도 서부터 질주해 겨우 원필은 ㅇㅇ를 받아들었다. 하여튼 하지도 않는 귀걸이는 왜 해서, 야 뺐다 뺐어. 반쯤 맛이 간 ㅇㅇ를 주저 앉히는 것까진 성공했다. ㅇㅇ는 원필을 수상하게 올려다 보았다.
"넌 어디서 튀어나왔냐아"
"강영현이랑 저 앞에서 마시다가, 걸을 수 있겠어?"
"어어. 잠깐마안"
입술 좀 바르구. ㅇㅇ는 주섬주섬 가방을 꺼내 들었다. 와르르. 그대로 가방은 내용물들을 쏟아냈다. 어디 데이트 가냐. 원필은 대체 립스틱이 왜 세 개씩이나 필요하고 얼굴에 바르는 것으로 추청되는 화장품들이 이렇게나 많이 들고 다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씨구 귀찮다던 귀걸이는 아예 들고 다니네.
"어때에 나 바바. 괜찮냐?"
"호박에 줄 그어서 수박 되면 온 세상은 수박밭이겠네"
"장난 치는 거 아니야. 강영현 오기 전에 빨리 제대로 봐줘바아"
"아 괜찮다니, ...까"
이유 없이 멱살 짤짤이를 당하며 기계처럼 내뱉은 멘트는 무언가 뒤틀린 것을 감지하고 뚝 끊겼다. 얼굴 빨갛지는 않아? 야 건성으루우 보지 말고오오. 원필의 손에 들렸던 립스틱이 데굴데굴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 나아갔다.
"괜찮아? 많이 취했어?"
목석처럼 굳어진 원필 옆으로 영현이 다가와 ㅇㅇ를 부축했다. 어? 어어. 어 괜찮아아.
"머리 아프진 않아? 얼마나 마셨어, 회식 있음 데리러 오라고 하지"
"아냐아. 일찍 끝날 거 같아서 말 안 했지"
"숙취 해소제 사올게. 조금만 기다려"
영현의 부축 덕에 ㅇㅇ는 벤치에 앉을 수 있었다. 남방을 벤치 위에 깔아두고 ㅇㅇ를 앉힌 후에야 영현은 다시 횡단보도쪽으로 달렸다. 그러니까, 지금. 원필은 애써 표정을 숨겼다. 나 머리 자를까? 여기 뭐 묻었어 에이. ㅇㅇ는 꼼꼼하게 입술을 발랐다. 아 어지러워. 영현이 오기 전에 후딱 신발을 벗어냈다. 온통 뭉친 근육들이 아우성쳤다. 조금만 더 신으면 익숙해질 것 같기두 하고. ㅇㅇ는 횡단보도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연신 발을 주물렀다.
"그냥 슬리퍼 신어. 강영현 차에 있을 거 아냐"
"아 됐어. 그냥 신고 있을래"
"강영현한테 말 안 할 때니까 그만 해라"
뭘. 그거. 그러니까, 뭐.
원필은 다 안다는듯이 구두를 빼앗아 들었다. 근데, 네가 뭘 알아. 네가 이 감정 속에 갇혀 봤어? ㅇㅇ는 원필에게서 구두를 빼앗아 신었다. 아아, 아퍼. ㅇㅇ는 막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걸었다.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ㅇㅇ는 온 마음으로 원필의 시선을 거부했다.
"그만 하라고"
"네가 뭘 알아"
"야"
"네가 뭘 아냐고, 네가 이 기분을 알아? 나를 이해해? 아니 이해를 바란 적도 없지만 제발 나 좀 나둬. 알아서 한다고!"
"뭘 알아서 해?"
ㅇㅇ는 애꿎은 원필에게 화풀이를 했다. 뱃 속부터 싸늘하게 끓어 오르는 울음을 꾹꾹 눌러 내렸다. ㅇㅇ야. ㅇㅇ는 영현의 손을 뿌리치고 걸어갔다. 우리는 손을 잡아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가라 앉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는 이 곳에서. 툭툭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눈물이 떨어졌다. 마스카라가 번져갔지만 ㅇㅇ는 주저하지 않고 눈가를 닦아냈다. 퍽하면 울고, 퍽하면 소리나 지르고. 정말 확신히 서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너에게 부족한 사람인 것 같은데.
