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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잘 풀린모양인지 아침부터 꼭 붙어다니는 준면과 세훈을 본 종인은 마치 제 자식 둘이 화해해서 기쁜 것 마냥 엄마미소를 지었다. 화해 할 것 같더니 하루아침에 저리 달라지냐 신기하고 기특해서 턱을 괴고 둘을 바라보니 그 시선을 눈치챈 세훈이 그저 자신과 준면을 관찰하는 걸로 생각해 종인을 노려봤다. 어딜 자꾸 쳐다 보는거야?
세훈은 종인이 보란 듯 준면에 귓가에 조용히 말을 걸었다.
"형"
"응"
"형, 나 없는 동안 종인선배하고만 다녔어?"
"응"
"에이씨"
"왜? 나 안 그럼 아싸야"
"아, 아니야"
자신이 준면을 멀리할 동안 새로운 등장인물이 끼어든 것 같다. 혹시나 내가 없는 틈을 타 준면을 꾀어내려는 속셈이었는지 모른다. 평소에도 자신에게는 별다른 표정을 짓는 일이 없는데 준면앞에서만 실실 웃고다니니 여간 신경쓰인다. 지금도 저거봐라, 강의에 집중은 안 하고 가끔씩 고갤 틀어 준면을 쳐다보는 꼴 하며. 세훈은 그런 생각들이 미치자 갑자기 준면을 일으켜세워 자신과 자리를 바꾸게 했다. 영문을 모르는 준면은 왜이러는 거냐며 작게 타박했지만 곧 강의에 집중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자리를 바꾼 세훈은 제 등을 살짝 틀어 준면을 가리려고 애썼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종인은 영문을 모르겠지만 웃기는데 보기좋은 광경이라고 짧게 생각했다.
세훈은 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준면이 김종인의 눈에도 똑같이 비춰지고 있는 건지 꽤나 큰 의심을 하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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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강의실을 떠나고 있을 때 자연스레 준면의 곁으로 오고있는 김종인을 캐치해 낸 세훈은 준면을 제 뒤에 숨기고 마주했다. 물론 눈치빠른 종인은 이 행동을 보곤 세훈에게 화해했냐? 하며 키득 웃곤 지나갔다. 더 할 말이 있었지만 그냥 삼켜버린 종인이었다.
준면은 그저 종인의 일방적인 대화를 듣고만 있을 뿐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맘에 안 들어"
"응?"
"아니야"
준면은 세훈의 조용한 읊조림이 걸리긴 했지만 딱히 묻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캐묻기 힘든 표정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곤 김종인이 걸어간 복도 끝을 노려보고있으니 뭔 말을 하겠는가.
설마 자기랑 쌩까고 있을 당시에 종인이랑만 다녔다고 질투하는 건가?
…아, 이거다.
"오세훈아"
"왜"
"우리 오랫만에 사우나나 갈까?"
"…웬…."
"안 간지 좀 오래됐거든. 몸도 좀 근질근질하고"
"…더러워"
퉤. 됐다. 됐어. 준면은 세훈의 무심한 말에 고개를 홱 돌리곤 걸어나갔다.
이 놈이 이 형님이 같이 목욕탕엘 가주겠다는데 거부한다 이거지? 괜히 삐진 '척'을 하며 씩씩대는 포즈로 걸어나가니 급하게 달려와 준면의 어깨를 잡는 손.
"아, 하하, 형! 오랫만에 묵은 때좀 벗겨보자!"
그래, 니가 날 내버려두고 배기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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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불 한증막 사우나.
번화가 쪽은 아니었지만 꽤 규모가 큰 사우나에 들어선 준면과 세훈은 입장 후 열쇠에 적힌 락커룸을 찾았다.
1580, 1581…. 아, 저기다! 준면은 빼곡히 들어차있는 락커룸의 번호를 찾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준면의 뒤로 느릿느릿한 걸음의 세훈이 따랐다. 락커에 가방을 던져넣었다. 편한 사우나복으로 갈아 입으려 상의를 벗으려던 중 가만히 뒤돌아있는 세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저러고 있지?
