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신나는 음악 그리고 그곳에서 춤추는 나. 여기는 블랙자칼 홈타운인 오사카. 나는 현재 여기서 치어리더로 일하는 중이다. SNS 팔로워 10만, 구독자 15만명이 빛나는 나름 유명한 인플루언서라는 말씀! 어쩌다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더라...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한국에서 오사카에 있는 대학교에 유학을 왔다. ‘일본의 특유의 길거리 감성, 여름 마츠리, 디즈니랜드...!’ 온갖 환상을 가지고 유학을 왔지만 현실은 과제에 치여 살아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내 한번뿐인 유학 생활을 이렇게 망칠 순 없어’ 그 길로 나는 급하게 대학교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만한 것을 찾았다가 치어리딩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대학교 1학년 당시 ‘그대에게’와 ‘질풍가도’로 치어리딩 동아리에서 이름을 날리던 나다. 이정도는 껌이지!
친구를 사귀는 1차 목표는 이루었다. 동아리 친구들이 많이 생겼으니까. 문제는 예상 밖으로 너무 많이 생겼다는 점. 치어리딩을 하면서 찍은 영상을 심심해서 유X브에 쇼츠로 올렸는데, 이게 알고리즘을 타서 영상 조회수가 꽤 되었다. 그렇다. 인터넷 친구들이 많이 생긴 것이다. 한국에 있던 친구들은 내 영상을 보며 ‘(영상)’ ‘야 너보고 예쁘대 ㅋㅋㅋㅋ’ ‘와 조회수 대박이네’ ‘일본 어떰? 좋냐?’ 등등 여러 연락을 보냈다.
점차 늘어나는 팔로워와 구독자에 놀라는 나날이었다. 동아리 친구에게 ‘닝쨩, 아르바이트 하지 않을래?’라고 연락이 왔다. 유학 생활 중 매번 부모님께 돈을 받기 죄송스러웠던 와중 반가운 연락이었다. 그래서 냉큼 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오게 된 곳이 바로 ‘MSBY 블랙자칼’이었다.
원래는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모집하여 부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처음 한 두 번 일하다가 블랙자칼 측에서 나에게 따로 제안을 해왔다. 계약직 치어리더로 일하지 않겠냐고. 내가 유튜버인 걸 알고 준 제안이었는지, 단순히 열심히 치어리딩 하는 나의 모습의 감격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돈을 더 벌 수 있었고 프리랜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기에 계약을 하였다.
모든 일엔 대가가 있다. 계약을 했으니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맞다. 블랙자칼에서 일하면서 치어리딩 하는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 했다. 원래는 추억 저장용으로 영상을 올렸는데, 이제는 나를 좋아해주는 팬도 생겨서 그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랄까. 그러던 와중 한 관계자분이 나를 불렀다. 부른 이유는 선수들과 콜라보 영상을 올려서 구단 홍보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인 출신인 나는 인터넷 유행이나 밈을 꿰차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틱X이나 인X타에서 유행하는 영상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반응도 꽤 좋았기에, 아마 구단 측에서 그러한 영상을 보고 부탁하는 거 같았다. 구단에서 부탁한 선수는 총 4명. 히나타 선수, 보쿠토 선수, 미야 선수 그리고... 사쿠사 선수. 다른 선수들은 다 그렇다 쳐도 사쿠사 선수는 왜 여기 껴있는 거지?! 차라리 메이안 선수로 바꿔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계약직인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리가. 그냥 알았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 안녕!!”
“누고?”
“츠무상! 이번에 영상 같이 찍기로 한다던...”