"왜"
"무슨 일인데"
원필은 당장이라도 영현을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바늘로 콕, 한 번만 찔러도 기폭제가 되어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네 눈엔 예쁘지"
"사랑스럽고"
영현은 말의 요점을 찾지 못했다. 정확한 주어를 표명하지 않은 원필의 말은 끝없는 미로 같았다.
"등신 새끼"
당분간 전화하지마 개새끼야.
영현의 품에 있는 힘껏 가방을 던지고 원필은 떠나 버렸다. 뜨거운 여름밤에 찬 바람이 불었다. 날 불안하게 만들지 마. 영현은 두려운 감정을 짓눌렀다. 어렵다, 이 모든 순간이.
4.
"ㅇ대리 보도자료 다 전달했지?"
"네. 다 드렸습니다"
"그럼 이거, 강작가 가져다 줘. 이번 대본이야"
ㅇㅇ는 한 손에 질문지 뭉텅이를 들고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아차차, 아니 그전에. ㅇㅇ는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머리 스타일이 망가지진 않았는지 피부에 기름이 올라오진 않았는지, 옷 매무새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ㅇㅇ는 꼼꼼하게 마스카라를 칠하고 나서야 다시 촬영장으로 향했다.
"여기 대본"
"고마워. 아, 바로 가야돼?"
"응. 미안해"
조금만 보고 가. 옆에 있어줘.
영현은 조금만 ㅇㅇ의 손에 깍지를 꼈다. 더위에 땀이 베인 건지 손이 축축했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띄엄 띄엄 영현을 보거나 그마저 짧게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는 정도였다. 그동안 마음이 불편하며 편했다. 두려우면서 안정된 하루 하루를 보냈다. 너를 정말 사랑하는 건 맞는데.
"영현씨 시작할까요?"
"ㄴ,"
"금방 가겠습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뿌리쳤다. 아주 찰나였으나 내쳐진 감각은 자꾸 영현의 손 안에서 맴돌며 괴롭혔다.
"얘기 좀 해"
"일 끝나고"
"ㅇㅇㅇ"
ㅇㅇ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 문으로 다가섰지만 영현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이렇게 너 가면 나 진짜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제발.
"나를 못 믿어?"
"그런 거 아니야. 왜 그렇게 이야기가 새"
"네가 지금까지! ..나한테 그랬잖아. 입 꾹 다물고 가는 우리 관계는 뭐야? 더 크게 싸울까봐 애매하게 매번 넘어가고 넘어가잖아"
"강작가, 안에 있지?"
영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결국 문을 열었다. 쾅, 대기실 문이 처참하게 닫혔다. 그 안에 더 처참한 ㅇㅇ가 서있었다.
"ㅇㅇ씨 안에서 무슨 얘기 했어? 자기 강작가랑 많이 친하지. 아, 부럽다 정말"
"그냥 뭐, 별 얘기 안했어요. 일 얘기"
"근데 강작가님 진짜 자상하시더라구요. 되게 냉철하실 줄 알았는데 사근사근 하시구, 진짜, 아 잘생겼어요. 강작가님 여자친구 있나?"
ㅇㅇ는 저를 붙들고 묻는 직원들의 말을 최대한 유도리 있게 답했다. 기어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이었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커버렸다. 영현은 언제 화를 냈냐는듯 화보에 집중한 모습을 보였다. 피드백을 확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달작지근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강영현이 잘나긴 했지. 어느새 또 뿌듯한 마음으로 영현을 바라보았다. 강영현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 영현은 아무것도 잘못 하지 않았다.
일이 많아 아쉽게도 빠지겠단 선언은 회식을 어디로 예약했냐는 물음이 삼켜버렸다. ㅇㅇ는 비위가 약했다. 입도 짧고 번거로웠지만 영현은 언제나 ㅇㅇ의 취향에 맞춰 주었다. ㅇㅇ가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게 마치 행복을 삼킨 사람처럼 사랑했다.
