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거리는 온통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낙엽들이 슬슬 떨어질 준비를 한다.
이 로맨틱한 시기에 자신의 방에 우두커니 앉아 창 밖만 멍하니 바라 보는 한 소년이 있다. 제 앞에 앉아서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국어 문법과 수학 공식이나 읊고 있는 남자를 무시한 채로 소년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씰룩이며 애꿎은 지우개만 괴롭힐 뿐이었다.
Shit, 엄마는 도대체, 이 사람 왜 데리고 온 거야.
“…저기, 다니엘? 내 말 듣고 있니?“
“뭐라고?“
“…아니야. 다시 처음부터 알려줄게. 이번엔 잘 들어.“
“아, fuck.“
“…뭐라고 했어, 방금?“
“아, 다 알아 들었으면서 왜 물어? 미국에서 왔다며! 왜 말 하나하나 한국어 쓰려고 하냐?“
“…다니엘, 여긴 한국이잖아.“
`좋든 싫든 너는 한국에 왔고, 내가 알기로는 너는 네 아버지 사업을 물려 받아서 한국에서 일 해야 해. 그러려면 한국어도, 수학도, 어느 정도 기본으로는 할 줄 알아야 하고, 또 사업에 있어서는 상대방 기분 맞춰줄 줄도 알아야 해. 예절을 지키는 방법을 알아야 한단 말이야-` 라고 듣는 귀가 다 저릴 만큼 그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자, 다니엘? 이번엔 꼭 들어! 마지막으로 설명하는 거야.“
다니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제게 한국어와 수학을 중심으로 학교 진도에 맞춰 여러 과목들을 설명해줄 사람이라고 본인을 설명했다. 쉽게 말하자면 과외 선생. 분명히 어머니가 붙였을 거야- 하던 다니엘의 생각은 완전히 맞아들었고, 다니엘이 어머니께 항의를 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그 잘난 과외 선생의 편이였다.
“…다니엘, 엄마가 말했지. 엄마는 한국인이라서 네가 영어를 써도 뭐라는지 못 알아 듣고, 여기는 분명히-“
“한국땅이라고요? Shit, 말 하는 것도 똑같네.“
“그리고 네 과외 선생님은 자르고 싶어도 못 잘라. 적어도 3개월은 같이 있어야 할 거야. 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잡아서 엄청 비싸게 3개월 끊었거든. 대학원생이라 돈이 좀 필요하지 않겠니? 그러니까 아드님, 엄마 얼굴 봐서라도 좀 열심히 해봐.“
“…내 말 다 알아 들었구만. 뭘 못 알아 듣는다고.“
“으이구, 우리 아들. 대체 철이 언제쯤 들까-. 뭐, 그게 또 매력이니까, 그렇지, 사랑스런 내 아들?“
[…어, 무슨 일이야, 다니엘?]
“무슨 일이긴. 아, 진짜 짜증나.“
[과외 선생님 얘기구나?]
“…어떻게 알았어?“
[네가 매일 “fucking 과외 선생!“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크흐흐.]
“…….“
[…도대체 뭐가 그렇게 싫은 거야? 나라면 그냥 포기하고 친해지려고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짜증났던 건-
“…남자잖아.“
[푸푸풋. 그것 때문이냐?]
“아, 이왕 올거면 가슴 빵빵한 여자나 오지. 왜 키 작고 눈 땡그란 남자가 와서는.“
[으이구, 넌 언제 철 들래.]
“…줄리안 주제에 엄마랑 똑같은 말 하지마. 기분 나빠.“
[…그래서, 그 사람 이름은 뭔데? 만날 fucking 선생! 하지만 말고 이름을 말해봐.]
“……이름?“
그래서? 무심하게 반응한 다니엘은 책상 위에 엎드려 타일러를 째려봤다. 타일러는 당황한 듯 동그란 눈을 굴리다가 이내 웃으며 함께 엎드리고는 똑같이 다니엘을 빤히 쳐다 봤다. 갑자기 스윽하고 제 시야에 들어 온 얼굴에 다니엘은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왜, 너랑 눈 마주치는 것도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진도나 나갈까? 학교 교과서 펴봐. 어디까지 갔는지 보게. 웃으며 다정스레 말하는 타일러에 아무 말도 못 하고 퉁명스레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었다.