“아, 안녕하십니꺼”
영상을 찍기 전 첫 회의를 진행한다고 하여 우선 선수 대기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라는 관계자님의 말에 따라 선수 대기실에 들어갔다. 내 쪽에서 인사부터 하는 게 먼저겠지 싶어서 인사를 하니까 차례대로 히나타 선수가 밝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줬으며, 보쿠토 선수 또한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미야 선수는 제대로 된 설명을 못 들었는지 누구냐고 물어 히나타 선수가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인사를 해주었다. 아직까지 인사를 하지 않은 사쿠사 선수에게 시선이 가자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멀어.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며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악수를 건넸다. 아까와 같은 순서대로 악수를 하다 ‘사쿠사 선수 되게 깔끔떤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급하게 주머니에 있던 손소독제를 뿌리고 그와 악수했다. 구단에서 일하다가 주워들은 이야기였다. 그런 나의 모습이 웃겼는지 미야 선수가 크게 웃었다. 하하. 앞으로 나 괜찮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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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 영상은 생각보다 잘 진행되었다. 히나타 선수는 유연성이 좋아서 그런지 유행하는 노래에 맞춘 커버 댄스를 3편정도 올렸는데, 다 조회수가 잘 나왔다. 보쿠토 선수의 경우 워낙 피지컬이 좋기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옷을 입혀서 코디하는 영상을 올렸더니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 서로 남자친구를 태그하며 이렇게 입으라고 남겨진 댓글만 몇 백 개가 넘었던 거 같다. 아츠무 선수는 사람이 능글맞은 부분이 있어서 상황극 연기를 시켰더니 본인이 신나서 예정보다 여러 편을 더 올렸다. 이 영상을 올린 뒤 아츠무 선수 개인 SNS 팔로워가 2만명 정도 늘었다고 들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사쿠사 선수. 이 선수한테는 내가 먼저 이거하자 저거하자 제안하기도 어려웠다. 워낙 사람이 호불호가 확실해보이고 다가가기 어렵달까. 고민을 하던 중, 심플하게 배구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찍기로 했다. 배구 영상을 제안했을 땐, 내가 너무 날로 먹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걱정했는데, 구단 관계자 또한 그 편이 블랙자칼의 매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거 같다며 좋아했다. 사쿠사 선수도 다른 선수들처럼 이상한 걸(?)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꽤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한동안 경기하는 사쿠사 선수의 영상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았다. 특히 스파이크를 할 때 유연하게 회전하는 그의 손목 부분을 집중해서 찍었다. 아무도 건들지 못하고 땅에 꽂히거나 리시브를 받더라도 많이 흔들려 결국 사쿠사 선수에게 득점이 가는 모습들을 모아 영상을 편집해서 올렸다. 여태까지 콜라보한 영상들과는 다소 결이 달라서 걱정이 되었다. 배구 룰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밌을 영상일까?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사쿠사 선수의 영상이 앞선 3명의 영상보다 조회수가 훨씬 잘 나왔다. 말 그대로 초대박이 났다. 여태까지 내가 올린 영상 중에 제일 조회수가 높아 인기동영상 1위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사쿠사 선수의 경기 모습은 원래 예정 되어있던 3편보다 더 많이 찍게 되었다.
“혹시 이날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와 몇 편의 영상을 더 찍기 위해서 스케줄을 맞추었다. 백수인 내가 그의 스케줄에 맞추는 게 다였지만. 생각보다 잘 나오는 조회수에 나 또한 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2주 가량을 사쿠사 선수의 경기 영상 찍는데 시간을 보낸 거 같다. 처음엔 제일 낯설고 친해지기 어려웠는데, 다른 선수들에 비해 함께한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이젠 그가 나름 편하게 느껴졌다.
“말.”
“네?”
“놓는 거 어때요? 어차피 동갑인데.”
“아... 네, 좋아요!”
반말을 할 수 있는 사이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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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상하다. 여느 때와 같이 블랙자칼의 경기가 끝나고 치어리딩 복장을 갈아입고 퇴근하려고 나서는 길이었다. 가끔씩 팬들이 퇴근길이라며 나를 기다려주고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구장을 벗어나면 그렇게 서로 갈 길을 갔다. 그런데 오늘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냥 나의 착각이겠지 뭐.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때가 많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찾을 수 없었기에, 신경이 예민해진 시기였다. ‘오!’하며 나를 발견한 보쿠토 선수가 인사를 하려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나도 모르게 놀라 ‘꺅!’하고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은 적이 있었다.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단순히 내가 놀라는 줄 알고 보쿠토 선수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그 시선의 주인이 다가온 줄 알고 겁에 질려 쉽게 일어설 수 없었다.