"닭발엔 소주지. 소주, 권주임 시켰어?"
"네. 시켰습니다-"
고된 다이어트 때문에 점심도 반 밖에 먹지 못했는데 닭발이라니. ㅇㅇ의 머릿 속에선 닭장 안의 닭들이 이곳저곳을 디디며 걸어다니는 장면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ㅇ대리 닭발 못 먹나? 아닙니다. 그래, 이게 야식으론 일위라니까. ㅇㅇ는 젓가락으로 닭발을 하나 집어 그릇 앞에 내려 놓았다. 맛은 커녕 냄새조차 달갑지 않았다. 그러자 제 그릇쪽으로 어묵탕이 들어왔다. 영현이었다. ㅇㅇ쪽으로 그나마 입에 댈 수 있는 찬거리를 찾다 겨우 어묵탕을 옮겨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ㅇㅇ는 영현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 국물을 후후 불어 떠먹었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니 좀 살만 했다. 조용히 어묵을 떠먹으며 ㅇㅇ는 떨어지는 술이나, 물티슈를 가지고 날랐다. 앉았다 일어나길 반복하다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ㅇㅇ는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 화장실쪽으로 향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복도로 오니 꽉 막혀있는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어디 아파?"
"어? 아니. 금방 갈게"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영현이 ㅇㅇ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 이 손을 베고 잠에 들고 싶었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영현을 끌어 안고 잠들고 싶었다. ㅇㅇ는 영현의 품에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아까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언성 높여서 미안해, 내가. 놀랐지"
요즘 힘들어? 아니 아니.
다시 전과 같은 ㅇㅇ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전부 내려놓고 제게로 와 기대는 ㅇㅇ가 안쓰러웠다. 힘든 이유도 알아주지 못하고, 그래서 마땅한 위로도 못 해주는 제가 싫었다. 영현은 ㅇㅇ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왜 그럴까, 요즘 많이 더워서 그런가? 에구 먼지 묻었다"
영현은 ㅇㅇ의 눈꺼풀에 먼지를 털어주곤 다시 끌어 안았다.
"예쁘다고 해줘"
"응?"
"빨리"
빨리 해줘. ㅇㅇ는 영현의 손가락을 잡고 늘어졌다. 영현은 ㅇㅇ의 두 뺨을 쥐고 가깝게 눈을 맞추었다.
"예뻐"
"사랑스럽다고도"
"사랑스러워"
"진심이야"
ㅇㅇ는 울음을 참았고, 두 이마가 닿았다. 나는 진심이야, ㅇㅇ야.
물기가 묻은 손을 털어내며 ㅇㅇ는 영현보다 뒤늦게 자리로 향했다. 제가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테이블은 더 흥분되고 시끄러웠다. 강영현 시끄러운 거 싫어하는데. ㅇㅇ는 자연스레 영현의 눈치를 살폈다.
"ㅇ대리, 팀장님하구 강작가님 어떤 것 같아? 잘 어울리지!"
"네? 아, 아 그럼요"
막내두 그렇다고 하잖아요!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윤팀장은 은근히 좋은 모양이었다. 한사코 아니라며 손사레를 쳤지만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인터뷰는 윤실장 몫이었으니 자주 만나곤 했다. 윤팀장과 영현이 잘 통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분야에서 경력이 있는 이였으니 영현과 더 섬세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강작가니임 왜 대답 안 해요. 윤팀장님 진짜 어떠냐니까요?
- 괜찮아 20:07
- 정말루 20:07
영현은 휴대폰을 뒤집었다. 굳이 ㅇㅇ의 회사에서 정색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인정하는 건 더 싫었지만 영현은 작게 끄덕였다.
"괜찮으신 분이죠"
"어머머 윤팀장님 들으셨어요? 아 이거 러브샷 가야 하는데!"
