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을 위한 세계
W. 다원
"나갔다 올게."
"어디?"
"C구역. 얘 발견된 곳에 다녀와보려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던 정국이 자켓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호석이 뒤를 돌아봤다. 크롭과 대화를 나누려 노력하던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정국을 향하니, 크롭마저 어색하게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은 그런 시선들을 모두 무시한 채, 익숙하게 총을 들어 허리 뒤편에 꽂았다.
"그래. 그래도 무료로 이렇게 봉사해주고 있는데, 잘 부탁한다는 말 같은 건 없고?"
"내가 쟤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래도 지금은 네가 데리고 있잖냐."
"어쩌라고."
"매정하기는."
"간다."
정국이 망설임 없이 문을 향했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싶어 어색하게 손을 들어올리던 그녀가 머쓱한 손을 다시 내렸다.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정국이 망설임 없이 문을 나섰다. 진짜 싸가지 없기는. 정국이 나선 방 문을 바라보던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곳은 자신이 살던 곳과는 다른 곳이라는 건데. 그냥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만 막연히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는데, 무언가 차가운 것이 얼굴을 건드린다. 고개를 들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크롭이 자신을 바라본다. 검지 하나만 들어 조심스레 그녀의 미간을 문지른다. 인상 쓰지 말라는 건가. 천진난만한 크롭의 얼굴에 그녀가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빠르긴 빠르네. 벌써 걷고 있다니."
"그게 무슨-"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그녀의 시선이 호석을 향한다.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다 잠시 멈춰 선다. 시선을 돌려 크롭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그가 걷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서툰 움직임이 아닌, 정말 우리와 같이 두 발을 이용해 걷는 안정된 걸음. 처음엔 분명 발을 바닥에 끌고 있었다. 그 증거로 크롭의 발엔 무수한 상처가 나있었다. 그럼,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소년은 걸을 수 있게 된 걸까.
"어떻게-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걸을 수 있게 된 거에요?"
"글쎄. 습득력이 빠른 거 아니겠어? 네가 걷는 걸 보고 따라 하나보지."
담담한 목소리에 맥이 빠진다. 아까 정국의 기분이 어땠을지 조금 이해가 가는 그녀였다. 호석이 뒤적거리던 냉장고에서 빨간 사과를 하나 꺼낸다. 자연스레 싱크대를 향해 흐르는 물에 사과를 씻는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에 자리를 잡는다. 또다시 허공에 자리한 다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사과 달다. 잘 익었네."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그가 그녀를 바라본다.
"넌 이 세계가 안 무서워?"
"네가 살던 곳과 다르잖아."
호석이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녀와 호석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호석이 묻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해 살풋 인상을 찡그린다. 호석은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이 곳에 부는 피비린내가 무섭지 않냐고 묻는 것일까, 아님 내가 원래 있던 곳과 다른 이 곳이 무섭지 않냐고 묻는 걸까. 자신을 꿰뚫어 보는듯한 호석의 눈빛에 그녀는 시선을 피해 애꿎은 크롭을 바라본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당황스러운 감정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다 다시 호석을 바라본다. 아무렇지 않게 사과를 베어 무는 모습. 착각이겠지. 그녀의 굳어있던 얼굴이 풀어진다.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서, 무섭지 않은가 봐요."
"적응이라. 이 곳이 그런 단어를 들먹일 수 있는 곳인진 처음 알았네."
솔직히 그녀 자신이 느끼기에도 이상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적응이 되지 않아 좀 낯설 뿐. 솔직한 그녀의 대답에 호석이 옅은 웃음을 터뜨린다. 호석의 웃음에서 씁쓸함이 비춰졌다. 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호석이 고개를 돌려 크롭을 바라봤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과는 조금 다른 그것을.
"쟤 이름은 뭔데?"
예상치 못한 질문에 그녀가 벙진 얼굴로 호석을 바라본다. 이름이요? 당황한 얼굴로 되묻는다. 호석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 아이들도, 이름이 있어요?"
