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변한 것은 여성만이 아니다. 2017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남성연대에 균열을 내고 있는 남성들이 있다. 바로 페미니즘 단체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다.
독서모임으로 시작한 남함페는 현재 페미니즘 교육과 칼럼 연재, 소모임 운영 등 성평등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성교육이 호평이다. 지난해 다섯 차례 진행한 '신-남성 연애스쿨'이라는 제목의 성교육에는 총 80여 명이 참여했고, 평균 4.82점의 만족도를 보였다. 오픈 카톡방에는 8월 기준 9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활동을 시작한 지 8년차에 접어든 이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남함페 운영위원 이한(32세)·김태환(29세)·김근우(32세)·김연웅(29세)·한정민(28세) 씨를 서울 신촌에 위치한 남함페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가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해도 되나"
'속죄 페미니즘' 한계 넘어 도달한 곳
"속죄하는 페미니즘의 한계를 만났다. 남성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위치성과 권력을 계속 성찰하고, 반성했다. 하지만 반성에만 멈추지 않고 어떻게 하면 페미니즘 운동 영역을 더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이한 씨가 말했다. 김근우 씨 역시 비슷한 고민을 나눴다. "페미니즘 활동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했다. 남자인데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해도 되나, 내가 나서도 되나하는 고민이 항상 있었다"며 "오히려 이 마음이 적극적으로 운동하고 활동하는데 걸림돌이 됐다. 이제는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고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알았기에, 섣불리 나서고, 남성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다 오히려 여성 페미니스트의 발언권을 뺐는 게 아닌지 고민스러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남함페는 '속죄가 변화를 위한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속죄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성찰하며 계속해서 페미니즘 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속죄 페미니즘'을 넘어 이들이 도달한 주제는 결국 돌고 돌아 '남성'에 대한 이야기다. 군대 가기 전의 막막함, 알파 남성이 되지 못해 느끼는 박탈감, 몸에 대한 콤플렉스 등. 이들이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남성'과 '남성문화'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더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한 씨는 "좀 더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됐으면 좋겠다. 남성이 갖고 있는 같은 고민들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장벽을 낮추고 싶다"고 했다. 김근우 씨도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맺어야 할 관계의 모습을 보여 준다"며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벗고 페미니즘 언어가 회복과 치유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페미는 '유니콘' 아니면 '버펄로'?
다과회 열고 페미니즘 수다 나눌 것
지난 8월 남함페는 남다른 성교육센터와 함께 '난 대학시절 성·관계를 전공했단 사-실' 특강을 3차례 걸쳐 진행했다. 남성 청년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 성적인 욕구와 섹스에서 동의를 어떻게 구해야하는지 등에 대한 강연을 했다.
김연웅 씨는 "소수지만 남성 청년들이 참여했다.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을 나누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질문을 했다. 분명 변화하는 사람은 있다"고 했다.
남성인 이들은 페미니즘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는 것일까. 김태환 씨는 "대학생 때 책모임을 하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다. 여태까지 고민해왔던 문제들의 원인을 알게 됐다. 이후 페미니즘을 접하며 공부를 했다. 그러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경험을 했다"고 했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근우 씨 역시 "대학생 때 주위 친구들이 페미니즘 동아리를 같이 해보자고 권해 함께 책도 읽고 공부도 시작했다. 안전한 공간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페미니즘은 회복의 언어였다. 어렸을 때 가정폭력에 휘말렸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과거의 상처가 회복되는 경험을 했다"고 했다.
김연웅 씨는 "페미니즘은 시대정신이다. 2017년 즈음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다보면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권력을 이해하게 된다.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페미니즘 언어를 실천했을 때 주변 동료들과, 가족, 애인과 관계가 좋아졌다"고 했다.
한정민 씨도 "저도 2017년쯤 페미니즘 리부트 때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다. 당시 SNS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서 왜 이렇게 페미니스트들은 화가 나 있는지 주위 친구에게 물었다. 그때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페미니즘이 여성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페미'로 살기는 쉽지 않았다. '남페미'는 '유니콘' 아니면 '버펄로'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존재할 수 없거나, 여자와 사귀고 싶어서 잠시 페미니스트의 탈을 뒤집어 썼다'는 의미의 말이다.
김연웅 씨는 "가끔 친구들에게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페미니스트인 척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진짜야, 너네도 해봐'라고 한다. 페미니즘을 하면 여성이 잠재적 애인이 아닌 여성과 동료가 될 수 있다. 세상이 넓어진다. 역으로 페미니즘 좀 해보라"고 했다.
한정민 씨는 "오히려 남성의 언어가 협소해졌다"며 "신자유주의, 능력주의 안에서 남성들은 어떤 박탈감을 느끼는지, 동시에 사회가 남성을 어떤 자원으로 취급하는지 등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남성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페미니즘이 희망을 주는 메시지여야 지속가능할 것"이라며 "능력주의 사회 안에서 페미니즘이 어떻게 서로를 연결하고, 어떤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고 김태환 씨가 말했다.
남함페는 좀 더 편하게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접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한 활동가는 "강의는 좀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을 위해서 '페미니즘 다과회'를 열려고 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페미니즘 고민이 있다면, 같이 수다 떨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한편, 남함페는 그간 성평등한 사회 조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4년 양성평등문화상' 을주문화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