모두 입을 모아 러브샷을 외쳐댔다. 손수 정대리가 말아준 폭탄주를 이미 윤팀장은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들고 있었다. 영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린 것을 아는 사람은 ㅇㅇ 하나뿐이었다. ㅇㅇ는 영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괜찮다구.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영현은 팔을 감고 빠르게 잔을 원샷했다. 아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ㅇㅇ는 괜히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에 강영현 얼굴 붙이고 다니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팀장님, 어어 어떡해. 어떡해 집에 가실 수 있겠어요?"
"강작가님 정말 죄송한데, 혹시 팀장님이랑 저 좀 태워다 주실 수 있나요? 정말 죄송합니다 둘 다 차를 안 가져 와가지구.."
영현은 대리기사에게 키를 맡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비틀거리는 팀장을 붙잡은 정대리를 뒤로 하고 영현은 마지막 택시를 보내고 있는 ㅇㅇ에게 달려갔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너 많이 피곤하잖아"
"같이 가고 싶어"
너 그런 얼굴로 보면 씨, 알았어.
졌다는 삐죽한 표정이 영현을 활짝 웃게 만들었다. 엉겹결에 윤팀장을 끼고 셋은 뒷자석에 앉았다. 강작가 저번 계간지에 실린 소설 봤어? 네 봤죠. 스타일을 아주 굳힌 것 같더라구, 강작가 타입은 아니지? 전 아직 제가 쓰는게 좋아요. 영현은 평소 궁금했던 질문들을 뜨문뜨문 건넸다. 강작가 계간지에 관심 많았구나, 근데 잘 안 보내지 않았어? 그렇죠. 아직 배울게 투성이니까요.
"우리 ㅇ대리도 전공이잖아. 전문가 앞에서 유난 떠는 건 아니지만, ㅇ대리가 아직도 가끔 글 쓰잖아. 이왕 인연인 김에 한 번 봐달라구 해"
"네? 저요? 저는 별로 쓴 게 없어서.."
글 쓰고 있었어? 표정에 메시지를 띄었다. ㅇㅇ는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글은 무슨 아니야, 쓰레기지. 글자 많은 쓰레기. 오피스 상권에서 돌자 가장 먼저 ㅇㅇ의 집이 보였다. 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응? 영현은 금방 내려 습관처럼 ㅇㅇ의 방향 문을 열어주었다.
"데려다 주고 다시 올게"
"우리 둘 다 피곤하잖아. 내일 보자"
"내일은 하루종일 작업이야. 올게"
가서 자. 그리고 내일 컨디션 유지 잘하구 작업해.
ㅇㅇ는 영현의 등을 미약하게 두드리고 돌아섰다. 차는 미련없이 사거리로 나아갔다. 단지 차 한 대가 멀어졌을뿐이다. 왜 영현이 함께 멀어져가는 불안한 감정을 맞고 있어야 하는 걸까. 영현은 언제나 나에게 진심이었는데. 자꾸 영현의 손을 놓칠 것 같았다.위태로운 낭떨어지를 앞에 둔 것처럼. ㅇㅇ는 올라와 현관문을 열자마자 주저 앉았다. 차가운 현관문이 ㅇㅇ를 반겼다.
"...여보세요?"
-"자기야"
잘 들어갔어? 따뜻한 영현의 목소리가 전화를 타고 ㅇㅇ의 목을 끌어 안았다. 왜 아직 안 잤어. 여전히 영현은 ㅇㅇ를 걱정했다.
-"일요일엔 시간 낼 수 있을 거 같아. 오랜만에 어디 갈래?"
"...어 좋아. 어디 갈까?"
영현은 적당한 곳으로 알아 보고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전했다. 창문 너무 많이 열어 놓지 말고, 이불 꼭 덮고 자. 공기 청정기 망가졌더라. 고치고, 아님 내가 연락 해 놓을까?
"..잘자"
-"응. ㅇㅇ야"
"어?"
-"사랑해"
왜 그 사랑이 내 명치를 푹 찔렀던 걸까.