"형, 있잖아…."
"어?"
"먼저 갈아입어"
그 말을 남기곤 멀리 걸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로 자리를 뜬 세훈이 걸렸지만 바지까지 갈아입은 준면은 락커룸을 잠궈 세훈을 찾으러 분주히 움직였다. 어디있니 세훈아, 초코우유 사먹으러 매점갔니. 형한테 제대로 말은 하고 가야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돌아다니던 중 뒤에서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뒤를 돌았다. 물론 오세훈이었다. 파란색 반팔, 반바지의 사우나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짠~"
"…뭐냐…."
"옷 넣고 올게"
입을 죽 찢어 웃고있던 세훈은 다시 표정을 굳히곤 1581락커룸쪽으로 가버렸다. 준면은 어이가 없어 세훈이 돌아올때까지 표정을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준면의 얼굴을 보고 세훈은 어쩐지 미안함에 뒷머리만 북북 긁었다. …형이랑 사귀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나니까 형의 맨 몸을 똑바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같이 지내온 세월이 아주 오래 됐지만 단순히 형이라 느낄 때와, 짝사랑을 할 때, 그리고 현재 제 애인이라 생각 할 때의 느낌은 다 달랐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 대놓고 보라면 볼 수야 있겠지만 그런 영광적인 상황은 준면과 둘이 있을 때 처음 겪어보려고 한다면 이유가 될 것이다.
세훈은 지금 이 순간이 설레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형, 우리 내기 하나만 할까?"
"내기? 뭔 내기?"
준면은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세훈이 얄미웠지만 내기라는 제안에 금방 솔깃해졌다. 준면은 게임을 좋아해 평소 세훈이, 아영이와 자주 내기를 했었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병나발로 원샷을 한다던지, 수영장에서 잠수한 채로 숨을 오래 참는다던지, 매운 음식을 먹고 물은 안 먹는다던지 하는 흔히 누구나 일상에서 하는 게임이었다. 많은 게임들 중에 준면이 이긴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이지만.
"형, 사우나에 오면 뭘 하겠어. 불가마에서 오래 버티는 거지"
"…하하, 난 포기. 난 오래는 못 있는단 말이야."
"안 돼! 소원들어주기로 할거야. 물론 터무니 없는 건 안 할 거고, 안 하면 벌금 십만원"
준면은 곧바로 그런게 어딨냐며 따졌지만 제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세훈이 들고 불가마로 들어가버리자 하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뭐든 꼭 동의없이 저러니. 애긴 애야.
준면과 세훈은 후끈후끈한 불가마 속에서 아빠다릴 한 채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지금 딱 십분이 지났다. 준면은 얼굴이 발갛게 익었고, 세훈은 그나마 양호했다.
형, 힘들면 포기해도 돼. 싫어 포기 안 해. 왜? 동생을 그렇게 이기고 싶어? 세훈의 작은 도발에 준면의 눈썹이 꿈틀댔다. 후-포기. 준면은 한쪽 손을 올려 졌다는 제스처를 취하곤 수건을 챙겨 나갔다.
"자, 그래서 소원이 뭐야"
땀을 닦던 준면은 제 뒤를 따라 나온 세훈을 보며 물었다. 그까짓 소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것 같진 않으니 한 번 들어주고 끝,
"오늘 하루는 내가 형이다?"
…은 무슨.
알았지? 응? 응? 하는 세훈의 면상을 한 대 갈기고 싶어졌다. 겨우… 아니, 하루 형 해보겠다고 이런 내기를 제안한 세훈이의 괘씸함에 허허 웃음만 나왔다.
"음, 우리 세훈이가 날 형으로 안 보이기 시작했구나~ 하하, 세훈아, 이 형은 아무리 너보다 키가 작아도 형이란,"
"우리 준면이 형 돈 많나봐. 나 오늘 용돈 십만원 줄거야?"
"형! …세, 세훈이 형! 목 안 말라? 우리 식혜 먹자! …아하, 하하하하!"