그러다 하루는 내 락커룸에 웬 쿠키와 편지가 놓여 있었다. ‘닝아, 오늘도 예쁘다.’라는 문구였다. 동료가 넣어둔 것일까? 아님 팬 분이 전해달라고 한 것일까? 다음날엔 ‘주황색 유니폼보단 검정색 유니폼이 더 어울려’, 그 다음날엔 ‘어제 안무 실수했더라. 그런 모습도 귀여워.’ 이게 말로만 듣던 스토커인가? 이 쪽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예측이 안 갔기에 막막했다.
오늘도 퇴근하는 길에 나를 기다려준 팬들이 있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고 구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구장을 벗어나 주차장을 지나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나의 손을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 사람이 내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 토끼 눈을 뜨며 상대방을 확인하니, 늘 경기를 보러 오고 퇴근길에 있었지만 나에게 말을 한 번도 안 걸었던 남성 팬이었다. 그냥 소심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스토커였을 줄이야.
“닝아, 이 시간에 위험하게 혼자 가? 나랑 같이 가자.”
저기요, 지금 그쪽이 제일 위험해 보이는데요. 눈이 맛 간 사람 같았다. 그가 내 입을 가린 한쪽 손을 느슨하게 풀어 내가 대답할 수 있도록 치워주었다.
“누, 누구세요? 왜 이러세요. 손 놔주세요.”
미,친 놈에겐 정상적인 말이 들릴 리가 없겠지. 나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한 채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겁에 질려 한 발짝 두 발짝 뒤로 가다가 벽에 부딪혔다. 지금은 대부분 퇴근했을 시간이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올 사람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소리를 질렀다가 저 사람을 자극하면 어쩌지? 이 무서운 상황을 빨리 탈출하고 싶어 머리를 굴리지만 겁에 질린 내 뇌에선 괜찮은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
하 어머니, 딸은 이렇게 먼 타국에서 떠나갑니다. 라고 속으로 외쳤을 때인가,
“거기, 뭐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그쪽을 구원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사쿠사였다.
“사쿠사!”
내가 큰 소리로 그의 목소리를 부르니 스토커가 부리나케 도망쳤다. 스토커는 의외(?)로 쫄보였는지, 아니면 본인이 사쿠사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는지 바로 갔다. 스토커가 도망치고 나는 놀란 마음에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뭐야? 괜찮아?”
“응,,,? 아, 아니, 너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사쿠사는 땅바닥에 앉은 내가 신경 쓰였는지 일어나라고 손을 건넸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다시금 주저앉았다. 사쿠사는 쯧-하고 혀를 한 번 차더니 나를 들어 올렸다. 나는 놀라 그대로 팔을 사쿠사의 목에 감아 지지대로 삼았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를 그와 했다.
“여기 계속 앉아 있을 거 아니잖아.”
“어, 그렇긴 한데, 이 자세는 좀...”
“놀란 거 같은데 내가 태워다줄게. 내 차 타고 가.”
거절을 하기엔 혼자 가는 저 길이 너무 무섭게 느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며칠간 있었던 일과 방금 겪은 일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묵묵히 들어줬다. 중간 중간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앞으로 내 차 타.”
“응? 아니야 그건 너무 민폐일 거 같고...”
“어차피 가는 방향이야. 또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나는 사쿠사와 출·퇴근길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날 밤, 나는 자기 전에 ‘꿈속에서 스토커가 나오면 어쩌지?’하는 무서움을 가지고 잠에 들었으나 막상 꿈에선 사쿠사가 등장해 나에게 공주님 안기를 하였다. 다만, 꿈속에서 나는 공주님 사쿠사는 옆나라 왕자님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게 뭔 개꿈이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꿈속에서의 사쿠사의 품은 따듯했기에 다시 떠올리며 혼자 괜히 부끄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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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사와 함께 출퇴근하는 길은 금방 익숙해졌다. 늘 정해진 시간에 우리 집 앞으로 내려가면 사쿠사의 차가 앞에 서있고 나는 그 차의 조수석에 익숙하게 앉는다. 한 번은 정해진 시간보다 늘 미리 오는 사쿠사에게 미안해서 5분 정도 일찍 나간 적이 있는데, 그래도 그는 나보다 빨리 도착해있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지?