하루 일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 되어 사진첩처럼 지나갔다. 그 하루 기억의 반에는 영현이 있었다. 오른 손을 맞잡는 왼손처럼 익숙하지만 따뜻하게 항상 자리해 있었다.
"흐윽, 끅"
ㅇㅇ의 어깨가 무거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높은 구두를 신다 결국 짓물이 나고 뜨거운 피가 베어 흘렀다. 영현과 봤던, 그 아무생각 없이 남자를 사랑하던 주인공이 떠올랐다. 내가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영현을 사랑하기에, 영현은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불꽃이 튀고 가끔 날카로운 절단면으로 치고 박는 것이 아니라 정말 행복해야 할 사람. 그는 나에게 과분한 사랑이었다.
5.
햇빛은 블라이드를 뚫고 들어왔다. ㅇㅇ의 퉁퉁 부은 눈꺼풀을 두들겼다. 누군가 몸 위로 벽돌을 쌓아둔 것처럼 갑갑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걸까, 우리 사랑은. 아니, 내 사랑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마음으로 영현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목구멍을 가시로 찌르는 것만큼 아팠다. 하지만 더이상 영현과 이런 감정으로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에 낑기고 떠밀려 지하철역을 빠져 나왔다. 사원증을 급하게 목에 맨 뒤 ㅇㅇ는 뛰었다. 여전히 높은 구두는 낫지 않은 발을 괴롭혔다.
- 저녁 먹자 08:45
- 그래. 데리러 갈게 09:01
잔업이 떠밀려 눈코 뜰 새 없었다. ㅇㅇ씨 점심은?
여전히 다이어트 중이었다. 한참 관리에 손을 놓았던가, 통통해진 얼굴은 푸석푸석 해보였다. 자기 요즘 말랐어, 밥은 챙겨먹어. 윤팀장은 탕비실에 넣어둔 샌드위치를 꺼내 건네고 자리를 떴다. 영현과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너무 심란하고 산만했어.
ㅇㅇ는 내색은 않지만 영현이 좋아하는 원피스의 주름을 폈다. 시간을 맞추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ㅇㅇ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다시 홈페이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강영현!"
멀리서 영현의 차가 보였다. 더운데, 굳이 나와 노트를 끄적이는 영현에게 달려가 안겼다. 보고싶었어. 영현의 온기가 ㅇㅇ를 끌어 안았다. 뒷통수까지 감싸 품에 한참을 끌어 안은 후에야, ㅇㅇ는 떨어져 영현을 향해 시선을 올려다 보았다.
"예쁘네"
달콤한 목소리로 영현이 말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영현은 미소가 내려가지 않았다. 종달새처럼 옆에서 이야기를 늘어 놓는 ㅇㅇ의 손을 쥐고 영현은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응 그래서 말이야. ㅇㅇ는 영현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뜨문뜨문 말을 이어 나갔다. 영현의 큼지막한 손은 ㅇㅇ의 뺨을 가볍게 쥐었다 다시 ㅇㅇ의 손을 잡았다.
"성과 괜찮았으면 좋겠어. 진짜 신경 많이 썼거든, 완전히 샅샅이 다 갈아 엎고 보고서 올렸다니까?"
"그랬어?"
"응. 아, 중간에 그냥 일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은 거야. 네 집으로"
"응"
그냥 네 집에 가서 죽은 듯이 자고 싶었어. 그럼 네가 이불 덮어주겠지, 그럼 나는 완전 꿀잠. 아 완벽한데. 여전히 ㅇㅇ는 영현의 손가락을 쪼물쪼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닳으면 어때, 너인데. 너로 인한 건 뭐든 괜찮아.
"내리자"
"잠깐만"
응? 대꾸를 하기도 전에 ㅇㅇ는 영현의 입술을 가져왔다.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영현은 웃음이 터졌다. 영현의 손은 ㅇㅇ의 목을 감쌌다.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운 열이 옮겨 붙었다. 날카로운 콧날이 자꾸 부딪히고 틈새 하나 없이 입술을 맞붙었다. 차오르는 숨에 ㅇㅇ의 영현의 가슴팍을 약간 밀어냈다. 나른하게 풀린 영현의 시선은 온전히 ㅇㅇ를 향해 있었다. 촉, 그새를 참지 못해 짧은 키스를 나누었다.
