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연작소설 이끼숲
하나의 감정만으로 삶 전체를 설명하는 건 마르코에게 어려웠다. 어떤 순간은 마르코를 살고 싶게 했고, 어떤 순간은 마르코를 죽고 싶게 했다. 살아가는 건 징검다리 건너듯이 원치 않아도 어느 순서에는 반드시 불행의 디딤돌을 밟아야만 하는 것 아닌가.
백은선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무력한 것만이 유효하다는 믿음은 손쉽게 이루어지면서도 부서지기 때문에 너는 그럴듯한 기분으로 태도를 지키기 좋았지. 시 안에서 꽃이 다뤄지는 방식으로. 미래처럼. 절망하기 위해 태어난 포즈는 늘 호응받기에, 너는 줄곧 들여다보았지. 들여다보지 않는 순간에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흔들림이라고 적었지.
백수린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이규리 산문집 사랑의 다른 이름
뒷모습은 자신도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성소 같은 곳. 뒷모습이 일면 종교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실상은 잠시의 체온만 나눈 채 스쳐가고, 남은 곳을 더듬어 우리는 먼 시간을 갈 것이다. 텅 빈 허무가 우리가 찾아 헤매던 진심이라는 것도 알게 할 것이다. 왜 춥고 먼 아름다움을 선택했을까. 말해지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데 기대어 오늘을 산다.
김개미 시집 작은 신
당신이 말하지 않은 말까지 이해해요
당신이 저지르지 않은 짓까지 용서해요
내 머리에 신의 부스러기가 뿌려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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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권의 책,
모두 여성 작가의 글이야
자신의 글들이 조각조각 유명해져도
누구의 글인지도 모른 채 소비되고
손에 잡히는 건 없어서 슬프다는 어떤 작가의 말을 봤었어
이 글 속 한 문장, 한 단어라도
여시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기를 바라
마침내 책으로도 만나게 되기를 바라
축축한 여름날, 책과 함께 즐겁게 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