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종은 아마 크보에서 가장 정이 많은 투수일 것이다. 지금은 대투수라고 불리지만 나는 그를 볼때마다 막내딸이라는 별명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의 백넘버 54번은 2008년 방출된 입단동기 이준수의 번호를 단 것이다.
그의 모자 겉에 새겨진 DH는 201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야구선수 이두환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모자 안쪽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진 김동재 전 코치의 이니셜 DJ 87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It's Lima Time!
호세 리마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 메이저리그에서 89승을 올린 커리어가 짱짱한 투수였지만, 이후 저니맨이 되어 여러 나라를 거친 끝에 한국까지 오게 되었다. 리마가 한국에, 기아 타이거즈에 정착하게 된 것은 2008년. 그는 이미 노장이었고, 이미 무뎌진 구위는 크보에서도 통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결국 리마는 시즌 중반에 방출당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성적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았고 아직까지도 기아 팬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유쾌하고 친근한 성격의 리마에게 선수들과 팬들은 호감을 느꼈으며, 리마는 더더욱 밝은 모습과 팬서비스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열악한 무등 구장의 환경에 불평 한마디 없었으며, 그를 상징하는 '리마 타임', 걸작 '재주 스패로우' 등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기아의 레전드 이종범 역시 그의 성적이 좋았으면 더 많은 인기를 끌었을 거라며 아쉬워하곤 했다.
그런 리마와 가장 친한 것은 양현종이었다. 다른 선수의 제보에 의하면 서로를 아버지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그 당시 양현종은 극심한 부진에 빠진 2년차 5점대 후반의 풋내기였다. 하지만 리마는 언제나 양현종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야 너 활발한 성격인거 아는데 왤케 기죽어있냐? 아니 마음먹고 던지는 네 공은 아무도 못 친다고 단순한 충고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양현종에게 리마의 말은 큰 힘이 되었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리마가 방출되었을때, 성적부진으로 헤매던 양현종은 2군에 있었기에 그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뒤늦게 그의 방출을 알게 된 양현종은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 해에, 양현종은 포텐셜을 터뜨리며 기아 우승의 한 축이 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양현종은 2010년 6월 2일 커리어 최초의 완봉승을 기록한다.
해캐가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양현종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호세 리마가 기억난다고.
그는 자신에게 참 많은 것들을 해주었다고.
그 직후 양현종은 모자에 리마를 상징하는 문구인 "LIMA TIME"을 새긴다.
양현종을 좋아하는 한 팬이 있었다.
2010년 6월 5일, 그녀는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양현종은 그녀가 꼭 한번이라도 자신과 통화를 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이를 흔쾌히 수락한다. 하지만 그 날 그녀의 상태가 악화되어 통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2010년 6월 18일, 그 일을 마음에 걸려하던 양현종은 경기가 끝난 후 혼자 택시를 타고 일산 암센터로 향해 그녀를 만난다. 마스크를 쓰고 링거를 맞으며 누워 기침을 하고 있던 그녀를 보며 망설이던 양현종은, 자신의 싸인볼과 기아 선수들의 싸인이 담긴 종이를 선물로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들며 웃어보였다.
양현종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신이 20승을 하는 날(이것은 2017년에 이루어진다) 그녀를 VIP 석에 초대할 것이고, 그 날은 당신만을 위한 피칭을 할테니 제발 나아달라고 부탁한다.
2010년 6월 27일, 결국 그녀는 사망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손에 양현종의 싸인볼을 쥐고 있었다면서 유골함 옆에 공을 두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양현종은 그를 승낙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리마의 이름 옆에는 팬 최초로씨의 이니셜 CCR이 새겨진다.
등에, 모자 겉에, 모자 안에
레이스를 마치지 못한 동료와 은사와 팬의 이름을 새기고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
베테랑이 된 지금까지도 이들과 함께 매 경기 진지하게 피칭에 임하는 대투수, 내가 양현종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글들을 모으고 살짝 각색했습니다. 원글 링크들은 못 찾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