"잠깐만,"
ㅇㅇ는 조금 낑낑대며 기어코 운전석으로 넘어와 영현의 무릎에 앉았다.
"키스해줘"
더 사랑한다고 말해줘.
"..너 오늘 진짜 예쁘다"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영현이 ㅇㅇ의 허리를 끌어 당기자 두 사람은 무섭게 다시 맞붙었다. 더운 숨을 나누고 ㅇㅇ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빨아 당기다가 이내 깨물었다. 입술 너머 깊은 곳으로 파고 들었다. ㅇㅇ의 영현의 목을 감싸 안자 영현의 허리가 곧추 세웠다. 자연스레 입술은 말랑하고 작은 귀로 옮겨갔다. 할딱이는 호흡만이 가득 차올랐다. ㅇㅇ는 영현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간지러운 감각이 귓바퀴를 타고 열을 올렸다.
"..나 배 안 고파"
영현은 ㅇㅇ의 턱을 쥐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나도"
*
단숨에 눈 앞에 하얘졌다.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동시 다발적으로 그 역시 짐승처럼 그르렁대며 신음했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영현은 ㅇㅇ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사랑해"
"..다시 말해봐"
"사랑해"
"...한 번만 더"
사랑해.
ㅇㅇ의 두 눈을 맞추고 말했다. 하나하나 전부, 네 모든 걸 사랑해. ㅇㅇ는 비 오듯 쏟아진 땀에 젖은 영현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대로 눈꺼풀을 쓸어보고 뺨을 쥐었다. 내 손 안에서 하나하나 살아 있는 너를 너무 사랑해.
영현은 ㅇㅇ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긴 밤을 지새워 말하고도 부족했다. 조금만 더, 더 이야기하고 ㅇㅇ를 보고 싶었다.
"가끔 넌 내 꿈 같아"
절대 잊을 수 없는 꿈. 하지만 이 꿈 같은 시간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건 그건, 행복을 완성하는 그림과 같았다. ㅇㅇ는 영현의 맨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어쩌면 우리의 꿈을 깨뜨릴 수도 있겠지.
아직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
태양이 날을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영현은 작년부터 준비해오던 단편집을 냈다. 퇴고를 하기까지 영현을 자주 보진 못했다. 책을 출간 하기까지 영현은 쏟아낸 체력 때문에 이틀을 내리 잠들어 있곤 했다. 가끔 영현의 집 문꼬리에 그가 좋아하는 죽이나 초밥을 사 걸어두고 오는 날이 잦았다. 단편집을 내고 나선 더욱 바빠졌다. 언제나 그랬듯 언론사들은 영현의 인터뷰에 불이 붙었고 잡지사들은 질리도록 기싸움에 동참했다. 그 무렵 ㅇㅇ에게도 꽤 버거운 일들이 파도처럼 떠밀려 왔다.
"ㅇ대리 모컵 어딨어?"
"피피티 자료 정리해서 다시 뽑아와. 일들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어?"
현장에서 뛰고 온 다음 날은 더 어수선했다. 시키는 일을 꼬박 꼬박 받아 해도 돌아오는 것은 무응답 혹은 아주 날선 비평 혹은, 그래 꼰대. 꼰대의 히스테리뿐이었다. 팔이 빠져라 노를 저었지만 배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ㅇㅇ는 매일 휴대폰을 들여다 보곤 했다. 가끔 강영현, 세 글자를 착실하게 써 검색을 하면 어느정도 영현의 이야기, 책에 대한 찬사가 보였다. 유일한 행복이었다.
"언니 강작가님 번호 안다면서요. 연락 해봤어요?"
"해봤지. 뭐, 물론 공적인 일로만 근데 진짜 자상하더라. 몇 번 연락 주고 받았으니까 만날 기회가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ㅇㅇ는 순간 영현의 이름에 움찔, 행동이 멎었다. 영현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이제는 좀 익숙해지고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여전히 어린 질투심이 못나게 드러났다.
