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훈련 안 가세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한 말이었다. 침묵이 너무 숨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숨이 어디로 간지도 모르게 나는 제대로 호흡하지 못했다.
"오프 날이야."
"아……."
"넌 회사 안 가?"
"…계약 끝났어요."
한 달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다. 서로의 일상에 철저하게 침투해 영향을 안 미치는 곳이 없던 그 시절과는 상반되었다. 나는 그가 언제 일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시간은 올림픽이 끝나던 그 날, 멈춰있었다. 내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한 곳에 고인 지 벌써 한 달이었고 이대로 가다간 썩을 게 분명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미숙했다.
미숙했기에 우리 사이에 끊긴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헤어진 남자친구는 그가 처음이었기에 나는 전여친으로서 어떤 태도를 갖고 그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애를 할 때 같이 정답을 찾아나가던 사쿠사는 이제 내 옆에 없었다. 이제는 혼자서 해결해야 했기에 나는 미숙했다.
"…잘 지내셨어요?"
"…어."
담백한 목소리였다. 나는 괜히 손톱을 괴롭혔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인데."
그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낱말들을 뱉을 것처럼 다시 입을 뗐다 꾸욱 다물었다.
"…됐다. 티비보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해. 네 원피스 저기서 말리고 있으니까 알아서 입고 가."
나름의 답을 적은 거였는데 오답인 모양이다. 사쿠사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나는 사쿠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인데 스스로 그를 떠났다는 것을. 우리의 이별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이미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시간은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걸 거스를 능력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눈물 조금 흘리면서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을 상처 투성이인 손으로 주워 담을 뿐이었다. 마침 이곳은 우리의 연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공간이었기에 나는 쉽게 기억을 펼쳐낼 수 있었다.
다음 날에 시험이 있던 밤이었다.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라 가끔 이렇게 잠 들지 못하는 밤이 있었다. 나는 사쿠사가 깨지 않게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바깥의 빛들에만 의존한 채 소파에 앉아 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새벽의 고요함도 내 불안함을 잠재워주지는 못했다. 시간이 더해 갈수록 나는 초조하고 불안해져 오히려 더 잠에 들지 못했다. 한숨은 쉴 새 없이 나왔고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막 잠에서 깬 사쿠사가 나에게로 오고 있었다.
"나 때문에 깼어?"
사쿠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파에 앉아 뒤로 나를 껴안았다.
"…왜 안 자고 있어."
고개를 내 어깨에 묻으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웅얼거리는 소리와 닮아 있어 살풋 웃음이 나왔다.
"내일 시험이라 잠이 안 와."
"머리 만져줘?"
"응."
사쿠사는 그대로 나를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나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쓸어주었다. 사쿠사의 따뜻한 손이 머리카락들 사이로 들어찼다. 그런 손길과 사쿠사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아까까지만 해도 아슬아슬했던 마음이 고요한 상태로 잠겨들었다. 거짓말처럼 천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건지 나는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거실 소파였고 큰 티비가 틀어져 있었다. 나는 넓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린 채 앉아서 자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대략 두 시간은 잔 것 같았다. 뻐근한 몸을 펴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나는 우연히 소파 테이블 밑에 있는 내 가방을 발견했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어제 같이 술을 먹었던 친구가 잘 들어갔냐는 안부 문자가 와있었다. 친구에게 답장을 남겨주고 폰을 끄려는데 문자 하나가 더 와있었다. 어제 취하기 전에 잠깐 마주쳤던 지인이었다. 술을 먹기 전에 와있던 문자인데 지금에서야 확인하게 되었다.
[아까는 당황해서 말 못했는데]
[너 쇄골에 멍 들었는데 모르는 것 같길래]
[다른 사람도 멍 볼까 싶어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었다. 나는 머리카락으로 급히 멍이 들어 있는 쇄골을 가렸다. 가방 끈에 부딪혀 생긴 멍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위치가 오해하기 딱 좋은 위치이기도 했으니. 가령 키스마크라던가, 말이다.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다른 사람이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지금 신경이 쓰이는 거라고는 혹여나 사쿠사가 보았을까 하는 게 컸다. 이미 헤어진 마당에 상관이 없다면 그랬겠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설령 사쿠사가 봤다고 해도 그가 크게 신경을 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든 부정적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사고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괜한 오해는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한다.