“오, 그래도 교과서는 들고 다니나 보네? 착하다.“
“…날 뭘로 보고.“
“뭘로 보기는, 문신 이만큼 하고 어른 보고 인사도 먼저 안 하는 버릇 없는 열여덟짜리 꼬맹이로 보지.“
“버릇 없는 꼬맹이?! 얼굴은 그 쪽이 더 꼬맹이 같거든?“
“그래, 그래. 그렇게 생각하든지. 그래 봤자 네가 버릇 없는 꼬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
“…뭐야, 교과서가 왜 이렇게 깨끗해? 학교에서 자는구나.“
“…자든 말든.“
“`자든 말든`이라니? 어른이 앞에 서서 땀 흘리며 수업하시는데 편하게 의자에 앉아서는 잠이나 자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
다니엘은 `재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온통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재수 없었다. “선생이면 다야?“하고 욕하고 싶었지만, 적어도 제 집에서는 선생이 다라는 게 사실이었다. 다니엘은 아무 말 못 하고 입만 씰룩거리며 어떻게 하면 이 인간을 쫓아낼 수 있을까 고민만 했다.
“그럼 나가든지.“
“존댓말 문화 아직 모르니? 왜 자꾸 반말해? 나이는 너랑 꽤 차이가 나는 걸로 아는데.“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나가면 된다니까?“
“…다니엘.“
“Fuck, 가! GET OUT of my house! 난 공부할 마음도 없어! 어차피 쓰지도 않을 거 왜 배우는 거야, 쓸 데 없게.“
“…뭐?“
“네가 문신을 하든, 나한테 욕을 하든 나랑은 상관 없는데,“
“…….“
“…대학교는 가자, 응? 너희 어머니께서 아들 잘 부탁한다고 하셨단 말이야. 너희 어머니의 그 눈을 보고도 어떻게 내가 널 가만히 놔두겠어.“
“…….“
“알았지? 수능 볼 때, 적어도 풀 수 있는 문제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어차피 난 그냥 영어 점수로 가면 되는,“
“…씁.“
“…아, 알았어! 하면 되잖아.“
“오옳지.“
아무리 반항기 어린 열여덟짜리라지만, 근심 어린 표정으로 어머니 얘기를 하면서 설득하는데 그 누가 무시하겠느냐. 저도 모르게 넘어가 버린 다니엘은 아차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3페이지를 풀고 있더라.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래, 나 이만 갈게.“
“그래. 빨리 가.“
“우와, 그러고 보니까 첫 시간인데 벌써 4페이지나 풀었네? 기특하다. 장해.“
“뭐라는 거야, 빨리 내 방에서……!“
무어라 타일러에게 욕을 하려던 다니엘은 벙하고 말았다. 타일러가 웃으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다니엘은 “뭐야, 머리 흐트러지게! 내가 아기인 줄 알아?“라며 타일러의 손을 뿌리쳤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나간 손에 또 다시 당황했지만 타일러는 싱긋 웃으며 제 외투와 가방을 챙겼다.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그리고 너 아기 맞잖아. 열여덟짜리 꼬맹이, 안 그래? 무튼 나 이만 간다? 잘 있어! 내일 또 보자-“
털컥- 하고 문이 닫히고, 다니엘은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제 머리를 한 번 정리하고는 중얼거렸다.
“재수 없어.“
“그러니까 왜 이게 3번이 되는지 알겠어?“
“…….“
“…다니엘?“
“…아, 몰라! 모르겠어!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면 여기에 왜 3을 곱해야 하는지는 알겠니?“
“…3을 곱했었어? 언제?“
“…….“
2점짜리 문제를 못 푼다는 사실보다는, 저를 바라보는 타일러의 `한심하다`는 눈빛이 짜증났다. 설명을 다시 할 때도 꼭 한숨을 쉬는 것이 짜증났다. 문제 하나를 틀릴 때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설명해주는 것도 짜증났다. 그냥 다 짜증났다. 조금은 창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짜증은 곧 서운함과 연결되었다. 제가 왜 그렇게 서운해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자신을 포기 않고 끝까지 도와주려는 사람이 처음이라서?