참 못나기도 더럽게 못났다. 강영현 좋아해주는 사람들인데, ㅇㅇㅇ 너 진짜 애같이 군다.
ㅇㅇ는 차마 감지 못한 머리를 질끈 묶으며 고개를 털어냈다. 커피나, 커피나 마시자. 그나마 카페인이 있었기에 목숨을 부지했다. ㅇㅇ는 벤티 사이즈로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시켜 쭉 빨아 들이켰다. 요즘 눈이 뻐근해 쓴 안경은 자꾸 땀에 흘러내렸다.
"ㅇㅇ야"
"어? 작가님!"
너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와 더불어 방금 전 영현의 이야기를 꺼냈던 2팀 정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ㅇㅇ는 멈추었던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아이씨, 슬리퍼. 하필 아주 못난 모습일때, 왜 강영현은 찾아오는 걸까.
"저 좀 숨겨 주세요. 저 좀"
"응?"
"빨리 빨리!"
다짜고짜 숨바꼭질이었다. 우왕좌앙하는 신입 주위를 뱅뱅 돌다 ㅇㅇ는 한달음에 비품실로 달렸다. 망했어, 존나 망했어. 이틀 내내 야근을 하다보니 입에 오르기도 우스운 화장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출근했다. 에이씨 페브리즈라도 뿌릴 껄. 끊임없이 ㅇㅇ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부 영현의 연락이었다. 전화 하지마 하지마 하지말라고. 이 눈치 없는 새끼야. ㅇㅇ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영현의 전화를 모두 지웠다.
십오분을 내리 앉아 있었다. 더이상 다리가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이쯤이면 갔겠지, ㅇㅇ는 엉거주춤 일어나 무거운 비품실 문을 열었다.
"아, 저기 있네요"
저 여기 없어요.
*
"얼굴 한 번만 보여주면 안돼?"
"...싫어"
"안경 맞췄어?"
ㅇㅇ는 더욱 고개를 말아 숙이곤 끄덕였다. 좀 정상적인 모습으로 만나면 안 될까 우리.
영현은 목석처럼 서 있는 ㅇㅇ를 내려다 보다 천천히 안았다. 얼굴 보고 싶어. 싫어. ㅇㅇ는 기어이 거부했다. 왜, 라는 질문에도 답하지 못했다. 쪽팔리니까. 진짜 보여주기 싫으니까.
"강작가님?"
대체 어떤 기지를 발휘한 걸까. ㅇㅇ는 반사적으로 영현을 밀어냈다.
"..그게,"
"ㅇ대리 팀장님 완전 화났어. 자기 어디 갔냐구, 회의 곧 시작한다던데?"
"네? 아아 고마워요"
죄송합니다. ㅇㅇ는 영현에게 인사를 하곤 냅다 사무실로 달렸다. 항상 화사한 정대리 옆에 서 있는 것도 영현 앞에 서 있는 것도 둘 다 피하고 싶었다.
크게 한소리를 듣고 ㅇㅇ는 잔뜩 어깨를 굽힌 채 모니터를 두들겼다. 얜 또 왜 먹통이야, 하 진짜로. 고쳐 써먹는데도 한계가 있지. ㅇㅇ는 눈가를 매만지며 다시 한 번 모니터를 쾅 내려쳤다. 그제야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모니터가 희미한 불을 띄며 켜졌다.
- 끝나고 얘기 좀 하자. 자기야 18:24
- 기다릴게 18:24
어쩌면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단지 영현의 손을 쥐고 있는 동안 땀이 차 신경이 쓰였다. 미루고 미뤄왔던, 진작 이야기 했어야 할 말이었다. 영현은 대교 근처에 차를 세웠다. 화는, 당연히 났을 것이다. 영현도 나름 꾹꾹 누르고 참았을테니까. 영현이 깊은 숨을 들이 쉬고 입을 떼려는 순간을 낚아챘다.