나는 사쿠사가 있을 안방 문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란다로 가 널려 있는 원피스를 만져 보았다. 거의 다 말려 있었지만 끄트머리 부분이 아직은 조금 축축했다. 치마 끝자락이라 몸에 직접적으로 닿이는 부분도 아니었고 끝이 조금 젖어있다고 해서 못 입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다 말린 게 아니라는 핑계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한다.
유예시간 늘려봤자 달라질 게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을 끝으로는 더 이상 사쿠사와 마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아서. 오늘이 정말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대한 늦추고 싶을 뿐이었다. 사쿠사는 아까를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내비쳐주고 있지 않지만.
지금은 그와 관련된 모든 걸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후회하고 있는 게 있다면 헤어지자고 말한 그 순간이 아니라 올림픽 합숙을 가기 전에 있었던 5일, 그 시간들이 제일 후회스러웠다. 그때 너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눴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참 부질없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당시 가족도 없이 홀로 해외에 있던 너는 어땠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 기간에 누가 더 힘들었냐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건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너도 참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넌 그 5일 동안 나에게 투정 하나 부리지 않았다. 어쩌면 올림픽 합숙 기간 동안 나와 연락하지 않은 이유가 나에게 모진 말들을 할까 싶어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 없는 감정 싸움이나 할까봐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걸까. 그러나 나는 끝내 정답을 알지 못한다. 너의 공백은 나의 상상력으로만 채워야 했다. 너는 항상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나는 최대한 너를 예쁜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영원히 안 열릴 것 같던 문이 열렸다. 누가 나오는지 알면서도 내 고개는 절로 돌아갔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먼저 시선을 끊어낸 건 사쿠사였다. 그는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확인했다. 곧 점심시간이니 밥을 먹을 생각인가 보다.
“점심 먹을 건데.”
“아…… 전 괜찮아요.”
사쿠사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사쿠사가 밥 먹을 준비한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에 신경쓰지 않으려 억지로 티비에 집중했다. 그러나 눈가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마그네슘보다는 사쿠사의 말 한 마디가 부족했다.
밥 먹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밥을 거르고 싶어할 때가 꽤 있었는데 사쿠사는 절대로 용납해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밥을 먹지 않는 걸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먹이진 않았다. 대신 내가 밥을 먹고 싶게끔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쿠사는 할 수 있는 요리가 점점 많아졌고 나 때문에 요리는 취미가 되었다. 참 정성이 지극한 남자였다.
나는 멍청하게도 헤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헤어진 게 뼈가 시릴 정도로 자각할 때마다 하염없이 가라앉았다. 결국 나는 티비 소리를 조금 더 키우고 폰을 주워 들었다. SNS에 들어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근황을 살폈다. 아, 얘 결혼하는구나. 얘는 취업했나보네. 그러나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뭐든 사쿠사와 연관시켜 생각해버려서 가라앉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참아내느라 목이 시큰거렸다.
차라리 집에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쿠사는 아니었다. 음식할 재료를 손질하고 있던 사쿠사가 한숨을 내쉬며 하던 걸 멈추었다. 손을 닦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있는 소파를 지나쳐 그대로 베란다로 갔다. 사쿠사는 널려있는 원피스를 손으로 잡아 확인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사쿠사는 원피스와 속바지를 옷걸이에서 뺐다. 손에 쥐고 이쪽으로 걸어왔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 말랐어."
"아……."