"아니, 없지."
"그런데 왜-"
"뭐야, 실망이네. 너라면 이미 지어줬을 줄 알았는데."
그제서야 아까 느꼈던 위화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너라면. 그 말이 그녀의 귓가를 맴돈다.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를 바라본다. 오래 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는 듯,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안다는 듯한 행동.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 호석을 바라본다.
"...절 아세요?"
"아니 뭐, 그닥."
거짓말이다. 그녀의 직감이 소리쳤다. 지금 호석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자신은 호석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까 크롭이 느낀 것과 비슷한 느낌이 그녀를 찾아왔다. 저 자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우리 세계는 딱 네 개로 나눠져."
"크롭, 리퍼, 콜렉터, 사람."
호석이 말을 돌린다. 그녀와 마주쳤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애써 그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가만히 호석을 바라보던 그녀 또한 무덤덤히 시선을 돌린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해오던 것이었다. 하기 싫어하는 이야기는 애써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가 단 한번도 좋은 이야기였던 적이 없으니까.
"크롭은 지금 네 뒤에 있는 거. 비정상적으로 마른 몸에 붉은 눈동자를 하고 있으며, 사람을 먹고 죽이지."
"네가 발견 됐던 곳이 C구역. 크롭들을 모아둔 곳이야. 사람들은 절대 출입할 수 없는 곳이고."
호석의 말에 그녀의 두 눈이 커진다. 그래서 정국이 처음에 그렇게. 그제야 비정상적이라 생각했던 정국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그녀의 두 눈이 크롭을 향한다. 그럼 저 아이가. 말도 안 돼. 크롭 또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엔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다. 저런 눈을 하고 어떻게 사람을 먹고 죽일 수 있어. 그럴 리 없어.
"지금은 당연히 믿지 못하겠지. 살인을 하는 것도, 의식이 없을 때니까. 지금은 네가 보는 것처럼, 아주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잖아? 마치 자신이 사람인 것 마냥."
"이걸 속는 거라고 표현해야 하나. 뭐, 뭐라고 해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쟤를 너무 믿지는 마. 네가 무엇이고, 네가 얼마만큼 크롭에게 영향을 끼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슬프게도 이 세계에서 크롭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니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크롭이 그녀의 옷자락을 붙든다. 그녀를 바라보는 크롭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온다. 이런 아이에게 괴물이라니. 그녀가 걱정 말라는 듯 자신의 옷자락을 쥔 크롭의 손을 꽉 붙든다.
"그 다음은 리퍼. 예를 들어 전정국이나 나."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고, 총을 가지고 다녀. 크롭을 죽이는 게 일이야. 반대로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는 거고."
"지금 여기가 B구역, 리퍼들이 사는 곳이지."
"이 출입증이 있어야만 이 곳에 들어오고 나갈 수 있어."
호석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출입증이라고 적인 것을 꺼내 흔들었다. 아까 정국과 들어올 때 봤던 거였다. 입구에 들어올 때 한 번 방에 들어올 때 한 번 찍었던 것. 이 곳에 들어오면서 봤던 정국과 같은 옷차림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의 자켓으로 나와 크롭을 감추고 들어오던 정국의 모습도. 정국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우릴 감추고 들어오려 했는지 또한, 이제야 이해가 간다. 리퍼들이 사는 곳이니 크롭과 내가 들어가는 것을 걸리면 안 됐던 거겠지.
"마지막으로, 콜렉터."
"보통 크롭들의 심장을 수집하고 다니는 미친놈들이지. 딱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풍기는 느낌이 아예 다르니까."
"눈에 띄는 화려하고 기다란 자켓. 허리춤에 꽂힌 기다란 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
"콜렉터들은 A,B,C 구역 어디든 자신이 마음에 드는 곳에 살고 있어. 뭐, 크롭들 드글드글한 C구역에 사는 미친놈은 없겠지만, 그 정도로 그들이 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거지."