그렇게 차를 타고 체육관에 도착하면 각자의 할 일을 하러 떠난다. 그리고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주차장에 가면 때에 따라 내가 사쿠사를 기다리기도 하고, 사쿠사가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그렇게 함께 차를 타고 퇴근을 한다.
“사쿠사 이 영화 봤어?”
"아니.”
“그럼 보러 가지 않을래?”
가끔 영화가 보고 싶은 날엔 영화를 보러,
“사쿠사 저녁 먹었어?”
“아직. 너는?”
“나도 못 먹었어. 이 근처에 ‘○○’ 여기 되게 맛있대. 갈래?”
“그래.”
이렇게 저녁을 함께 하기도 하고.
“아니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하자고 했거든?”
“응, 그래서?”
하루의 일과를 공유하기도 한다.
경기가 없어 출근할 필요가 없는 날엔 그의 영상을 찍는다는 핑계로, 아니면 치어리딩 춤을 연습한다는 핑계로 출근을 하곤 했다. 그렇게 해서 출근해봤자 하는 일과라곤 그가 배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지만. 그렇게 그의 일상엔 내가, 나의 일상엔 그가 자연스레 자리를 차지했다.
문득 달력을 보니 곧 한국을 돌아가야 하는 시기였다. 비자 기간의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애초에 블랙자칼 들어올 땐, 계약직으로 들어온 거라 계약 기간도 끝나가던 참이었다. 1달도 채 안 남은 시간이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쿠사한테도 말해줘야겠네.
“나 이제 한국 돌아가야 해.”
“한국? 돌아간다고?”
한국이라고 해서 여행간다는 줄 알았는데,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사쿠사는 되물었다.
“응,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서. 블랙자칼도 이번 주가 마지막 출근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 한국인이야?”
사쿠사는 내가 한국인인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말한 적이 없었구나. 늘 일본어로 대화하는 나를 보며 내가 한국인일거라 생각 전혀 못했겠지.
“응. 아, 벌써 도착했네. 내일 봐 사쿠사”
집 앞으로 도착한 사쿠사의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곧장 집으로 들어왔다. 사쿠사랑 헤어지려니 엄청 허전하고 서운한 기분이 벌써부터 들었다. 아, 아쉬워라.
그 다음날 나는 어제 느낀 아쉬움을 싹 잊어버릴 수 있었다.
“결혼할래?”
평소와 같이 출근하려 그의 차에 타 막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매던 참이었다. 갑작스런 그의 청혼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결혼? 그니까 지금 이거 청혼하는 거야?”
“응.”
대답과 함께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는 사쿠사. 손에 끼워도 되냐고 묻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연애라면 모를까, 갑자기 청혼하는 그 때문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연애말고 결혼이라니. 거절하면 우린 이대로 끝인걸까. 결국 수락도 거절도 못 한 채 반지는 내 손에 끼워지진 않고 케이스에 고이 담겨 나에게 전달되었다. 일단 생각해보라는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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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사의 입장에선 닝은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늘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귀찮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청결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겐 특히. 하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도 않았으며 그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녀가 눈치가 제법 빠르며 배려심이 깊은 편이라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쿠사는 직감했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그녀와는 영영 끝날 거 같다는 직감이. 그래서 돌직구로 청혼을 준비하였다. 당장 조급한 느낌은 들어도 어쨌든 본인은 진심이었으니까.
닝은 당황스러웠다. 사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결혼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혼을 이유로 사쿠사와의 인연을 끊기엔 그녀 또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각보다 컸다. 시작도 못해보고 끝내기엔 너무나도 아쉬웠기에. 그리고 사쿠사가 얼마나 진심으로 그 고백을 했을지 예상이 가기에.