나름 노력도 해봤다. 등하교길에는 모르는 한국어 단어도 외워보고, 잠자기 전에 수학 공식도 읊어보고, 화장실에서는 심지어 교과서도 한 번 읽어보고. 요즘에는 잠도 안 자고 수업 듣는다며 선생님들께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 노력이 타일러한테는 드러나지를 않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상했다. 어디 처음이 쉽냔 말이다. 다니엘은 타일러가 그냥 저를 아직도 철 없는 꼬맹이로 보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이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데! 열심히는 하는데 드러나지를 않으니, 원. 다이어트 하는 사람 심정이 이런 거였나? 다니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니엘이 서운함에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면 타일러는 `집중을 않는다,``또 딴생각이냐` 등의 핀잔을 주었고 다니엘은 이에 또 다시 서운해지고. 그의 반복이 일어날 뿐이었다. 결국 수업은 다니엘이 멍하니 타일러의 얼굴만 쳐다보다 끝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다니엘?“
“뭐.“
“뭐어? 뭐라고? 너 이제 진짜 막 나간다?“
“됐거든.“
“…에휴. 국어 문제집이나 펴 봐.“
어느 순간부터 다니엘에게는 습관이 생겼다. 타일러에게는 반말만 사용하는 습관. 사실 다니엘도 나름 전통이 있는 가문 외동아들인지라, 아버지가 사업 상 만나는 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법을 잘 알았고 그런 어른들에게는 꽤나 예쁨도 받았으나 타일러에게는 이상하게 그런 것이 잘 안 나왔다. 예쁘게 웃는 방법이라든지, 착한 말투, 존댓말, 예의 바른 제스쳐 같은 것들 말이다. 다니엘은 그것은 분명히 타일러가 재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그래도 한국어는 좀 하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응?“
“아, 아니야. 그냥, 뭐. 국어는 원래 좀 잘 했거든?!“
“그럼 그런거지, 왜 갑자기 화를 내.“
“아, 내가 화 냈어? 아닌데? 화 낸 건 아니고…“
“뭐야, 왜 그렇게 횡설수설해. 빨리 다음 문제 풀어봐.“
“그, 그래.“
`내가 이것저것 노력했다고 말하면 뭐라고 할까? 타일러가 자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흥, 지가 뭐라고. 아니면 뭐,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겠어? 머리? 쓰다듬어 준다고? 그냥 말할 걸 그랬나? 아니야, 아니야. 그냥 자기가 선생으로서의 실력이 좋아서 그랬을 거라고 의기양양해 하겠지. 그 꼴은 못 보지. 재수 없어. 음, 그렇고 말고.`
“으이구, 너는 하여간. 칭찬을 한 번 하려고 하면 욕을 두 번 하게 하냐?“
“…선생이 할 소리냐?“
“선생? 서언새앵? 너 진짜 말버릇 어떻게 못 하니?“
“뭐가 문제야? 난 호주 살다 와서 뭐가 잘못 됐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너 진짜……. 반말 하는 것도 그냥 넘어가 줬더니.“
“뭐가아-?“
“…됐다, 됐어.“
“그래.“
“안 알려줄 건데?“
“…그러든가.“
“킥킥킥.“
“에휴…….“
*
“타일러, 이건 뭐예요?“
“아, 그건 말이야…….“
“아, 알 거 같다! 공식만 대입하면 되는 구나. 4번이죠?“
“맞아. 잘하네?“
“흐하하, 타일러 말 하는 거 열심히 들었거든요-“
“착하다. 친군데도 다니엘이랑은 다르구나? 줄리안.“
크흐흐, 그렇긴 하죠. 다니엘은 제 옆에 끼어들어서 타일러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대화하는 줄리안의 코뼈를 부수어버리고 싶었다. 이러려고 우리 집에 놀러온다고 했던건가. 다니엘은 줄리안에게 화가 날 대로 났다.