준면은 금전적으로 액수가 불려지자 다급함에 두손을 맞잡곤 사랑스런 표정으로 세훈을 형이라 깍듯이 불렀다. 그리곤 장난감 병정처럼 어색하게 매점을 향해 걸어가더니 뒤돌아서선, 빨리 안 오세요 형?하며 세훈을 재촉했다. 세훈은 그런 준면을 보며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가 흥분한 상태로 콧김을 내뿜으며 칙칙폭폭하는 그 모습이 떠올랐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다가 결국엔 주저앉아 몇 분간 혼자 끅끅대며 웃어버렸다.
뭐야, 김준면. …너무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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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자정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준면이 세훈에게 동생이 된 지도 다섯시간 가량 지나있었다.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준면은 저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을 형이라 부르니 고역이었지만, 세훈은 색다른 경험에 재미붙여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형 노릇을 빙자한 야자타임 덕에 '준면인 왜이렇게 귀여워?', '준면인 왜이렇게 작아?', '준면인 왜이렇게 우유같이 하얘?'라며 준면의 머릴 쓰다듬었다. 준면은 그런 세훈의 쓰다듬에 어금니를 꽉 깨물곤 웃어보였다.
"네, 형. 제가 좀 귀… 귀엽…그래요! 하하하"
네 이놈의 자식을….
준면은 조금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이제 26분만 지나면 하루는 땡이다. 땡. 내기에서 금방 포기를 선언한 제 자신을 후회했다. (어차피 이길 확률도 낮았다.)
세훈은 준면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준면의 자취방 근처 놀이터 벤치에 앉혔다.
"나 말이야, 형."
어, 어? 아직 20분 남았는데. 준면은 이 말을 하려다 삼켰다. 까불까불 거리던 세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굳은 표정으로 준면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난 솔직히 이대로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사람 욕심이란 게 한도 끝도 없나봐. 나 욕심 많은 거 알지? 사실 형을 오래 봐와서 이것 저것 해본 게 많잖아. 근데 못 해본 것도 너무 많아. 이건 나중에 차차 하면 되는 거고, 그러니까…."
"……."
"사귀는 사이면 다 하는, 그런 거 있잖아. 난 형이 먼저 허락한다면 할거야."
"뭐, 뭐야 그게"
"형, 나한테 설레는 감정은 없지?"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걸 예상하고 물어봤지만 왠지 그 대답이 나오면 조금 서운할 것 같았다. …제발.
그러나 준면은 세훈의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렇구나. 세훈은 시선을 피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역시 나만 짝사랑하고 있었어. 슬퍼, 완전 슬프다. 김준면 나빠.
자신의 머리만 괜히 꼬아대며 세훈의 눈치를 살피던 준면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미안. 난 아직까지도, 세훈이 너가 친한 동생같아. 그렇다고 싫지도 않아. 거부감 없어. …그럼 된 거 아니야?"
"아니야, 그걸론 안 돼!"
그럼 된 거 아니냐니, 괜히 욱한 세훈은 준면이 자신에 행동 하나하나에 가슴이 터질만큼 설레서 얼굴까지 빨개졌으면 좋겠단 상상을 했다. 어찌하면 좋을까? 잠깐 생각하는 시간을 갖던 세훈은 자신에 왼편에 앉아있는 준면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물론, 준면은 반응없이 눈만 꿈벅거리며 세훈을 살폈다.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실패다. 세훈은 남은 오른손으로 준면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준면은 그 손을 떼었다. 뭐하는 거야?
정말 형은 눈치가 없다. 내가 이렇게 애타는 걸 모르는 건 당연지사. 되려 뭐하냐며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형, 안 설레?"
"어깨동무 한 두번 하냐"
"맙소사"
세훈과다른 준면이 야속해 제 머릴 쥐어뜯었다. 오세훈 망했다. 이 형을 어떻게 꼬시냐.
"항상 하던건데, 어떻게 설레. …나보고 어떡하라고…"
준면은 괜히 죄지은 사람마냥 고갤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