"시간이 좀 필요해"
"싫어"
단호했다. 핸들에 고정된 시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다시 너랑 떨어져 있기 싫어. 이건 진심이야"
"영현아"
"대체 왜 그러는데"
여전히 강영현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영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너 되게 좋은 사람이야. 언제나 그랬고, 아니 너 더 좋은 사람 되어가는데"
"...미안해. 내가 자신이 없어"
"ㅇㅇㅇ"
"내가 나를 못 믿겠어, 좋은 사람인지. 무턱대고 너를 사랑하고 있는게 겁나"
"그거 변명으로 밖에 안 들려"
영현이 차갑게 말했다. 그게 전부야?
"응. 이게 우리 관계를 망설이는 이유야"
"말은 바로 해. 우리를 망설이는 이유가 아니라, 네가 날 사랑 하지 못할 이유인 거야"
영현은 그제야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말 많은 실망을 담은 눈, 그 차가운 말을 하는 너의 눈은 자꾸만 흔들렸다.
"나한테 숨기고, 나를 밀어내는게 고작 그런 이유야?"
"못됐다"
"못됐다 ㅇㅇㅇ"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말을 꺼내야겠단 생각을 할 때부터, 차마 하지 못하고 다시 무턱대고 영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요구했을 때부터 감당해야할 대답이었다.
"네 글을 좋아해주고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미워"
"ㅇㅇㅇ"
"미안해. 이정도라서"
그들이 던지는 시선들이, 던지는 말들이 너무 아팠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였다. 더이상 영현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건,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고 싶어"
영현에게 기다림까지 바라는 건 정말 큰 사치다. 한 달의 고민의 결론이었다. 어쩌면 정말 나는 강영현에게 맞는 사람이 아닐수도 있다는 걸.
"다시 너랑 떨어져 있기 싫다고"
"내가 이런 상태로 네 옆에 있으면 마음 편하겠어?"
"야"
"니가 그 사람들이 날 어떤 눈으로 보고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릴만큼 우리가 그렇게 쉬워?"
"강영현"
영현은 손으로 제 눈을 덮고 있었다. 핸들을 쥔 손이 하얗게 변해갔다.
"내가 아무리 정답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맞다고 하잖아!"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두 사람의 마음에서 최선이었다. 나는 이만큼의 이해. 너는 그만큼의 이해.
"네가!"
"...네가 날 돕지 않아도 널 사랑한다고 말 할 자신이 없다고. 내가 그렇다고, 내가! 넌 나 왜 만나? 너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만나. 확신도 안 서서 너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 말고"
"당장 취소해 그 말"
ㅇㅇ는 울컥 치솟는 울음을 삼켰다. 이렇게까지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면 이게 나도 몰랐던 나의 진심이었을까.
"취소하라고"
"..."
"ㅇㅇㅇ!"
영현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었다. 취소하라고, ㅇㅇㅇ.
"시간을 조금만 줘"
"지금 가면 끝이야"
ㅇㅇ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영현은 저와 다르게 홧김에 끝을 보자는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영현만큼 차문을 쥔 ㅇㅇ의 손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피가 통하건, 통하지 않건 중요하지 않아.
"가지마"
옆에 있어. ㅇㅇㅇ.
영현은 울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그대로 추락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였지만 바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너무 선연했다. ㅇㅇ는 잠궜던 문을 열었다.
"지금 가면 끝이라고"
"ㅇㅇㅇ"
"ㅇㅇ야"
나는 네가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영현아. 너도 나도 사랑하면서 외로운 건 행복이 아니잖아.
ㅇㅇ는 차문을 벌컥 열었다. 차마 이 순간만큼은 영현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ㅇㅇ는 그대로 문을 닫고 걸었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현실은 뜨거운 여름밤 그 뿐이었다. 끈적하고 뜨거운 바람이 사정없이 ㅇㅇ를 때렸다. 깨어난 현실은 볼품없는 제 자신 하나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이거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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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스트를 신청해주신 독자님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뒤늦게 클린 버전으로 올려드려 죄송합니다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