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늘도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을 이야기하려고 해.
사라지지 않을 이름, 황현숙 선생.
이 분은,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셨고,
독립과 여성 계몽, 그리고 여성 권익 향상에 헌신하신 분이야.
이번 글에서는 선생의 삶과 업적을 따라가며,
선생님께서남긴 불굴의 의지와 유산을 되새겨볼게
2024년 12월 13일,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을 한 번 더 기억하자.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고, 독립과 여성 계몽, 그리고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야.
1. 어린 시절과 항일 의식의 형성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신 황현숙 선생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으셨대.
광명여숙에 다니면서 스승 임영신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고, 독립과 자유를 향한 의식을 점점 키워나가셨어.
2. 3.1운동과 천안 만세운동의 주역
1919년 3월 2일, 임영신 선생님에게 독립선언서를 전수받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결의를 다지셨대.
“우리는 목숨을 걸고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태극기 아래서 다시 만나는 날까지 용감히 싸우라.”
3월 20일, 천안 양대리 광산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셨고, 밤마다 하급생들과 태극기를 제작하며 준비를 했다고 해.
그날 오전 10시, 흰 댕기와 상복을 입고 주민 600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로 향하셨어.
이후 체포되셔서 10일 동안 고문을 당했고, 결국 징역 1년형을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하셨어.
3.우연 아닌 인연
수감 중에 황현숙 선생님은 유관순 열사와 같은 방에 있었어.
열사의 상실감을 공감하며, 민원숙, 한도숙 선생님과 함께 사식을 나눠먹으며 서로 마음을 나눴대.
4. 광복 이후 여성 계몽운동의 선구자
1924년, 요코하마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귀국해서 여성 권익을 위한 계몽운동을 계속하셨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충남 홍성 지역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하셨고,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단식투쟁까지 하시며 끝까지 저항하셨어.
5. 독립 후의 삶
1948년, 윤치영 초대 내무장관의 권유로 대한민국 경찰로 입문하셨어.
여성 최초의 경무관으로 제3대 치안국 여자경찰과장에 취임하시며, 여성 경찰 제도의 토대를 마련하셨지.
부녀자 보호와 여성 사건 처리를 맡아 사회적 약자 보호에 헌신하셨어.
서울, 대구, 부산, 인천에 있던 여자경찰서를 이끌며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힘을 쏟으셨어.
6. 여성 권익과 계몽운동의 끝없는 열정
조선여자국민당을 창당하고, 여성 참정권과 봉건적 가족주의를 없애기 위한 운동도 하셨어.
또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 출마하면서 새로운 나라 건설에 대한 열의를 보이셨대.
7. 황현숙 선생의 유산
1964년 10월 20일,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독립운동과 여성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헌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2015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면서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았고,
2019년에는 경찰청이 선생님이 대한민국 최초 여성 경무관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공로를 재조명했어.
사라지지 않을 이름, 황현숙 선생.
그분의 삶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의 기초가 되었고,
앞으로도 후손들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남을 거야.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야.
다음 편에서는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기대해도 좋아!
#bbs_contents #mArticle > div:nth-child(7) {display: none;}#bbs_contents ins div{display:none;}#bbs_contents @font-face {font-family: 'Ownglyph_noocar-Rg';src: url('https://fastly.jsdelivr.net/gh/projectnoonnu/2405-2@1.0/Ownglyph_noocar-Rg.woff2') format('woff2');font-weight: normal;font-style: normal;}#bbs_contents p,br,body,table,td,input,form,textarea {font-size:13pt;font-family:'Ownglyph_noocar-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