지난 주말이었다. 다니엘의 집에 함께 와서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놀던 둘은 실 없는 농담이나 주고 받으며 게임 랭킹 올리기에 분주했다. 다니엘이 한창 줄리안을 이기고 있을 무렵, 다니엘의 방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주중 과외라 주말에는 올 일이 없는 타일러가 USB를 놔두고 간 것 같다며 다니엘의 방에 들어왔다. 곧 USB를 찾은 타일러는 다니엘과 줄리안에게 작게 인사를 하며 방을 나가고, 멍하니 있던 다니엘에게 줄리안이 `저 사람은 누구냐,``나이는 몇살이냐,``너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냐` 등등의 질문을 했더랬다.
귀찮았던 다니엘이 대충 다 대답을 해주고 줄리안이 “나 이번 주 화요일에 너희 집 와서 놀아도 돼?“라 물었을 때도 알았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는데. 오늘 집에 도착해서 타일러 보고는 모르는 척 이름도 묻고, 나이에, 다니는 대학원 이름에, 저도 모르는 전화번호 까지 알아 가더니, “오늘은 온 김에 저도 같이 수업 받으면 안 되나요?“라니. 이런 식으로 나에게 엿을 먹일 줄이야, 다니엘은 줄리안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다니엘이 줄리안의 검은 속내를 알아차린 순간, 이미 때는 늦었고 줄리안은 타일러에게 점수를 왕창 따놓은 상태였다. 학교에서는 친구놈들이랑 떠들어서 선생님께 몇 번 씩이나 경고를 받고 심지어 시끄럽다는 이유로 벌점도 여러 번 받은 녀석이 가식을 떨며 타일러에게 잘 보이려 애 쓰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타일러는 그것도 모르고 착하다며 줄리안을 칭찬하는 것도 모자라 `네 친구 좀 본 받아라!`라며 다니엘을 꾸짖으니, 다니엘이 2점 짜리 수학 문제를 못 풀었을 때보다 훨씬 속이 상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타일러, 이거 모르겠어요.“
“응, 이건……,“
“아, 이거? 이거는……,“
“타일러, 여기 말이 이해가 안 가는데.“
“아, 그건 한국 속담이야. 무슨 뜻이냐면……,“
다니엘은 휴대 전화를 꺼내어 줄리안에게 문자로 욕을 보냈지만 줄리안은 문자를 보고는 여유로이 진동 모드로 변경하고 다니엘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야, 너 우리 집 나가.]
[나가라고.]
[안나가?]
[야!]
[야! 줄리안!]
[확인 안하냐?]
“네, 상관 없어요. 어떤 꼬맹이가 저 질투하나보죠.“
“응? 그래? 뭐, 네가 상관 없다면야…. 흠, 그런데 다니엘은 왜 자꾸 집중 안하고 휴대 전화만 만지작거려. 줄리안은 문자도 확인 안 하고 공부만 하는데.“
“어, 선생님. 이거 답 5번 맞아요?“
“응, 맞아. 어려운 문젠데 잘 풀었네, 줄리안.“
`…씨이-발.`
줄리안 저거 여우였구만? 타일러와 공부를 시작하고 꽤 오랫동안 욕설을 입에 달지 않던 다니엘은 순간 충동적으로 줄리안에게 소리 내어 욕을 할 뻔 했다. `후, 참자, 오늘만 참으면 돼. 내일부터는 쟤를 안 데리고 다니면 되잖아?` 속으로 중얼거린 다니엘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본인도 타일러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타일러, 이거 뭐야?“
“응? 뭐 말이야?“
“여기 4번 말이야.“
“오, 다니엘. 그거 내가 방금 풀었는데! 이 줄리안이 알려주도록 하지. 하하하!“
“그래, 줄리안이 다니엘 알려줘. 원래 서로 가르쳐 주면서 실력이 향상되는 거야.“
…실패.
“타일러, 13번 문제 알려주세요. 이해가 안 돼요.“
“타일러, 나도 가르쳐줘.“
“…다니엘, 잠깐만. 줄리안 먼저 알려주고.“
…또 실패.
