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있길래 펴왔습니다. 작가님께 직접 허락 맡았으니 저작권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코미디의 선
우리는 종종 뉴스에 나오는 무례하고 안하무인인 사람들에 분노한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의식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 더더욱 분노한다. 도덕과 예절을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그건 어디까지 양심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지키는 사람이 무시하는 사람보다 많다는 건 윤리라는 것이 개개인의 수준에서 훌륭하게 설득되며, 그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단단한지 잘 보여준다. 코미디는 그런 사회적 합의 위에서 기능한다. 코미디도 정해진 선이 있다. 사회적 합의를 벗어난 코미디를 우리는 무례함이라고 부른다. 장애인의 신체적 결함을 두고 놀리거나,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개그가 환대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곳에 있다.
권력자를 볼 때 우리는 이중적인 감정이 든다. 하나는 경외감과 두려움이며, 다른 하나는 분노와 질투심이다. 태생적으로 코미디라는 장르는 후자의 감정을 건드린다. 암묵적인 위계를 역전시키고, 계급을 전복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원초적인 카타르시스를 재료로 피지배자들의 효능감을 충족시킨다. 코미디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중세 유럽의 궁정 광대는 왕, 귀족, 부자, 정치인을 자신들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린 뒤, 그들의 특권의식과 부도덕, 위선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직업이었다. 그런 행동은 단순히 웃음을 주는 것을 넘어, 권력자들의 독선을 막고, 부조리한 사회에 분노한 구성원들의 불만을 간접적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과거의 코미디는 법의 테두리 밖에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적인 장치로 기능했다.
코미디의 순기능이 공동체의 선에 일조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왜 소수자를 향한 개그가 사회적으로 용납받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주류 집단이 소수자를 대할 때는 두 가지 감정이 양립한다. 하나는 이질적인 요소에서 느끼는 배타심 내지는 혐오감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를 향한 가여움이다. 소수자를 향한 코미디가 암묵적으로 금지되는 이유는 후자의 감정에 기인한다. 결국 그들에게 느끼는 혐오감보다 동정심의 총합보다 크기에 그들을 웃음거리로 삼는 행위가 카타르시스가 아닌, 불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간이라는 종 전체로 확대하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동정심이 더 크다는 건 인간이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갈등이 판을 치는 사회라도, 맹목적인 증오와 폭력을 쏟아내던 시대라도, 사실 모두의 마음속에는 인류애가 토대하고, 휴머니즘의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학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원초적인 윤리적 본능에 기반한다.
그러니 약자를 놀리는 개그를 금지하는 건 성역화가 아닌, 윤리의 범주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인권의 보편적 보장을 인간에 대한 성역화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반박할 수 없는 명제여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윤리이기 때문에 가치있다. 약자를 향한 가여움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자신보다 약하고 하찮은 것을 공격받는 상황을 마주할 때 불쾌하도록 진화했기에, 우리는 약자를 향한 개그에 웃을 수 없다. 이건 머나먼 선조들에게서 받은 원초적인 감정이다. 결코 사회가 만들어내고 강요한 상이 아니다.
불행히도 몇몇 사람들은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런 감정을 유독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회가 강요한 부당함이라 생각하고, 이성에 반하는 사고라 여기는 듯하다. 그런 접근에 민감한 사람들을 ‘불편충’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고 즐기지 못하는 사람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민감해야 한다. 단호하게 지적하고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의 선과 관련된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소수자를 비하하는 개그에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건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코미디가 가진 사회적 책임을 이해한다면, 잘못된 것을 교정하려는 태도야말로 건강한 코미디 문화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알 수 있다.
특정 부류를 대상화해 웃음거리로 삼는 특성상 코미디는 선을 넘기 굉장히 쉽다.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면 웃음은 조롱이 되고, 풍자는 비하가 된다. 윤리라는 것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다. 남을 웃기려는 마음보다 상처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선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선’이라고 부른다. 코미디의 선이 지켜지지 않을 때, 개그는 정체성을 잃고 무례함으로 전락한다. 기억하자. 해학와 해악은 한끝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