호석의 말에 집중하며 그를 바라본다. 이미 사과를 다 먹고 버린 후, 진득해진 손이 찝찝한지 손만 만지작거리던 그가 그제서야 나를 바라본다. 마주친 시선에 괜히 흠칫 놀란다. 그의 눈이 진지하게 가라앉는다.
"혹시나 마주치게 된다면, 무조건 도망가."
"뭐, 이미 마주쳤다면 죽음을 면할 수는 없겠지만."
장난스레 웃는 얼굴 뒤로 그의 눈빛은 진지하다. 그를 통해 생각한다. 정말 만약, 내가 콜렉터들과 마주치는 일이 있다면, 나는 죽을 수도 있겠다고.
"이 정도면 대충 설명은 됐으려나."
"정국이가 저렇게 나온 거 보면, 아마 당분간은 여기서 지낼 수 있을 거야. 저래 보여도 아직 어리고 여리니까."
특유의 말투로 가볍게 이야기하며 웃음을 터뜨린 호석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과장되게 자신의 엉덩이를 툭툭 치고 기지개를 편 그가 나갈 태세를 하다 문득 나를 바라본다.
"근데,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
"너 사랑 같은 거 해 봤니?"
"...그게 무슨."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표정이 여력이 드러났다. 뜬금없는 질문이 너무 툭-하고 날라와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아니, 됐다."
"...저기, 호석씨."
"그냥. 감히 네가 그런 걸 했다면, 괜히 네가 미워질 것 같아서."
알 수 없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또다. 또 나를 아는 듯이. 그것도 나를 많이 원망하고, 미워하는 듯.
"난 이만 가봐야겠다."
"다음엔 걔 이름이나 알려주고."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서는 호석을 끝까지 바라본다. 역시, 호석은 무언가 숨기고 있다.
*
호석이 나간 뒤 그제야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혼자 살기에는 커다란 방. 정국 그의 성격인지, 깔끔한 내부는 구석구석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천천히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 밖을 통해 이 곳을 더욱 자세히 보려는 생각이었다. 오는 길엔 너무 겁을 먹고 당황한 탓에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으니까. 창 앞에 서 블라인드를 벌려 밖을 보려고 할 때였다.
[만지지 마세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면, 크롭이 나를 바라본다. 잘못들 은건가 생각을 하기엔 너무나도 뚜렷한 목소리였다. 아니, 목소리라고 하기엔 울림과 같은. 무언가가 울려 퍼져 귀에 닿은 듯한 느낌. 어디서 나온 소리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봐도, 이 곳엔 나와 크롭 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굳어선 채 크롭을 응시하자, 그가 천천히 걸어 나에게 다가온다.
[밖에서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해지실 테니까요.]
살짝 높지만 허스키한 목소리. 이번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건 크롭이 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크롭은 입을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너, 말을 할 수 있었니?"
[아무도 듣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도대체 왜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았어?"
[어차피 다른 분들께서는 저를 듣지 못하실 테니까요. 근데 탄님은 왠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 예감이 맞았네요.]
어느새 앞에 선 크롭이 나를 올려다봤다. 처음 마주했던 그와는 다른 느낌. 처음 느꼈던 기괴한 모습들은 내 꿈이었다는 듯, 반듯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 당황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걸을 수 없다는 아이가 걷고, 들을 수 없다는 아이가 듣고. 그렇다면 말 할 수 없다는 그가 말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으니까. 그럼에도 크롭은 불안한 낮 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자신이 말을 하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런 크롭의 손을 붙잡고 거실 쪽으로 걸어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점차 겹쳐 보이는 한 아이.
"너는 지민, 박지민이 좋겠다."
뜬금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익숙한 이름을 입 속에 자연스레 한 바퀴 굴렸다. 끝내 지켜주지 못했던 아이의 이름. 고아원에서 먼저 날 떠난, 동생의 이름이었다. 내겐 항상 비밀이 많던 아이. 지민은 어렸을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작고 약한 아이였다. 앞에 선 소년의 얼굴에서 왠지 모르게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마른 몸 때문인지, 아님 때 묻지 않은 얼굴 때문인지. 그가 낯설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향해 뻗어오는 그의 손을 꽉 쥔다.