결국,
“사쿠사 나도 네가 정말 좋아.”
“그럼,”
“근데, 난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우린 아직 어리잖아.”
“응.”
“그러니까, 우리 연애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
당장 결혼하는 건 아니고 약혼의 형태로 연애를 시작하는 둘. 그렇게 닝은 얼마 안 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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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피곤해?”
“괜찮아. 내가 오고 싶었어.”
그는 틈만 나면 한국으로 왔다. 진짜 말 그대로 틈만 나면. 본인의 스케줄에 공백이 생길 때마다 한국행 티켓을 끊어서 왔다. 물론 나는 남자친구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일본에서 한국이 옆집 드나들 듯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니까. 어린 나이에 프로 선수로 뛰고 있는 그에게 돈 걱정은 안 되었지만, 체력이 걱정이었다.
“자주 안 와도 괜찮은데.”
“거짓말 하지마. 얼굴에 다 쓰여 있어.”
“하하, 들켰어? 그래도 피곤하면 일본에서 쉬어.”
“난 여기 있는 게 쉬는 거야.”
한 마디를 안 지네. 웃으며 그의 품속에서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제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몇 개월째 한국을 오가는 그를 보며 이럴 바엔 진짜 결혼해서 같이 사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침대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뒹굴거리던 차에,
“우리 그냥 결혼 할까?”
라는 나의 말에 사쿠사는 내 어깨에 박아두었던 얼굴을 꺼내 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이제 슬슬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
내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그는 나를 감았던 팔을 풀고 내 양쪽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깊은 입맞춤을 했다. 그의 말캉한 혀가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이러다 내 입술이 그에게 집어 삼켜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깊은 입맞춤에 숨 쉬기 힘들어져 고개를 뒤로 빼자 그는 나에게
“계속 기다렸어.”
라고 말한 뒤 다시 나에게 다가와 입맞춤을 했다.
그 뒤로는 일이 술술 진행되었다. 그날로 사쿠사는 바로 우리 부모님 댁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언제 한국어 공부를 했는지, 아주 능숙하게 잘하더라.) 바로 결혼 허락을 받았다. 부모님은 다소 놀란 눈치셨지만, 상대는 국가대표 선수. 행동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그를 보고 아주 흡족해하셨다. 그렇게 우리 둘의 결혼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블랙자칼 멤버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봤다. ‘오미군, 티 억수로 나던디?’, ‘사쿠사상, 닝상 축하드려요!!’, ‘와! 나 결혼식은 처음인데! 우리 가도 되는 거 맞지?’ 어째 우리보다 더욱 신나보이던 세 사람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아, 결혼식 당일에 유X브 계정으로 생방송을 진행했다. 여태까지 영상만 찍어서 올렸지 생방송은 처음이었는데, 생각 외로 후원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다. 치어리딩은 이제 안 해서 못 올리지만 결혼 일상 브이로그 같은 걸 올리겠다며, 구독자들과 약속했다. 그렇게 내 수많은 인터넷 친구들도 나를 축하해줬다.
무더운 여름날 블랙자칼에 들어가게 되었고,
선선한 가을날 그와 함께 일상을 맞이했으며,
추운 겨울날 그가 한국으로 찾아오고,
따듯한 봄날 그와 함께 결혼을 준비했으며,
다시 돌아오는 여름에 부부가 되었다.
작년 여름은 치어리딩 하느라 덥고 습해서 짜증났었는데, 올해는 이 더위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져 열정적으로 보낼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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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ㅎㅎ 갑자기 사쿠사가 예쁜 치어리더랑 사귀는 모습이 떠올라서 급하게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사실 길게 풀어야하는 내용을 많이 함축해서 내용은 짧지만, 무튼 돌진 사쿠사가 보고 싶었습니다. 사쿠사는 여름보다 겨울이 더 어울리는 거 같지만 지금이 더운 여름이니까요~! 이번 편은 상, 중, 하 없으 그냥 한 편이 끝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