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 에서의 나날은 달라지는 일도, 새로운 일도 없었다. 권력싸움의 중심으로 들어왔지만 고요하고 적막한 나날이었다. 중전의 힘을 등에 업고 허씨가문의 여식으로써 세자빈 자리에 앉았으니, 세력과 가문에서는 연우가 세자를 휘어잡을 세자빈이 되어주기를 바랬다.중전은 연우가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길 원했고, 세자는 그런 세자빈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수 없고, 보호 받을 수 없는 자리였다. 웃전 문안 때 얼굴을 한번 보여주는 것 외에는 얼굴도 보지 못하는 세자이다. 세자에게는 집안 대대로가 원수로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세자빈인데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고, 말 한번 걸어주지 않는 게 연우는 못내 서운했다.
“세자빈 마마,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어마마마 께서 어쩐일로.., 알았다. 드시라 해라”
“세자빈, 일어나세요, 따라 나설 일이 있습니다.”
“예? 무슨 일 이십니까 어마마마?”
“잔말 말고 따라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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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마마 이러시는 이유만이라도”
“세자빈 참 태평합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것 아닙니까. 세자가 막 지금 경연을 끝내고 이 길로 지나칠 것입니다. 허니 이 어미만 믿으세요”
이유도 모르고 연우는 중전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중전은 어째서 세자빈이 되고도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 것인지 세자빈이 답답하기만 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세자빈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렇게라도 만날 기회를 계속 만들어 줘야지 그래야 이 아무 생각 없는 세자빈이 기회를 잡지 라는 마음으로.
“어마마마.” 하고 고개를 숙여 성우가 인사한다.
“가는 날이 장날 이라더니, 마침 이 어미도 세자빈과 산책이나 할까 하고 나서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세자와 딱 마주치다니, 연은 연인가봅니다.”
“오셨습니까, 세자빈”
성우는 얼어있는 연우를 처음에는 못 본 채 하더니 중전의 눈치에 못 이겨 눈길 조차 주지 않고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한다.
“잘되었습니다. 마침 이리 만나셨으니 간만에 다정히 산책이나 하시지요들”
“소자 지금은 대전에 들러 정사를 논의해야 합니다.”
“어미의 소원입니다. 금슬 좋게 지내는 모습.”
“다복한 시간 보내시지요.”
둘러서 싫다는 거절을 한 성우이지만 중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의 손을 끌어다 성우와 맞잡게 하고 다복한 시간 보내라면서 휙 돌아서 나가버린다.
“가시지요.”
어쩔 수 없이 잡게 된 연우의 손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성우도 이상황이 어색하고 불편한건 마찬가지이지만, 연우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덜덜덜 떨리는 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정확히는 두려워하는 것같았다.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고 무서워보였다. 당사자들은 불편하지만 중전의 눈살에 어쩔 수 없이 같이 걷기 시작했다. 손을 맞잡고 한걸음, 한걸음씩 발걸음을 뗀다.
딱 열 걸음, 중전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 성우는 걸음을 멈춘다.
“어마마마께서 워낙 간곡하시니, 자식 된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다. 정략혼인이라는 것이 남들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이니, 오늘은 보기 좋게 여기까지 하십시다.”
남들 보기 좋으라고 하는 혼인, 성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차갑게 꽂혀 연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었다. 맞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겨 성우가 연우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러니 더는 기대치 마십시오."
세자는 손을 떼어 돌아선다. 민현은 그 모습을 뒤에서 그런 연우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연우를 차갑게 대하는 성우도 미웠고, 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연우도 답답했다. 대체 어릴 때 명랑하고 밝은 모습은 어디 간 건지.
보는 궁인들이 몇 명인데 그 앞에서 창피를 준 게 조금은 마음에 쓰였는지 성우는 하루 종일 뭘 해도 집중을 못했다. 그리고 그걸 민현이 눈치채지 못 할 리 없었다.
“마음 쓰이시는 일 있으십니까 세자저하”
“내 언제 마음 편할 날이 있기는 했느냐.”
“저하의 생각보다 당차고 강한 아이 입니다. 너무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세자빈 걱정에 이러는 줄 아느냐.”
“아니십니까?”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눈동자다. 중전의 세력을 등에 업고 들어 왔으면서도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지, 왜 중전에게 이끌려 다니는 건지, 그 눈빛은 또 왜 말갛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하는 건지. 그 속을 모르겠다 나도.”
“세자빈 마마 걱정은 마십시오. 어릴 때 연우를 따라 다니며 놀리던 개구쟁이가 있었는데, 한 날은 연우가 가만히 보더니 짱돌을 집어 던졌습니다. 저하께서 차갑게 대하셔도 버텨낼 수 있는 아이입니다. ”
“민현이 네 기억 속의 세자빈은 어린아이였지 않으냐, 세자빈도 허씨 가문의 사람이다. 속은 모르는 법이지”
“.........제가 참견이 과했습니다.저하”
“그리고 듣자 듣자 하니 말끝마다 아이라니, 일국의 세자빈이다.”
민현의 위로에 민망하기도 했고 괜히 위로해 주는 사람 혼낸 것 같아 미안해서 왜 세자빈을 아이라고 부르는지 꼬투리를 잡아 때는 성우이다.