“타일러, 26번 이거 뭐야? 하나도 모르겠어.“
“으이구, 이 바보야. 이거 아까 타일러가 알려줬잖아. A에 공식 3번 대입하고 B에 공식 1번 대입한 거 더하면 되는 건데.“
“맞아, 줄리안. 열심히 들었구나?“
“흐히히, 뭐, 조금. 타일러가 말해줘서 이해가 잘 된 거예요.“
“으이구, 말도 잘 하지.“
쾅- 하는 소리와 문이 닫혔고, 다니엘이 쿵쾅거리며 집을 나가는 소리는 다니엘의 방 안에서도 선명히 들렸을 정도였다. 당황한 둘은 다엘이 나간 문만 멍하니 바라봤고, 줄리안은 `타일러와 둘만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줄리안.“
“네?“
“혹시 다니엘이 왜 화났는지 아니?“
“음…아니요.“
“그렇구나…. 나 때문에 화가 난 건가?“
“글쎄요…….“
줄리안은 다니엘을 화나게 한 사람이 타일러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디 갔는지 따라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게요.“
“…아마 곧 올거예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을걸요?“
저한테는 다니엘 전화 번호 있는데 연락처 주기 싫어요-
줄리안은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사실들을 삼키고 외투를 챙기는 타일러를 멍하니 쳐다봤다.
줄리안은 `다니엘이 이겨버렸네,`하고 생각했다. 괜찮은 사람 처럼 어깨를 으쓱해봤지만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
*
“…….“
“줄리안이 여기 있을 거라고 했어.“
“…왜 왔어.“
“왜 오긴, 걱정되니까 왔지!“
“줄리안이나 가르치지 여긴 왜 왔냐고.“
“……너는 내가 가르치는 열여덟짜리 애가 갑자기 화 내면서 밖으로 나갔는데 걱정을 않겠니?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도 모르고,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연락처도 없는데!“
“…….“
“…화 내서 미안해. 걱정 돼서 그랬어. 빨리 집 가자. 응?“
집에서 뛰쳐 나온 애가 달려 온 곳이 고작 동네 놀이터라니, 아무리 다 큰 것 같아 보여도 애는 애구나 싶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태연하다는 듯 딴지를 거는 다니엘에게 큰 소리를 내고 만 타일러는 곧 다니엘에게 사과를 하고 손을 내밀었다. 다니엘은 화가 풀린 듯 보였지만 타일러의 손을 잡지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아…아니…….“
“응.“
“있지, 타일러.“
“응.“
“내 친구 얘긴데 말이야…. 내, 내 얘긴 아니고.“
“줄리안?“
“…아니, 걔 말고. 걘 이름도 꺼내지 마.“
“그럼 누구.“
“아니, 아니야. 됐어.“
뭐야, 뭔데 그래? 횡설수설하는 다니엘의 옆 그네에 앉은 타일러가 궁금하다는 듯이 다니엘에게 물었다. 뭔가 부끄러운 말을 꺼낼 때면 다들 친구 얘기라고 한다고 했던가. 다니엘은 눈을 굴리며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타일러, 있지. 나는…,“
“응.“
“나는…, 그러니까,“
“응.“
“…나는 타일러가 줄리안이랑 다정하게 얘기하니까 기분이 나빴어.“
“…그것 때문에?“
“아, 아니…그러니까…, 줄리안은 원래 그렇게 착한 애도 아냐! 타일러 앞에서 착한 척 하니까 꼴 보기 싫고, 또 타일러는 그것도 모르면서 막…막…웃어주니까…….“
“…으응.“
“그리고 나는…아, 모르겠어. 타일러가 줄리안 머리 쓰다듬으니까 갑자기 너무 화가 나서 뛰쳐나왔는데. 막상 나오니까 왜 화났는지도 모르겠구. 아니, 그런데 타일러는 내 머리 안 쓰다듬어 주잖아.“
“…그야, 머리 쓰다듬으면 네가 싫어하니까.“
“……아니, 그, 그건 그런데! 그래도, 그, 나는…그러니까….“
타일러가 다니엘을 빤히 쳐다보자 다니엘은 할 말이 없어져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애꿎은 신발만 흙에 비볐다.