[하지만, 그건 너무 사람 이름 같은걸요?]
"그러니 네게 더 어울리지 않아?"
손가락을 꼼지락 자꾸 불안한 얼굴을 하길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나 걱정했더니, 크롭은 질문 하나가 내 마음에 턱-하고 걸린다. 모든 일에 쉽게 겁을 먹는 크롭이 안타까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자 크롭의 동그란 두 눈이 나를 바라본다. 입술을 꾹- 깨물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동자를 굴린다. 끝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름은, 마음에 드니?"
내 말에 그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어 보인다. 그의 얼굴은 찬찬히 뜯어본다.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사람인데, 왜 저들은 자꾸 이 소년을 죽이려는 걸까. 자신을 향한 시선이 익숙지 못한 것인지, 시선을 피한 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또 한번 방 안을 훑어보는데, 무언가가 눈에 걸린다. 지민의 손을 조심스레 놓고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아까 호석이 앉아있던 테이블 위에 있는 그것.
[정호석]
아까 출입증을 보여준다고 주머니에서 꺼내 흔들더니, 그때 두고 간 것 같았다. 고민을 하다 재빠르게 그것을 꺼내 들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방금 나갔으니,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빨리 따라간다면 얼마 안 가 호석과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황한 얼굴의 지민이 옆에 섰다.
"이거 가져다 주고 올게."
[같이 갈까요?]
"아냐. 빨리 다녀올 테니까, 나 오면 문 좀 열어줘."
내 말에 고민하던 지민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 지민이나 출입증이 없는 건 마찬가지니, 둘 다 나간다면 들어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국이 언제 올지도 모른 채 문 앞에서 정국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엔 다른 이들에게 들킬 가능성도 있었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지민에게 웃어 보인 뒤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나가자마자 복도는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정국의 방은 제일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길은 하나였다. 1306호. 혹시 길을 잃을까 방 호수를 읊조리며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일자로 쭉 이어진 복도 끝엔 코너가 있었는데, 그 코너를 돌면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으면 내가 그에게 출입증을 전해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제발 내려가지 않았기를 바라며 코너를 향해 뛰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림자 하나가 비춰졌다. 호석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쁜 마음에 재빨리 코너를 돌았다.
"호석씨! 이거 두고 가셨어요!"
그 짧은 거리를 뛰었다고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드는데, 순간 이상함을 느낀다. 검은색 광이 나는 가죽 구두. 아까 호석씨가 이런 신발을 신고 있었던가? 아니, 아까 호석씨는 분명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온통 검은색 옷에 신발 하나만 딱 흰색이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 성급했다. 하긴 호석이 아닐 수도 있는데 바보같이 먼저 튀어나왔다. 누군지 확인하고 코너를 돌았어야 했는데. 단 하나의 흠도 없이 깔끔한 신발 하나에 갑작스레 호흡이 멈춰 선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신발과 잘 어울리는 붉은색 정장 바지. 그리고 그 위를 감싸고 있는 비싼 실크 재질의 화려한 자켓. 순간 호석씨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눈에 띄는 화려하고 기다란 자켓.]
천천히 올라간 시선이 앞에 선 남자와 마주한다.
[허리춤에 꽂힌 기다란 칼.]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기다란 눈. 길게 눈을 살짝 덮은 검은색 머리카락.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갈색의 눈동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
콜렉터. 크롭의 심장을 모으는 악취미를 지녔다는 집단.
[혹시나 마주치게 된다면,]
[무조건 도망가.]
바닥에 놓인 발이 차마 움직이지 못한 채 굳어 선다.
[뭐, 이미 마주쳤다면.]
[죽음을 면할 수는 없겠지만.]
숨이 멎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