나는 심장을 꺼내는 마음으로 옷을 건네 받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쿠사의 얼굴을 한 번 봤다가 푹 고개를 숙였다. 내가 들고 있던 원피스 위로 하나둘씩 동그라미를 그리며 젖어들어갔다. 최대한 참아보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금방 가버릴 줄 알았던 사쿠사는 내 앞에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았다. 사쿠사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시야가 흐릿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안아주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울지 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정한 듯하나 명백히 우리 사이가 끝났음을 알리는 총성과 같았다. 사쿠사는 그제서야 날 지나쳐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은 화가 난 듯한 발걸음이 한 기점에서 멎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발걸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방향이 예상치 못했다. 방으로 들어가버릴 줄 알았던 사쿠사는 내게로 왔다. 안아주지 않겠다고 못 박았던 사람이 다시금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혹여나 그가 금방 떨어질까 싶어 급하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한 팔은 허리에, 한 팔은 엉덩이 밑에 손을 위치시킨 그가 나를 들어올렸고 그대로 소파에 앉아 예전에 해줬던 대로 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너면서 왜 우는데."
내 등을 쓸어주는 손길은 다정했으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 괴리에 나는 쉽사리 정신 차리지 못했다.
"미련이야? 아니면 죄책감? 동정? 확실하게 해. 짜증나려고 하니까."
손길은 멎고 차가운 사쿠사의 말만 내 귀에 멤돌았다. 극도의 저소음으로 인해 귀가 웅웅 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사쿠사에게서 몸을 뗐고 우린 하반신만 붙어있는 채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후회, 라고 하면 안 되는 거지."
절로 숙여지는 얼굴을 사쿠사가 붙잡았고 그대로 입술을 겹쳐왔다. 나는 그의 어깨부분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러자 사쿠사가 내 손을 잡아 내리며 동시에 거칠게 입 속으로 그의 것이 침투해왔다. 그와는 셀 수도 없이 많이 키스 했지만 이렇게 거칠게 내 안을 헤집은 적은 처음이었다. 온몸으로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하는 것 같았다. 거칠기도 거칠었고 빠르기도 빨라 내 숨은 점점 막혀왔다. 절로 고개가 뒤로 움직였고 그 탓에 목이 아파왔다. 그러나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도 그 사실을 아는 건지 빠르게 나를 밀어붙였다.
결국 사쿠사를 따라가지 못한 나는 숨을 헐떡였고 그제서야 입술을 조금 떼어냈다. 나는 가슴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폐를 공기로 채웠다. 가슴의 움직임이 조금 사그라들었을 때쯤 사쿠사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또 한 번 격렬한 키스가 오고 갔고 우리는 어느새 침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예쁜 입술로 내 숨을 막았고 내가 헐떡이면 다시 숨을 불어놓아주었다. 내 숨은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더 떨어진 입술에 내가 격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그는 내 목으로 내려갔다. 목에 키스하는 건 여러 번 있었지만 그 자국을 선명하게 새기는 건 처음이었다. 낯선 자극에 내 입에선 절로 오랜만에 듣는 소리가 나왔다. 그에 반응하듯 사쿠사는 나를 그대로 집어 삼키려는 건지 내 몸에 자신의 흔적들을 별자리 그리듯 남기기 시작했다. 조금은 집착스러운 몸짓이기도 했다. 그의 입술은 더 내려와 내 쇄골에서 멈췄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내 쇄골을 응시했다.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가방이랑 부딪혀서 멍,"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입술을 삼켰다. 혀를 섞으면서 그는 내 멍을 꾸욱 눌렀다.
"아…!"
사쿠사는 내 영혼을 뿌리째 뽑아내려는 듯 나를 탐했다. 우리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것들을 하나씩 벗어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그의 몸짓에서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잔뜩 솟구친 그의 분노가 당장에라도 나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사쿠사가 내 몸 위로 제 몸을 겹쳤다.
"……보고 싶었어."
사쿠사의 한 마디에 몸이 녹아 흘러버릴 것 같았다. 다시금 눈물이 났다. 그는 눈물을 따라 내 얼굴에 입을 맞춰 주었다.
"……나도."
타성의 궤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