“…다니엘.“
“응?“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타일러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회피했지만, 느껴지는 타일러의 시선에 다시 눈을 맞추었다. 다니엘은 자신의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너.“
“응.“
“나 좋아해?“
“…응?“
내가, 좋아해? 타일러를? 왜?
다니엘은 다시 초점을 맞추어 타일러를 쳐다봤다. 타일러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니엘은 발가벗은 사람 마냥 몸을 움추리고 얼굴을 붉혔다. 타일러는 눈썹을 들썩이며 다시 물었다.
“…아니! 안좋아해!“
순간적인 대답이었다. 다니엘은 제가 뱉은 말에 제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타일러는 다시 다니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제 오른쪽 눈썹을 두어 번 들썩이다 그네에서 일어나고는 제 손을 툭툭 털었다.
“…….“
“줄리안한테나 가야겠다-“
“아…아니…!“
“장난이야, 장난. 빨리 들어가자, 곧 너희 부모님도 오실거고.“
“…….“
“그래도 오늘 일은 미안하니까 내가 나중에 밥 사줄게-! 화 난 거 참느라 수고했어.“
다니엘은 타일러의 말이 끝날 때 까지 계속 제 발만 쳐다보다가 타일러를 향해 고개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 툭-하고 무언가 올려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명백히 타일러의 손이었다. 다니엘이 돌처럼 굳은 채 눈동자만 굴려 타일러를 바라보니 타일러는 웃으며 다니엘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어줬다. 다니엘은 보호 받는 느낌이 들었다.
“왜, 아기 맞잖아.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는 열여덟 꼬맹이 주제에.“
“…얼굴은 타일러가 더 어려 보인다니까.“
“뭐, 그래 봤자 네가 버릇 없는 꼬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
타일러가 손을 내려놓았다. 다니엘은 고개를 조심히 들어 타일러를 바라보았다. 타일러는 웃음기 어린 다정한 눈으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다시 한 번 얼굴이 빨개졌다. 타일러의 얼굴이 묘하게 예뻐 보였다. 술에 취하면 이런 느낌일까, 다니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키스해도 돼요?“
“…그, 그건,“
“넌 안 좋아하는 사람이랑도 키스해?“
“그, 그게 무슨…!“
장난이야, 타일러가 씨익 웃었다. 다니엘은 `역시 재수 없어-`라고 생각했다. 타일러가 그네에 앉아있는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타일러의 얼굴이 시야에 스윽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이렇게 스윽 들어와서 날 빤히 바라봤었지. 그 땐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진짜 싫었는데, 지금은, 아니, 어쩌면 그 때도…….`
`내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도 모를 만큼 천천히, 조용하게 스며드는 사람이구나. 그런 사람이구나, 타일러는. 난 타일러한테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타일러와 입을 맞춘 지금-
“옳지. 드디어 정답이야. 아주 큰 문제를 풀었네, 시험에도 안 나오는.“
“…2점짜리 수학 문제보다 더 큰 문제야?“
“그럼. 이건 점수로 매길 수 없으니까.“
“줄리안보다 내가 더 나은거네.“
“…꼭 그렇게까지 줄리안을 이기고 싶냐.“
“…좋아해.“
“알아.“
“좋아한다고.“
“알아-“
“…할 말 없어?“
“그래, 나도 좋아해, 다니엘.“
“뭐야, 그 말투는.“
“사랑한다는 뜻이야.“
“…뭐?“
“넌 나 안 사랑해?“
“아, 아니! 사랑해.“
“그럼 됐네, 뭐.“
…바람이 분다. 거리는 온통 분홍빛으로 변했고 낙엽들은 살포시 내려와 빨갛게 물든 소년의 뺨을 어루만져준다. 비로소 남자가 된 소년과 소년으로 돌아간 남자는 마주 보며 웃고 있고, 남자의 손은 소년의 머리를 다정하게 천천히 쓰다듬는다. 드디어, 따뜻한 가을의 시작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